이기는 기업 - 위대한 기업을 뛰어넘는
최상철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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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일본 출장길에 도쿄시내 중심부 유라쿠초에 있는 가전양판점 ‘빅 카메라’에 들렀다. 빼곡하게 전시돼 있는 가전제품들마다 손글씨로 쓰인 할인 안내표시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고 남대문 시장에서처럼 점원들이 목청 높여 호객을 하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 씽씽한 실내공간 속에서도 열기가 느껴졌다.    
  

 유라쿠초와 여기서 멀지 않은 긴자에는 이런 특정 업종의 전문양판점들이 즐비하다. 최근 국내에 진출한 유니클로의 긴자점도 부근에서 성업 중이다. ‘일본 상업의 얼굴’로 통하는 긴자·유라쿠초 지역은 유통업체들 간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격전지이고, 수많은 유통업체들이 명멸한 곳이다.   
  
일본 유통의 근현대사는 꽤 드라마틱하다. 미국에서 시작된 편의점 체인 세븐일레븐을 일본형으로 표준화한 세븐일레븐 재팬 이야기나 가전업체의 대표기업인 마쓰시다전기와 ‘30년 전쟁’을 치른 후유증으로 몰락한 대형유통점 다이에의 사례를 보면 난세라 일컬어지던 16세기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방불케 한다. 일본 유통과학대학 최상철 교수가 쓴 <위대한 기업을 뛰어넘는 이기는 기업>(한국경제신문)은 상인국가 일본, 그중에서도 가장 격전지인 유통업계의 흥망성쇠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100엔숍으로 성공한 다이소 그룹의 창업자 야노 히로타케의 경영철학은 ‘임기응변만이 살길’이다. 모든 물건을 100엔에 파는 상식을 뒤엎는 승부수로 회사를 이끌어온 그의 이력에 딱 어울린다. 그는 직원들에게 “3년 안에 회사가 망한다”며 경각심을 불어넣거나 “점포는 목매 죽지 않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괴짜발언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단순히 저가상품만을 파는 게 아니라 ‘다양한 상품들을 단돈 500엔으로 30분간 즐길 수 있는’ 극장형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라는 독특한 발상이 소비자들의 공감을 사면서 시장점유율 60%(2008년 기준)대의 독보적 존재로 성장했다. 
 

 그런가 하면 마쓰시다 전기(파나소닉)는 계열 소매점인 ‘내셔널숍’을 핵심 판매루트로 삼는 유통전략을 수십년째 고수하면서 소비자들의 신뢰와 판매경쟁력 확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아왔다. 2004년 신제품 PDP TV인 ‘비에라’를 개발한 뒤 8000여개의 소매점에 시판 전날밤 일제히 진열하는 ‘깜짝 전략’으로 이 분야 1위에 오른 것도 계열 소매점을 유지해온 덕이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기업만화 <시마과장>의 배경인 하쓰시바전기의 모델이 바로 마쓰시다전기다.  
 

 일본 유통업체들은 격전 속에서도 상생협력을 꾀하는 미덕을 발휘한다. 대형 유통업체 이온이 중소기업들에 PB상품(대형소매상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브랜드 상품) 생산을 맡기면서도 비용부담을 덜어주며 장기 거래관계를 지속하는 모습은 한국의 현실과 사뭇 다르다. 
 

 저자는 일본의 상인들이 제조업을 뒷받침하면서 일본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고 진단한다. 2차대전 후 일본 제조기업들이 급성장했지만 마케팅 수준은 낮아 유통업체들이 상품판매를 맡는 역할분담이 이뤄졌고, 근면한 일본상인들이 새로운 시장개척에 나서는 동안 제조기업은 생산에 전념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이에의 창업자 나카우치 이사오를 직접 인터뷰할 정도로 꼼꼼한 취재와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딱딱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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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 다 빈치 코드의 비밀
마가렛 스타버드 지음, 임경아 옮김 / 루비박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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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때 한때의 유행처럼 교회에 다닌적이 있다. 나는 성격상 쏠림 내지는 몰입현상이 심한 편이어서 당시 기독교에 꽤 빠져들었다. 교회가 가장 부정적으로 미친 영향을 꼽으라면 죄책감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게 마련이라는 점. 이 죄는 반드시 기독교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등등이 내 뇌리속에 깊게 새겨졌다. 사춘기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에 그 때문에 고뇌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철없다는 생각 뿐이다)

 이후 대학에 들어가서 언더써클(당시엔 동아리란 말이 없었다)에 가입하게 됐다. 사회과학책을 열심히 읽으며 때때로 가두시위에 동원되곤 했는데  2학년이 됐을 때 이 조직이 공개써클(당시엔 오픈이라고 했다)의 한 줄기였다는 걸 알게 됐다. 그 공개써클 이름은 기독학생연합회였다. 기독교를 표방하긴 했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이름뿐인 기독교써클이었다. 신학에 대해 한줄도 모를 뿐 아니라 공부도 하지 않았고, 그냥 하던대로 스포츠에 집중했다.

 3학년인가 딱 한번 예배를 본 적이 있다. <시국기도회>란 것이었는데 1학년인 1984년에 학원자율화 조치에 따라 학교바깥으로 철수했던 사복들이 때때로 들어와서 학내시위조차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런 이완(?)된 분위기를 틈타 보수 기독교 써클들이 학교 도서관앞 광장에서 밴드를 동원해 선교를 하는 오만방자한 일이 횡행하면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시기였다. 그해 5월 문익환 목사가  시국강연을 할 때 한 학생이 학생회관 4층에서 분신한 채 투신하는 일까지 있었고(당시 현장에서 온몸을 떨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비장한 학내분위기에서 <시국기도회>는 나쁠게 없는 이벤트였다.

 그런 와중에 읽었던 책이 어느 일본인이 쓴 <예수라는 사나이>와 <신학과 실천>이라는 정기간행물, <숨은 신> 정도였다. 이런 저런 일들이 얽히면서 기독교에 대한 내 감정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종로 5가의 기독교 방송 건물에 자리잡은 한국기독학생연합(KSCF)에 가끔갔다가 그 건물 주위를 맴돌며 “WCC는 빨갱이”라고 확성기로 떠드는 가두선전 차량을 보며 혀를 차던 기억도 새롭다. 한국교회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빈치 코드>를 최근에 본 뒤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를 보며 기독교에 결핍된 게 뭔가 어렴풋이 잡히는 것 같았다.(이 책의 주된 타깃은 물론 로마 카톨릭이겠지만) 고교때 여학생을 동경하며 동시에 가져야 했던 죄의식은 기독교의 불완전성 탓이 아닐까 싶었다. 남녀의 문제를 외면해 버려야 종교로서, 대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기독교의 숙명도 이해가 됐다. 거세된 기독교, 화석화된 기독교, 신자들을 한없이 괴롭게 하는 ‘인간의 굴레’로서의 종교가 원래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제시된 내용들 - 여성이 기독교 이야기에서 누락된 이유, 그 상실이 서구 문명에 가져왔던 파괴, 회복될 수 있는 방법 등은 반드시 맞다는 보장은 없지만 개연성이 높은 내용들이다. 만약 이 가설들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진다면? 기독교는 이 이설들을 끊임없이 부정할 것이고, 되도록이면 근절하고 싶어할 것이다. <다빈치 코드>에서 오푸스 데이 같은 보수 카톨릭 집단들과 시온 수도회 등 성배를 수호하려는 집단간의 물밑 갈등이 지금 이 시간에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다. 다빈치 코드를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면 기독계열 출판사들이 낸 수십권의 반론서적들이 뜨는 것에서도 이런 개연성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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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토머스 F. 매든 지음, 권영주 옮김 / 루비박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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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과 그리스도의 성묘를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탈환하겠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십자군 운동에 대해 정리한 이 책은 십자군에 대한 현대 역사가들의 부정적 편견을 걷어내고 당대의 시각으로 조명하려고 애쓴 작품이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십자군이 유럽의 ‘무용지물’들이 모인 집단, 즉 영지나 작위를 계승할 권리가 없는 귀족의 둘째 또는 셋째 아들, 노상강도들, 탐욕스러운 수도사들로 폄훼했다. 또 유럽최초의 식민지 전쟁이자 이슬람에 대한 원시 제국주의로 묘사하는 서술들이 많다.

 하지만 최근들어 십자군 원정과 관련한 대량의 고문서들이 분석되면서 십자군의 다른 면모가 발견되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십자군에 참가한 기사들의 대부분은 영주의 아들들이 아니라 영주 자신이었고,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잃을 것이 매우 많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기사가 십자군 원정에 나가기 위해서는 연수입의 대여섯배에 해당하는 자금이 필요했고, 이는 십자군 기사와 그의 일가가 재산면에서 심각한 타격을 받음을 의미했다.(44쪽)
요컨대 치러야할 대가는 너무 큰 반면 돌아올 보상은 너무 낮아 사업으로 치면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다. 왜 수천명의 기사와 귀족들이 이런 리스크를 감당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역시 당대의 시각이 필요하다. 저자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신에 대한 꾸밈없고 진실한 사랑때문에 십자군에 참가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들 가문들은 이미 수세기 동안 유럽의 교회와 수도원에 토지와 부를 아낌없이 기증해왔다. 귀족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으므로 그 은총의 결실을 하느님의 백성과 교회에 되돌려주는게 그들의 의무였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은 그런 의무를 수행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45쪽)
 이런 신앙심과 순수한 이상과 함께 동시에 오만하고 잔인한 양면을 지닌 것이 십자군의 실체였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는다. 십자군 원정은 전투능력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회였고, 가진것 없는 자들은 역시 원정을 통해 어떤 수확이 있기를 기대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중세 교권과 왕권간의 긴장과 알력, 서유럽과 비잔틴 제국간의 갈등과 타협, 이슬람-비잔틴제국-서유럽간의 관계, 유럽내부에서 이단에 대한 십자군의 폭력, 템플기사단을 비롯한 종교기사단의 태동과 몰락 등 중세 서양사의 다양한 이면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도 제공한다.
 사자심왕으로 불리던 영국왕 리처드 1세,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쿠르드족 출신의 아이유브 왕조 지배자 살라딘(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오스만투르크의 유럽 정복 직전에 혜성처럼 나타나 유럽인들을 안도케 한 티무르, 로도스기사단과 키프로스의 역사들도 흥미롭다.  

 본문에서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싼 기독교세계와 이슬람, 그리고 서유럽과 비잔틴제국간의 공방전을 보면서 2004년 1주일쯤 머물던 이스탄불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도 즐거움이었다. 책을 보면 당시의 콘스탄티노플이 얼마나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던 도시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아무리 그곳에 오래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콘스탄티노플의 경이를 일일이 세거나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지상에 단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행여 누군가 그곳의 수도원과 교회들과 궁전들과 시가지에 존재하는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 고귀함을 100분의 1이라도 전한다 해도 당신은 그것을 거짓말이라 생각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피카르디 기사인 클라리의 로베르)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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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야만 - 20세기의 역사
클라이브 폰팅 지음, 김현구 옮김 / 돌베개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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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쪽에 달하는 이 책을 잡기 시작한지 2년만에 읽었다. 서재에 꽂힌 책을 볼 때마다 두고 두고 부담이 됐는데, 어쨌건 끝냈더니 속이 후련하다. <녹색세계사>의 지은이인 클라이브 폰팅의 이 저작은 연대기순이 아니라 각기 정해둔 테마에 맞춰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전개돼 있다. 제국, 전쟁, 사회 등등의 분류대로 책을 읽어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단조로운 느낌이 든다. 가급적 사관을 배제하고, 객관을 지향하는 서술(역사서에서 객관적이란 말이 허무하긴 하겠지만)방식이라 어쩔 수 없을 수 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지만 알지 못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체계적적으로 섭취할 수 있다.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유전은 서방자본에 의해 장악됐지만 멕시코의 경우는 1938년부터 국유화된다. "1938년 3월18일 정부는 산업의 완전한 몰수와 국유기업 페멕스(멕시코석유회사) 설립을 선언했다. 이 조치에 외국 기업과 그 정부들은 분노했지만 멕시코인들 사이에서도 거대한 애국적 대응이 일어났다. 새로운 회사는 석유산업을 운영할 능력을 곧바로 입증했고, 외국정부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469쪽)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중간계급 집단이 좀더 포용적인 민주적 시스템을 수용하기 보다는 노동자계급과 농민을 배제한 채 엘리트층과 동맹하여 독재를 지지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482쪽) 20세기 대표적 야만의 사례인 홀로코스트에 대해 저자는 단순한 집단학살과는 다른 29세기의 특정적인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홀로코스트의 기원으 유럽의 반유대주의 역사에 깊이 뿌리박힌 것이지만 인종주의와 우생학에 관한 19세기적 개념에 의해 증폭되었다. 그것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가스실과 대량화장을 가능하게 한 기술의 발전, 산업적 진보가 있어야 했다. 관료제의 성장이라는, 또 다른 특별히 20세기적인 현상도 그것의 실행에 중요했다. 또한 살해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확인하고,처리하며, 살해센터로 보낼 '합리적'이고 규율잡힌 조직도 있어야 했다. (640쪽) 객관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저자는 진보와 야만이라는 두가지 관점에서 20세기 개개의 사건들이 어느쪽으로 기울어졌는지를 드러내려 애쓰고 있다. 20세기는 서구인의 관점에선 과학과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진보에 대한 갈망이 컸지만 두차례의 세계대전으로 환상은 깨졌다. 나머지 나라에서는 착취와 고통, 전통과의 단절이 있었고, 지구 전체적으로 대량학살과 환경파괴 등 야만이 자행되던 야누스적 시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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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 코드 1 로버트 랭던 시리즈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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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 말들이 많았던 소설인데 뒤늦게 보게 됐다. 언젠가 비행기안에서 영화를 비몽사몽식으로 봤는데 알비노(백색증 환자)인 사일래스의 연기가 너무 강렬해서 제대로 보고프다는 생각이었다. 허나 세월이 흘러 흘러 못보고 있다가 딸내미 학교에 책반납하러 갔다가 있는 김에 빌렸다. 주말내내 시간가는줄 모르고 탐독했다.   

 일단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잔뜩 나와 있는게 맘에 들었다. 생각의 줄기가 이런곳으로도 뻗게 되는구나 하는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템플기사단, 오푸스데이, 시온수도회 등등 비밀스런 조직들의 존재도 첨 알게 됐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이교성(그를 더 매혹적으로 잡아끄는)을 접하게 된 것도 재미였다. 결론부가 좀 실망스러운 점은 있지만 어차피 이 정도이상 끌고 나간다면 감당못할 환타지가 돼 버릴 우려가 있다.   

 작가 댄 브라운이 소설에 배치한 각종 역사적 장치들의 진위여부는 제쳐두고 그의 논지는 매력적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가 로마시대에 공인된 이래 여성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권위를 유지해왔다는 점, 마치 시신에서 내장을 빼내 박제로 만들듯,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감추려 했다는 점, 인간구원의 종교를 표방하면서 종교적 권위를 지키기 위해 수백만을 이단으로 몰아 살육을 서슴지 않았던 이율배반 등에 대해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은 공감할 수 있다.  

 중세에 한 여인이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던 영화의 장면이나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승들의 성매매 장면, 살육과 강간, 약탈로 점철된 십자군 전쟁의 추악함 등등이 이 소설을 읽으며 무수히 떠올랐다.(내친 김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도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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