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의 순간
필립 베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던 <이런 사랑>을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 들고 읽었을 때만 하더라도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작가라고만 생각했던 필립 베송. 그러다 <10월의 아이>를 도서관에서 발견하고는 ‘어, 필립 베송이네?’하고 자연스레 한 번 더 그의 작품을 읽었다. 그리고 <10월의 아이>를 읽은 이후로는 나도 모르게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 <포기의 순간>이다.

작품의 몇 페이지만 들춰 읽어 봐도 특유의 서걱서걱함이 여전히 느껴진다. 쓸쓸하고 체념적인 어조, 그러면서도 물기를 머금고 있는 듯한 묘한 문장.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라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포기의 순간>은 단번에 읽힌다. <이런 사랑>이나 <10월의 아이>에서처럼 과연 주인공(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한 ‘흥미진진함’도 한 몫 하지만, 뭐랄까 이 소설의 배경인 해안 마을 ‘팰머스’의 안개 자욱한 무거운 분위기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던 이유도 컸으리라.

이 책의 첫 시작은 ‘토머스 혹은 죄인’이라는 부제로 출발한다. 앞서 언급했듯 안개로 가득한 해안 마을 팰머스에 토머스라는 남자가 ‘귀환’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토머스는 팰머스에서 태어나 어느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온 듯하다. 폐쇄적이고 암울한 느낌의 ‘팰머스’- 언젠가 이 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그는 이제 ‘죄인’으로 불린다. 과연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토머스의 독백을 통해 독자는 조금씩 그 비밀에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밝혀지는 그 비밀은 사뭇 충격적이다.

온라인 서점 등에는 이미 ‘스포일러’라고 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이 ‘충격적인 비밀’이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및 독자들의 리뷰에서 언급되고 있다. 만약 이 책을 읽어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비밀을 모르는 채 읽는 편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혹 ‘스포일러’를 당했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약간의 재미가 반감될 수는 있겠지만 그 비밀의 사건이 토머스의 인생 및 이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전해주는 의미는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랑>과 <10월의 아이>에서도 삶의 경계선에 놓여있던 이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필립 베송은 <포기의 순간>에서는 아예 삶을 ‘포기’ 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토머스뿐만 아니라 그가 만나는 몇몇 인물들은 대부분 삶의 경계에 선 이들, 혹은 경계를 벗어나 버린 이들이다. ‘추방된 것이나 다름없는 자’ ‘이곳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비합법적인 자식들’, ‘무엇하나 빌려보기도 전에 빚을 진 자’ ‘ 영원한 채무자’들의 이야기를 쓸쓸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필립 베송이 이런 암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음에도 마지막 순간에 ‘쿵’하는 감동을 전해주는 이유는 아주 작은 ‘희망’일지라도 그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10월의 아이>에서도 절망스러운 순간을 ‘사랑’으로 극복했듯 <포기의 순간>에서 죄인으로 추방당한 토머스 셰퍼드에게도 ‘구원의 순간’은 찾아온다. 사람들이 숨 쉬고 살아가는 ‘이곳’에서는 여전히 용서받지 못할 ‘경계를 넘어버린 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만약 그들에게도 하나의 구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사랑’이라고 필립 베송은 조용히, 담백하게, 쓸쓸히, 그러나 아름답게 말한다. ‘사랑’ 때문에 지옥을 겪은 남자가 결국은 ‘사랑’ 때문에 구원받는 그런 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