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던 <이런 사랑>을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 들고 읽었을 때만 하더라도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작가라고만 생각했던 필립 베송. 그러다 <10월의 아이>를 도서관에서 발견하고는 ‘어, 필립 베송이네?’하고 자연스레 한 번 더 그의 작품을 읽었다. 그리고 <10월의 아이>를 읽은 이후로는 나도 모르게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 <포기의 순간>이다.
작품의
몇 페이지만 들춰 읽어 봐도 특유의 서걱서걱함이 여전히 느껴진다. 쓸쓸하고 체념적인 어조, 그러면서도 물기를 머금고 있는 듯한
묘한 문장.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라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포기의 순간>은 단번에 읽힌다. <이런 사랑>이나
<10월의 아이>에서처럼 과연 주인공(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한 ‘흥미진진함’도 한 몫 하지만, 뭐랄까 이
소설의 배경인 해안 마을 ‘팰머스’의 안개 자욱한 무거운 분위기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던 이유도 컸으리라.
이 책의
첫 시작은 ‘토머스 혹은 죄인’이라는 부제로 출발한다. 앞서 언급했듯 안개로 가득한 해안 마을 팰머스에 토머스라는 남자가
‘귀환’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토머스는 팰머스에서 태어나 어느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온 듯하다. 폐쇄적이고
암울한 느낌의 ‘팰머스’- 언젠가 이 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그는 이제 ‘죄인’으로 불린다. 과연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토머스의 독백을 통해 독자는 조금씩 그 비밀에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밝혀지는 그 비밀은 사뭇 충격적이다.
온라인
서점 등에는 이미 ‘스포일러’라고 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이 ‘충격적인 비밀’이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및 독자들의
리뷰에서 언급되고 있다. 만약 이 책을 읽어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비밀을 모르는 채 읽는 편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혹
‘스포일러’를 당했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약간의 재미가 반감될 수는 있겠지만 그 비밀의 사건이
토머스의 인생 및 이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전해주는 의미는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랑>과
<10월의 아이>에서도 삶의 경계선에 놓여있던 이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필립 베송은 <포기의 순간>에서는
아예 삶을 ‘포기’ 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토머스뿐만 아니라 그가 만나는 몇몇 인물들은 대부분 삶의 경계에 선 이들,
혹은 경계를 벗어나 버린 이들이다. ‘추방된 것이나 다름없는 자’ ‘이곳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비합법적인 자식들’, ‘무엇하나
빌려보기도 전에 빚을 진 자’ ‘ 영원한 채무자’들의 이야기를 쓸쓸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필립 베송이 이런
암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음에도 마지막 순간에 ‘쿵’하는 감동을 전해주는 이유는 아주 작은 ‘희망’일지라도 그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10월의 아이>에서도 절망스러운 순간을 ‘사랑’으로 극복했듯 <포기의 순간>에서 죄인으로
추방당한 토머스 셰퍼드에게도 ‘구원의 순간’은 찾아온다. 사람들이 숨 쉬고 살아가는 ‘이곳’에서는 여전히 용서받지 못할 ‘경계를
넘어버린 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만약 그들에게도 하나의 구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사랑’이라고 필립 베송은 조용히,
담백하게, 쓸쓸히, 그러나 아름답게 말한다. ‘사랑’ 때문에 지옥을 겪은 남자가 결국은 ‘사랑’ 때문에 구원받는 그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