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급행열차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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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급행열차>는 제임스 설터의 첫 번째 단편집이다. 우리나라에는 그의 두 번째 단편집인 <어젯밤>부터 소개되었다. 애초에 첫 단편집인 <아메리칸 급행열차>로 독자를 만나는 게 순서가 아니었을까?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어젯밤>으로 먼저 이 땅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아메리칸 급행열차>는 <어젯밤>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어젯밤>에 비해 읽기도 수월하지 않다. <어젯밤>이 명료하고 간결하면서도 매우 강렬했다면, <아메리칸 급행열차>는 모호하고 흐릿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백, 그 빈틈에 뭔가가 있는 것만 같아서 읽다가 자꾸 멈추게 된다, 문장 앞으로 돌아가는 일이 잦다. 내가 놓친 게 많은가? 내가 잘못 읽고 있나? 자기를 탓하게 된다. 그럼에도 아, 역시 설터구나 하는 순간들이 분명 존재한다.



새 차나 다름없는 자신의 스웨덴 차 옆구리에 생긴 움푹 팬 자국 같은 인생 (44쪽, ‘인생’)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은 머릿속에 드리워진 얇은 막 같은 것이 걷히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안개 속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다시 한 번 책을 넘기다가 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새 차나 다름없는 스웨덴 차 옆구리에 생긴 움푹 팬 자국 같은 인생’이라는 표현. 아, 맞아, 그래. 그 순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메리칸 급행열차>에 실린 열 한 개의 단편은 거의 모두가 그런 움푹 팬 자국 같은 인생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새 차나 마찬가지인 자동차에 움푹 팬 자국이 생기면 처음에는 몹시 신경이 쓰인다. 몇날 며칠은 마음이 쓰릴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그 자국을 잊는다. 그런 자국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더욱더 그 자국에 둔감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그 자동차를 언제 새 차였냐는 듯이 굴리다가는, 다른 새로운 자동차에 눈독을 들이고, 마침내 그 차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와 함께 그런 모든 자국들도 잊힌다. 한때 몇날 며칠 마음을 쓰리게 했던 자국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잊는다. 그러나 기억에서 희미해진다고 해서 그 자국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바로 그런 움푹 팬 자국, 그러나 곧 잊힐 그 미묘한 순간을 설터는 눈 여겨 본다. 거기에 주목하고, 그 미세한 균열의 순간을 포착했기에, 11개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인생에서 지금 어떤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혹 알더라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흘려버리거나 때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덮고 간다. 그 자국, 그 균열은 곧 잊히거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이러할 진데 그들의 삶을 엿보는 독자는 더더욱 그 움푹 팬 자국과 균열, 삶에 미세한 틈이 생기는 순간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때문에 <아메리칸 급행열차>는 마치 ‘급행열차’를 탄 듯이 빠른 속도로 읽을 수도 있지만 그러고 나면 주위 풍경을 하나도 보지 못한 채 목적지에 다다른, 조금은 허망한 여행이 될 수도 있다. 느리게 가더라도 미처 보지 못했던 온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완행열차를 탄 것처럼 천천히 읽다보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랄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아마도 가장 좋아하는, 또는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을 골라보라고 한다면 ‘20분’을 고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 또한 처음에는 그랬다. 이 책의 서문을 쓴 ‘필립 구레비치’도 ‘20분’을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그는 이 작품을 ‘매우 냉혹하고 날렵함, 매 순간 육체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또한 긴박감 넘치는 동시에 고통스럽고, 안쓰러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마치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딱 20분의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써서 들려주는 것 같고, 그 20분 안에 전 인생을 드러’ 냈으며 ‘동시에 압축과 팽창은 흥분과 전율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설터의 지혜와 예술을 반영한다(12쪽, 서문)’고 말한다. 맞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 실린 단편 가운데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가장 선명하게 독자에게 가닿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20분’보다도 ‘탕헤르 해변에서’나 ‘아메리칸 급행열차’, ‘황혼’, ‘괴테아눔의 파괴’와 같은 작품들이 <아메리칸 급행열차>의 전체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한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탕헤르 해변에서’는 니코와 맬컴 두 연인 사이에 니코의 친구인 ‘잉게’가 불쑥 끼어든다. 잉게 그 자체가 삶의 미세한 균열이자, 움푹 팬 자국이다. 그런데 니코도 맬컴도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아니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뭔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애써 외면한다. 그들 삶에 이렇다 할,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지만 균열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은 어느 순간 아마도 잊히리라. ‘아메리칸 급행열차’의 성공한 두 변호사들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성공만큼 타락도 빨리 찾아온 그들의 삶. 둘은 급기야 여행지에서 한 여자를 공유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들의 삶은 정말 성공뿐일까? 그 두 남자의 어쩐지 공허한 몸짓들이 삶에 움푹 팬 자국을 떠올리게 한다. 고급 스포츠카 어딘가에 남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틀림없이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은 자국을 연상케 한다.

‘황혼’의 중년 여성 ‘챈들러’ 부인은 남편에게도 버림 받은 채 혼자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집을 수리하러 오는 ‘빌’과 한때 은밀한 사이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빌은 아내와 재결합하기로 했다고 통보한다. 조금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는 그녀에게 빌은 화를 낸다. ‘마흔 여섯. 그 세월이 목과 눈 밑에 스며있었다. 그녀의 젊음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애원해야 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희망을 품었던 길었던 여름은 가버렸다.’ (189쪽, ‘황혼’) 아무도 원하지 않게 된 그녀를, 잠시나마 원했던 빌조차 이제는 가버린 것이다. 작가 나딘은 언젠가 ‘괴테아눔 The Goetheanum’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 의미는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위대한 행위를 뜻하는 것’(212쪽, ‘괴테아눔의 파괴’)이다. 그런데 괴테아눔은 덧없이 잿더미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마치 나딘이 결코 위대한 작가가 되지 못하듯이 말이다.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어떤 사람은 이혼했으며, 땅을 파는 일을 하는 더그 포티스 같은 사람은 경찰관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가 트레일러 안에서 총을 맞았다. 그녀의 남편 같은 사람은 산터바버라로 가서 디너파티의 여분의 남자가 되었다. (50쪽, ‘20분’)


인생의 위대함을 뜻하는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어떤 사람은 이혼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가도 총에 맞아 죽는다. 그런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디너파티의 ‘여분의 남자’가 되고 마는 삶. 한때는, 젊었을 때는 재능 있어 보이고, 삶에서 어떤 위대함을 이룩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그저 산산이 부서지고 마는 삶. 그리하여 ‘인생의 항해를 시작해본 적이 없’이 그저 ‘해안 근처에만 머물’(168쪽, ‘애크닐로’)고 마는 삶. 그런 삶들이 <아메리칸 급행열차>에는 쓸쓸하게 그려진다. 그리하여 ‘삶은 우릴 때려눕히고 우린 다시 일어나는 거야. 그게 전부야.’(50쪽, ‘20분’)라는 통렬한 깨달음을 절감하게 해준다. 삶은 움푹 팬 자국들의 연속, 하지만 그 자국은 잊히고 우린 다시 살아간다고. 설터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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