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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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영화 재개봉이 유행이다. 얼마전에는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2008)>도 다시 개봉했다. 예전에 영화를 꽤 좋게 봤던 터라 이번에 한 번 더 보았다. 전에도 그랬지만 영화를 본 뒤 원작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영화에서 생략된 것, 영화와 달라진 것, 한나(케이트 윈슬렛 역)에게서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 등을 알고 싶었다. 영화에서 모호했던 한나와 미하엘(영화에서는 ‘마이클’)의 모습을 책을 통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이 영화보다 훌륭하다, 라는 이야기도 많던데 딱히 영화가 더 낫다, 책이 더 낫다, 라고 평을 내리기엔 무리가 있을 듯하다. 책이 좀 더 잘 표현한 부분도 있고, 영화가 더 훌륭하게 재현한 부분도 있다.

영화 <더 리더>

영화의 배경이 전후 독일이라 한나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독일의 정치적 상황(한나는 동독이나 서독의 스파이 역할을 한 게 아닐까 이런 상상)과 맞물려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을 했다. 그러나 영화 중반쯤 한나의 작은 비밀은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 마이클과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메뉴판을 건네자 당황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 이 여자는 글자를 모르는구나.’하고 눈치 챌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에 밝혀질 그녀의 큰 비밀은 그때도 그저 짐작으로만 간직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나의 커다란 비밀이 밝혀지면서 한나와 마이클의 개인적인 역사에서 독일(때문에 세계 전체)의 역사로 이야기가 확장된다. 한나는 나치 친위대에서 감시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전력 때문에 전후 처리 과정에서 그녀는 재판대 위에 서게 된다. 그리고 주모자로 몰려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이 과정에서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문맹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 차라리 종신형을 언도 받는 것이 더 편했던 것일까, 그녀는? 한나는 그렇다 해도, 마이클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면서 그녀가 그렇게 자기를 포기하도록 방관하는가. 그녀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저 존중하는 것일까? 이 둘의 선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영화에서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는 장면이 있는데, 감옥에 갇힌 그녀를 위해 마이클이 책을 낭독한 테이프를 만들어 우편으로 보내고 그 테이프로 한나가 드디어 글을 깨우쳐, 마이클에게 어린아이 같은 글씨로 편지를 보낸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정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한나의 죽음 뒤에 그녀의 쓸쓸한 독방을 보며 마이클이 울음을 삼키는 장면도 그렇고. 두 사람의 긴 세월동안 이어진 사랑‘만’을 생각하면 한없이 쓸쓸하고 서글퍼져서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책 <책 읽어주는 남자>

영화에서 조금 모호했던 것은 한나가 정말로 마이클을 사랑했는가에 관한 것이다. 마이클의 관점으로 그려져 피상적으로만 다뤄진 한나의 진짜 성격도 궁금했다. 그러나 책 역시 미하엘(마이클)의 시선으로 그녀가 그려지고 있기에 ‘한나’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강박증을 가진 사람처럼 질서와 정돈된 상태를 좋아하고 그것이 파괴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게 아닐까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책에서는 그런 그녀의 성격이 글자를 모르는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게 좀 더 명확해 졌을 뿐.

영화는 자칫 한나가 그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필요해서 마이클을 이용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법하다. 이런 의문은 책을 읽으면서 그들이 정말 사랑했음을 알게 된다. 영화에서는 그들이 정말 사랑했음을 나타내주는, 아니 한나가 마이클을 정말 사랑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를 생략했던데, 일부러 그런 것인지 이 장면은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에서 사면을 앞둔 한나가 느닷없이 자살을 하는데, 그 과정이 설득력이 좀 떨어졌다는 점이다. 마이클이 차갑게 대해서?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두려워서? 홀로코스트의 대리인으로 살았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그저 추측할 뿐이었는데, 책에서는 이 점이 더 명확해졌다. 이것도 어떻게 좀 설명을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게다가 영화에서 마이클이 딸을 데리고 한나의 무덤을 찾는 엔딩은 사족 같기도 하고, 느닷없어 낯간지럽기도 했는데 책의 엔딩을 따랐다면 더 여운이 남았을 듯하다.

책을 읽어주다 / 사워를 하다 / 사랑을 하다

영화나 책이나 가장 중요한 행위는 한나와 미하엘이 책을 읽어주고, 샤워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문맹인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미하엘은 그녀에게 이제까지는 전혀 보지 못했던, 알면서도 알지 못했던 세계를 일깨워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책에서는 특히 한나가 직접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면서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과 자료를 구해서 읽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글을 알기 전 한나는 홀로코스트를 ‘알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미하엘을 통해 드디어 세상의 진실과 맞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행위는 그들이 진실로 통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고, 한나가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되는 중요한 길이기도 하다. 그런 세계를 알게 해준 사람이 미하엘이므로 나이가 아무리 어릴지언정 한나가 그를 사랑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나는 무척 청결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샤워하는 것도 자주 등장하고, 제복을 입은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미하엘을 깨끗하게 씻겨주는 모습도 자주 나온다. 마치 무언가 더럽혀진 것을 씻어내듯 강박적으로 씻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녀가 그렇게 씻어버리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씻을 수 없는 과거는 아니었을까. 의식처럼 행해졌던 책 읽기, 샤워, 그리고 사랑의 순서를 기억한다면. 그들에게 샤워는 단순히 씻는 행동으로만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15세 소년과 36살의 여성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순히 성적인 욕망을 채우는 관계? 흔히 사랑을 나누는 것을 ‘관계를 맺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나는 홀로코스트를 직접 체험한 세대이며, 어떤 의미로는 그 피해자이자, 주동자이다. 그러나 미하엘은 독일 전후에 태어난 세대이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그 둘이 ‘관계’를 맺었다. 성적으로 맺어진 관계이지만, 단순히 성적인 의미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윗세대가 저지른 일을 아랫세대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어떤 의미로는 윗세대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어야(한나에게 책 읽기를 통해 세상의 진실을 알게 해준 것처럼)하고, 이해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용서와 화해
이렇게 본다면, 미하엘이 한나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한나를 외면했던 자신의 배반을 괴로워하는 모습은 ‘홀로코스트’ 세대를 용서해야 한다는 ‘옹호’로 읽힐 수도 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는 실제로 홀로코스트 주동 세력에 대해 옹호의 입장을 내비친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거대한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은, 특히 한나처럼 아무것도 아닌 개인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생각해 본다면 그런 세력에 대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한나가 감옥에서 읽은 책 목록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있던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때문에 ‘관료적 의무’를 ‘기계적’으로 충실히 수행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을 보면서 한나도 어느 정도는 공감을 하지는 않았을까. ‘그게 나의 일이었는데, 어쩔 수 있었겠느냐’며 말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해서는 안 될 죄를 짓고 ‘단지 나는 나의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때문에 용서를 해야 한다면 세상에 죄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처럼 무지로 인해,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게 죄라는 것도 모른 채 죄를 지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 읽어주는 남자>는 이렇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영화와 책 그 어느 것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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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직업 - 고통에 대한 숙고
알렉상드르 졸리앵 지음, 임희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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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이 신선해서 좀 깊이 있거나 색다른 지적 경험을 기대했는데, 참 뻔한 이야기가 줄줄 나와서 당황했다. 게다가 책 두께와 그 가격에 더 당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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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 센스 - 고양이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존 브래드쇼 지음, 한유선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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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로서 겸허하게 읽었습니다. 저희집 냥님들을 조금더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더군요. 그분들을 모시는데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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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메이카 여인숙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한애경.이봉지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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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니 듀 모리에 단편을 읽고 끌려서 읽게 된 그녀의 장편. 초반엔 자메이카 여인숙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몹시 긴장*궁금하다. 중반에는 좀 맥이 빠지다가 맨끝에 대반전이 기다린다. 메리가 좀 더 독립적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히치콕의 동명 영화는 결말이 다르다는데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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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의 순간
필립 베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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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던 <이런 사랑>을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 들고 읽었을 때만 하더라도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작가라고만 생각했던 필립 베송. 그러다 <10월의 아이>를 도서관에서 발견하고는 ‘어, 필립 베송이네?’하고 자연스레 한 번 더 그의 작품을 읽었다. 그리고 <10월의 아이>를 읽은 이후로는 나도 모르게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 <포기의 순간>이다.

작품의 몇 페이지만 들춰 읽어 봐도 특유의 서걱서걱함이 여전히 느껴진다. 쓸쓸하고 체념적인 어조, 그러면서도 물기를 머금고 있는 듯한 묘한 문장.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라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포기의 순간>은 단번에 읽힌다. <이런 사랑>이나 <10월의 아이>에서처럼 과연 주인공(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한 ‘흥미진진함’도 한 몫 하지만, 뭐랄까 이 소설의 배경인 해안 마을 ‘팰머스’의 안개 자욱한 무거운 분위기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던 이유도 컸으리라.

이 책의 첫 시작은 ‘토머스 혹은 죄인’이라는 부제로 출발한다. 앞서 언급했듯 안개로 가득한 해안 마을 팰머스에 토머스라는 남자가 ‘귀환’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토머스는 팰머스에서 태어나 어느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온 듯하다. 폐쇄적이고 암울한 느낌의 ‘팰머스’- 언젠가 이 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그는 이제 ‘죄인’으로 불린다. 과연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토머스의 독백을 통해 독자는 조금씩 그 비밀에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밝혀지는 그 비밀은 사뭇 충격적이다.

온라인 서점 등에는 이미 ‘스포일러’라고 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이 ‘충격적인 비밀’이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및 독자들의 리뷰에서 언급되고 있다. 만약 이 책을 읽어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비밀을 모르는 채 읽는 편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혹 ‘스포일러’를 당했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약간의 재미가 반감될 수는 있겠지만 그 비밀의 사건이 토머스의 인생 및 이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전해주는 의미는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랑>과 <10월의 아이>에서도 삶의 경계선에 놓여있던 이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필립 베송은 <포기의 순간>에서는 아예 삶을 ‘포기’ 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토머스뿐만 아니라 그가 만나는 몇몇 인물들은 대부분 삶의 경계에 선 이들, 혹은 경계를 벗어나 버린 이들이다. ‘추방된 것이나 다름없는 자’ ‘이곳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비합법적인 자식들’, ‘무엇하나 빌려보기도 전에 빚을 진 자’ ‘ 영원한 채무자’들의 이야기를 쓸쓸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필립 베송이 이런 암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음에도 마지막 순간에 ‘쿵’하는 감동을 전해주는 이유는 아주 작은 ‘희망’일지라도 그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10월의 아이>에서도 절망스러운 순간을 ‘사랑’으로 극복했듯 <포기의 순간>에서 죄인으로 추방당한 토머스 셰퍼드에게도 ‘구원의 순간’은 찾아온다. 사람들이 숨 쉬고 살아가는 ‘이곳’에서는 여전히 용서받지 못할 ‘경계를 넘어버린 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만약 그들에게도 하나의 구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사랑’이라고 필립 베송은 조용히, 담백하게, 쓸쓸히, 그러나 아름답게 말한다. ‘사랑’ 때문에 지옥을 겪은 남자가 결국은 ‘사랑’ 때문에 구원받는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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