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 - 야콥 폰 군텐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그 작품 속의 야콥은 발전을 거부한, 오히려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고 바란 반(反) 영웅적 인물로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다. 그 한 작품만으로도 발저의 이름을 가슴에 새겼다.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다 읽은 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작품들을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그때는 그 작품뿐이었다. 하지만 언제고 발저의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어 나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과 단편을 모은 <산책> 또는 <산책자들>, <세상의 끝>이 번역되었고, 드디어 그의 장편 <타너가의 남매들>이 선을 보였다. 장편이라니! 발저의 작품에 목이 말랐던 나 같은 독자에게는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았다. <타너가의 남매들>을 몇 장 읽지도 않았지만, 아, 역시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이 틀림없구나, 무릎을 친다. 감탄을 한다. <야콥 폰 군텐 이야기>의 야콥이 자라서 어른이 된다면 <타너가의 남매들>의 주인공 ‘지몬’이 되었을 것이다. 확신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타너가의 남매들>이 오히려 발저의 첫 작품에 속한다.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타너가의 남매들>이 쓰인 뒤 몇 년 뒤에 발표한 작품이다. <타너가의 남매들>은 발저가 20대 때, 그것도 6주 만에 쓴 작품이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로베르트 발저,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생각을 담은 작품을 그 나이에 쓸 수 있었을까.
“저는 지몬이라고 합니다. 여태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약간의 재산을 받았는데, 방금 막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썼습니다. 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요. 뭘 배울 맘은 없었죠. 일을 함으로써 낮의 성스러움을 모독할 만큼 무모하기엔 낮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꼈거든요. 나날의 노동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이 사라지고 마는지 아실 테지요, 학문을 터득하느라 태양과 저녁달 없이 지내는 것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 풍경을 감상하는 덴 몇 시간이 필요했어요.” (<타너가의 남매들>, 233쪽)
지몬은 자기소개대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사람이다. 물론 그도 때때로 일한다. 그러나 그 일은 오래 가지 못한다. 자신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최소한의 노동만을 할 뿐이고, 그 일의 종류는 수시로 바뀐다. 일을 통한 성장이나 진보 발전 따위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자신의 젊은 원기를 숨 막히고 융통성 없이 무딘 사무실에서 묵히는 게 싫어 언제나 금세 떠난다. 쫓겨난 적은 결코 없다. 늘 어느 순간이 되면 제 발로 걸어 나온다. 그런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들- 그러니까 ‘근면, 충실, 시간 엄수, 눈치, 냉정, 겸손, 절제와 목표 의식’ 등등 오만가지에 그는 치를 떤다. 절반의 자유를 갖는 게 싫기에 아무것도 안 가진 쪽을 택하겠다는 지몬.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적어도 제 영혼은 제 것이거든요.” (15~16쪽)
“저는 출세하고픈 욕망도 전혀 없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부분인 게 저한테는 최소한입니다. 저는 출세라는 걸 맹세코 대단하게 여길 수가 없거든요. 이런 거에 뭐 굉장할 게 있나요. 너무 쬐그만 책상 앞에 서 있느라 일찌감치 굽은 등, 쭈글쭈글 주름 많은 손, 창백한 얼굴, 망가진 평일 바지. 후들거리는 다리, 뚱뚱한 배, 상한 위장, 탈모로 맨숭맨숭한 머리, 핏기 없고 열정 없는 눈, 의무에 충실한 바보였다는 의식에. 사양합니다! 저는 차라리 가난하지만 건강한 채로 있겠어요. 저는 물론 딱 한 사람한테서만 존중받고 있기는 합니다. 즉 저 자신한테서요. 하지만 그 사람한테서 존중받는 게 저로선 가장 중요한 그런 한 사람이죠. 누가 ‘평생직장’이라는 낱말이나 이 낱말에 내포된 터무니없는 요구를 갖고 저를 대하면 저는 광분해요. 저는 인간으로 남아 있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저는 위험한 것, 신비스러운 것, 어슴푸레한 것, 통제 불가능한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322쪽)
간간이 일하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회적 출세나 신분 상승, 일함으로써 돈을 벌고, 부를 쌓는 등의 경제적 성장과는 전혀 거리가 먼 지몬. 그가 사랑하는 것은 자연을 벗 삼는 일이다. 황홀한 전망이 눈앞에 펼쳐지고 오감이 자연스레 휴식하며 생각은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연 속의 산책. 일하면서 휴가를 갈 수 있지 않느냐고 반박하는 사람에게 지몬은 말한다. 개한테 던져 주듯 그렇게 주어지는 자유는 증오한다고. 고꾸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삶과 겨룰 생각이라고.
회사에서 주겠다는 증서, 말하자면 경력증명서 같은 것조차도 거부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증서를 물어본다면 자기 자신을 보면 안다고만 말할 것이라고. 그게 오히려 분별 있고 제대로 보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증서를 거부하는 이유 또한 어딘가에 묶여서 일하는 것과 그 틈틈이 주어지는 휴가를 거부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증서란 자신의 비겁함과 두려움을 기억시켜 줄 뿐이기 때문이다. 늘어지고 맥없는 상태를, 부질없이 허송세월한 시절을, 화가 나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오후들을, 아름답지만 쓸데없던 절절한 동경의 저녁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타너가의 남매들>을 읽노라면 지몬은 <벤야멘타 하인 학교>의 야콥이며, 그 야콥과 지몬은 모두 로베르트 발저 그 자신이나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된다. <타너가의 남매들>의 다른 인물, 즉 지몬의 형인 카스파, 누나 헤드비히는 실제로 발저의 형과 누나를 모델로 하고 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즉 <타너가의 남매들>은 <발저가의 남매들>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때문에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발저라는 인물과 그 일가에 깊은 관심이 생긴다. 그들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이렇게 여느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을까? 마주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하긴,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이 작품 속 지몬의 독백과도 같은 이야기들과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타너가의 남매들>은 지몬과 클라라, 지몬과 헤드비히, 지몬과 클라우스 등 거의 모든 이야기가 지몬과 다른 인물들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대화는 독백과 마찬가지이고, 그 독백을 듣는 사람은 독자이다.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지몬의 일자리가 바뀌어 있고, 사는 곳이 바뀌었고, 때로는 연인이 달라지기도 한다. 지몬의 이 수다스럽지만 내밀한 독백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어떤 의문이 든다. 정말 우리는, 아니 나는 무엇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성장이나 발전, 진보 같은 개념들이 언제나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정말 그게 선(善)일까?
“아침 8시에 일하러 갈 때면 마찬가지로 아침 8시에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과 나는 한 가족이나 되는 듯 느낍니다. 이 무슨 거대한 병영인지요. 이 현대의 삶이란! 그러면서 바로 이 획일성이야말로 얼마나 그럴듯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지.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뭔가를 마주쳤으면 하고 끊임없이 갈망하지요. 그토록 가진 것 없고 그토록 빈곤하기 짝 없는 신세, 스스로가 그토록 가망 없이 여겨진다는 겁니다. 교육받고 갖추었고 철저하고, 그렇게 다 가진 마당에 말이죠.” (22쪽)
“어떤 사람이 책상 일을 하는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일이 있기도 해. 그렇게 되면 그는 50년 동안 회사에서 ‘일했다’는 걸로 무슨 득을 본 걸까? 그는 50년 동안 매일같이 똑같은 문을 드나들었고, 골 천 번 업무 편지들에서 같은 관용 표현을 썼고, 양복 몇 벌 바꿨고 자신이 구두를 한 해 동안 얼마나 조금 소비하는 가에 대해 한 번씩 놀라곤 했지. 우리는 그가 살았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수천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41~42쪽)
지몬의 통찰력 빛나는 이야기가 뼈저리게 와 닿는다. 위로 올라가기를 거부한 사람,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에 대한 저항, 일부러 작은 존재이길, 아무런 존재도 아니길 고집하고 그것을 온 몸으로 구현한, 발전 없는 존재 지몬, 그리고 야콥. 자신은 뭘 가져 본 적도 없으며, 뭐가 되어 본 적도 없고 부모님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뭐가 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 기이한 인간 지몬. 그의 모습에서 완전한 자유인으로서 당당한, 인간으로서 더없이 숭고한 모습을 본다. 현대 사회에서 지몬처럼 살기란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외치는 반 성장, 반 영웅적 이야기는 더 가슴을 울린다.
“남들은 저를 한량이라고 여기지요. 하지만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전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저는 머물러 있고 앞으로도 아마 머물러 있을 거예요. 머물러 있다는 건 너무도 달콤합니다. 가령 자연이 외국으로 가는 거 봤나요? 다른 데 가서 더 녹색인 잎을 틔운 다음에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제 모습을 뽐내자고 나무들이 이주하던가요? 강과 구름은 가지요. 하지만 그건 다르죠. 오묘한 떠나감이에요. 결코 돌아오지 않거든요. 간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게 아니라 날면서 흐르면서 쉴 뿐이죠. 다른 사람들은 여행하고 더 똑똑해져서 돌아오라지요. 저는 어느 날 여기 이 땅에서 품위 있게 죽을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도 남는답니다.” (320~321쪽)
로베르트 발저는 지몬의 저 바람대로,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자연의 품에 안겨 심장마비로 죽었다. 왠지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있었을 것 같다. 야콥-지몬-그리고 발저. 세 인물이지만 동시에 한 사람인 존재. 로베르트 발저가 창조한, 도무지 발전할 줄 모르는 야콥과 지몬은 문학작품이 만들어낸 가장 문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나는 야콥이나 지몬처럼 살 자신은 없다. 도무지 없다. 그럼에도 지몬의 외침은 가슴을 울린다. 앞으로 나아가던 발걸음을 잠깐 멈추게 한다. 숨을 고르고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