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내 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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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난 뒤 이 책을 다시,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운 좋게도 이 책이 나오고 얼마 뒤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이 영화를 몇 회 상영해주었기 때문이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놓친 영화들 가운데 꼭 스크린으로 만나보고 싶은, 아니 그래야만 하는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들은 몇 년이고 기다린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 영화는 스크린에서 못 만날 수도 있다. 그렇다 한들 어쩔 수 없다. 그게 그 영화와 나의 운명일 테니까.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도 그런 영화 중 하나였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작품. 영화 좀 본다 하는 사람이라면 익히 보고도 남았을 만한 고전 영화 중 하나.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이제까지 아끼고 아꼈다. 스크린에서 보게 될 날이 있을 거야! 그때까지 기다릴 거야! 하면서. 그리고 그 기다림은 마침내 찾아왔고,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원작 시나리오와 함께 영화가 동시에 2017년 여름에 내게 찾아왔다. 영화는 사실 8월 15일을 즈음해서 그럴 만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기에 특별전을 상영했을 것이다. ‘히로시마’니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먼저 읽었다. 아주 오래 전 뒤라스의 거의 자전적인 이야기 <연인>을 읽었을 때처럼 또 한 번 놀랐다. 뒤라스의 글쓰기 재능은 어디까지인가? 이 여자의 대범함, 이 여자의 솔직함, 이 여자의 상처를, 고통을, 그저 상처가 아닌 작품으로 승화하는 능력. 이 여자의 통찰력, 그리고 이 여자의 상상력. 여러 의미에서 놀랐다.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의 놀라움은 <연인>을 읽었을 때와는 또 조금 달랐다. 시나리오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히로시마, 전쟁, 원자폭탄 이야기를 이렇게도 전할 수 있구나. 아름다운데도 그 참혹함은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 힘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글로만 먼저 읽었을 때도 이 짧고 건조한 시나리오에서 통렬한 아픔을 느꼈다. <히로시마 내 사랑> 속의 ‘그녀’- 그녀의 이야기가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충격으로 전율하고 마음이 몹시 아파왔다. 그런 ‘그녀’가 이 세상에 어디 한두 명일까? 그러다가 ‘그녀’의 비밀, 베일이 완전히 벗겨지는 순간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건조한 문체와 뚝뚝 끊어지는 대화, 절대로 친절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 속에서도 읽는 이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히로시마의 그 유명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남자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그러자 그녀는 말한다. ‘난 전부 다 봤어요. 전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남자와 전부 다 봤다고 말하는 여자. 그런데 남자는 일본인이고 여자는 서양, 정확히는 프랑스 여인이다. 그녀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던 날, 히로시마는커녕, 일본에 있지 않았다. 남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일본인임에도 그 또한 히로시마를 직접 겪지는 않았다. 그때 그는 다른 곳, 그러니까 ‘전쟁터’에 나가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수년이 흐른 뒤에 히로시마에서 이렇게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육체- 건조한 육체는 서로 뒤엉켜있다. 뒤라스의 시나리오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한창 사랑을 나누는 중이거나 죽음에 가까운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몸, 처음에는 재 가루, 이슬, 원자폭탄으로 인한 죽음의 너울로 뒤덮였다가 그 다음에는 정사 후 땀으로 뒤덮인 몸이 보인다.’  뒤라스의 말대로 ‘지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인종적으로 등등 최대한 거리가 먼 두 사람에게 히로시마는 에로티시즘, 사랑, 불행의 보편적인 소재들이 가차 없는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공통의 장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윽고 여자의 입에서 히로시마 말고도 또 다른 도시의 이름이 등장한다. ‘느베르’- 프랑스 루아르 강 근처의 한 작은 마을. 그녀는 그곳 출신이다. 히로시마와 느베르. 일본 남자와 프랑스 여자. 그 둘이 만났다. 그래서?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한참 세월이 흐른 히로시마. 그녀는 평화를 기리는 영화를 찍기 위해 히로시마에 온 프랑스 여배우다. 그녀는 왜, 히로시마에, 히로시마라 부르는 그 남자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은 모두 그녀가 온 곳 ‘느베르’와 관련이 있다. 느베르와 히로시마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에게서 ‘느베르’를 읽지 못한다면, 읽어내지 못한다면 히로시마도, 그녀도, 그리고 느베르도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녀는 ‘느베르’에서의 기억 때문에 자신이 히로시마를 보지 못했어도 전/부 다 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그 남자를 히로시마라 부르며 짧은 순간이지만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뒤라스의 이 매혹적인 원작을 읽은 뒤 마침내 레네의 영화를 만났다. 뒤라스가 너무나 친절할 정도로 모든 장면과 인물 묘사까지 세세하게 그렸기에 레네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은 텍스트를 스크린에 매우 충실하게, 그러나 그 나름의 또 다른 독창성을 담아내어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원자폭탄과 전쟁의 폐허, 인간의 광기를 다루는 것 같으면서도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하는 듯하고, 짧지만 강렬한 어느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이야기하는 듯한, 이 강렬하고도 묘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이 빼어나게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그러나 또 다른 의미로는 그래서 아프고 고통스러운 <히로시마 내 사랑>은 뒤라스의 시나리오도 레네의 영화도 무엇이 더 좋고 덜 좋고를 논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히로시마 내 사랑>은 전쟁의 고통과 참혹함을 이야기한다고 상투적으로 말하지는 않겠다. 그토록 닳고 닳은 표현으로 이 작품을 말하기에는 뒤라스의 시나리오가, 그리고 레네의 영화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저 히로시마와 느베르, 그와 그녀, 또는 나와 당신의 일상이 전쟁으로 어떻게 일그러지고 또 그것이 제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이 지구의 수많은 그 또는 그녀들의 삶이 어떤 형태로든 이어져 하나의 버섯구름이 어떻게 개개의 인간에서 비구름이 되어 내리는지 조용히 전해줄 뿐이라고. 느베르가 히로시마를 불렀듯이 느베르가 히로시마를 기억하여 고통스러워하듯이, 그러나 망각 속으로 히로시마가 서서히 사라지듯이 인간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담담히 전해줄 뿐이라고.




그녀는 '느베르' 그는 '히로시마'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장면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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