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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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아직 낮은 좀 더운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꽤 서늘하다. 나쓰메 소세키를 꺼내 읽는다. <행인> 역시 염세적이다. 이 작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자아가 강한 인물이 등장한다. 책의 화자는 ‘지로’인데 주인공은 지로의 형 ‘이치로’가 아닐까 싶다.


‘이치로’는 세상과 거의 담쌓고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파고드는 학자다.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던 중 이치로는 자신의 아내와 동생 ‘지로’ 사이를 의심하게 되고 지로에게 아내를 유혹해보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아내의 정조를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 물론 지로는 이런 가당찮은 형의 제안에 화를 내지만 결국 형의 제안대로 형수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다.

형수인 ‘나오’와 ‘지로’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내인 ‘나오’가 ‘지로’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은 애당초 형인 ‘이치로’의 망상에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이 작품의 큰 줄기일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이치로의 비뚤어진 에고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라고나 할까.

‘이치로’를 보면서 짜증이 많이 치밀어 올랐다. ‘아, 이거 정말 미친놈이네.’ 이렇게 중얼거릴 정도였다. 그러다가도 참 이상한 게 이해가 가기도 하더라. 어떤 면에서는 슬쩍 내 모습이 지금 이렇지 않을까, 괜히 찔리기도 했다. 이치로는 세상 사람들이 다 우습다. 경멸스럽다. 아내도 가족도 하나같이 못 미덥고 못마땅하다. 가족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인간을 ‘경멸’한다. 그저 계속 자기 안으로 책 안으로만 파고들어간다. 이치로의 에고는 점점 과대하게 부풀어 오른다.

인간이 못마땅하고 못났다고 혀를 차지만 결국 그도 그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가 더 길을 잃어버린 모습이다. 책을 읽고 있는 제삼자의 눈에는 오히려 이치로 그가 더 흔히 말하는 인간의 궤도를 일탈한 듯 보인다. 타인과 절대 섞일 수 없는 고독한 에고이스트는 그 고독한 상태를 즐기는 듯하면서도 ‘무리’안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른다. ‘지로, 어떤 기교는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같아.’ (185쪽)라고 털어놓지만 그는 그 기교를 절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가장 가까워야 할 아내와도 거리감만 커지고 가족과도 마찬가지다. 행인(行人)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스쳐지나 걸을 뿐이다. 사람 안에 들어가는 방법도 알지 못하고, 안다 한들 그 사람이 또 경멸스러워 보여 피하고 만다. 어느 한 곳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려 다니기 바쁘다. “이렇게 수염을 기르고, 양복을 입고, 시가를 문 모습이 겉에서 보기엔 그럴듯한 한 사람의 신사 같겠지만, 실제로 내 마음은 집 없는 거지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이리저리 헤맨다네. 하루 종일 불안에 쫓겨 다니고 있지. …” (329쪽)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자기의 상태도 못마땅하고 이리저리 가볍게 움직이는 듯한 사람들의 마음도 못마땅하다. 그러다 보니 ‘아내의 마음’도 자신에게서 동생인 ‘지로’에게 ‘옮겨갔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경박한 마음이 너무나도 꼴보기 싫어진다. 게다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계속 ‘움직이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현대 문명도 못마땅하기 그지없다. 정신적으로 사색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 대상에 대해 알기도 전에 또 다른 새로운 대상이 쏟아져 나온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진정한 앎의 기회는 얻기 어렵고 피상적인 감상만 남을 뿐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든 것이 이치로에겐 불안할 뿐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계속 그를 고독하게 만든다.

나쓰메 소세키의 결혼 생활은 딱히 행복했던 것 같지 않은데 <행인>은 그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무척 많이 반영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이치로나 지로 두 형제의 결혼 관념은 무척 염세적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두 사람을 함께 묶어주고 그 두 사람이 서로 가장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소통’의 방법을 알지 못하면 전혀 다른 남남이 그저 ‘행인’처럼 서로의 곁을 스치며 더욱더 뼈저린 ‘고독’을 느끼게 되는 건 아닐지. 


“오사다 씨. 결혼 얘기로 낯을 붉힐 때가 여자의 꽃이야. 정작 해보면 결혼을 낯을 붉힐 만큼 기쁜 일도 아니요.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뿐만 아니라 결혼해서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면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의 품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엄청난 일을 당하는 수도 있어. 그저 조심하는 게 상책이야.” (187쪽)

하지만 어딜 보나, 꿀처럼 달콤하진 못했던 것 같다. 이 씁쓸한 경험을 지닌 고참 부부가 자신들의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운명의 몫을 젊은 남녀의 머리 위에 나누어주어 또다시 불행한 부부를 만들 작정인가. (255쪽)

“시집가기 전의 오사다 씨와 시집 간 뒤의 오사다 씨는 전혀 다르다네. 지금의 오사다 씨는 이미 남편 때문에 스포일spoil되고 말았다네.” ... “어떤 사람한테 가든, 시집을 가면 여자는 남편 때문에 부정을 타게 되지. 이렇게 말하는 내가 이미 내 아내를 얼마나 못쓰게 만들었는지 모른다네. 내가 못쓰게 만든 아내로부터 행복을 구하는 건 너무 억지가 아닌가. 행복은 결혼으로 천진함을 잃어버린 여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네.” (368~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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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3 2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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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3 17: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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