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어릴 때 나는 어른들이 쉽게 체념하는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분명, 바꿀 수 있어 보이는데도 어른들은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고는 했다. 내가 어른이 되고, 아니 지금 이 나이에 이르고 보니, 그 체념, 그 포기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어젯밤만 하더라도 나는 오늘 아침엔 이재용 구속이라는, 도저히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헤드라인을 드디어 보게 되겠거니 하고 잠들었다. 꿈을 잘 꾸지 않는 내가 어젯밤에는 가방을 잃어버려서 계속 어딘가를 헤매다 깨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포털사이트에 접속한 나는 극심한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서 한 10분인가 망연자실 누워만 있었다. 꿈속에서 잃어버린 가방이 자꾸만 떠올랐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구치소를 나오며 지은 그의 희미한 미소에서 나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낀다. 성 앞에 선 K처럼 무기력할 뿐이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눈물이 나기도 한다. 너무나 분하고, 절망스러워서. 촛불 시위를 또 나가면 무엇하나 싶기도 하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데.... 다시 그냥 책이나 읽고 음악이나 듣고 영화나 보면서 세상과 나를 격리해야겠다 싶어진다...... 그러다가도 이런 나를 추스려야지, 싶어진다. 그럴 때 떠오른 한 사람 하워드 진. 그를 읽으면 이 절망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으려나.


그의 책을 다시 들춰본다. 이 책의 원제는 “Conversations on History and Politics”로 하워드 진이 미국, 캐나다, 유럽, 남아프리카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어권에 공동으로 방송되는 얼터너티브 라디오의 창립자 겸 진행자인 데이비드 버사미언과 인터뷰한 내용들을 수록했다. 내용은 ‘자본주의의 위기는 구조적인 위기다 / 지배계급의 논리에 저항해야한다 / 문화 지도자들은 대중을 이끌 수 있다 /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 / 예술가들은 사회적 변화를 위한 역할이 있다 / 비판적 사고와 의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 역사는 기억되어야 한다 / 국경 없는 세계를 위하여’ 등으로 역사, 정치, 사회에 관한 하워드 진의 철학과 신념을 만나보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 진행자인 데이비드 버사이먼은 저널리스트이자 인터뷰의 대가로 알려졌는데, 그가 하워드 진에게 던지는 질문을 보면 ‘인터뷰의 대가’라는 명성을 괜히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질문의 내용은 물론 질문을 던지는 방식 등이 무척 날카롭고 인터뷰이 못지않게 해박한 지식을 겸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아있는 미국역사>나 <미국 민중사>와 같은 책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는다면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듯하다. 하워드 진은 미국에서도 학계의 이단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미국 정부 및 지배계급에 거침없는 비판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단순히 말로만 쓴소리를 내뱉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 흑인(유색인), 노동자, 노숙자, 여성, 억압받는 자들 등 항상 약자 편에서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살아왔다. 그런 그의 삶의 기록이 이 책에서는 여과 없이 드러나 책을 읽다가 울컥하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원제와는 조금 다른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라는 한국어판 제목이 그리 생뚱맞지 않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하워드 진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인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은 역사상 유례없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진 오늘날 미국 사회의 갖가지 병폐를 꼬집으며 전쟁광 부시 정부와 그들과 함께 결탁한 자본가, 민주당 공화당 양당 정치가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물론 아울러 이러한 지배계급에 맞서기 위해 민중은 계속 깨어 있기를 촉구한다.


예를 들어, 지배계급의 논리에 저항할 것, 잘못된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서 그와 같은 실수를 절대 되풀이하지 않도록 할 것(역사를 잊기를 바라는 것은 언제나 지배계급이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도 금세 쉽게 잊는다), 예술가와 문화지도자들의 역할이 민중에게 일깨우는 힘은 그 어떤 힘보다 막강하다. 때문에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비판적 사고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텔레비전은 몇몇 좋은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멍청하게 받아들이기에 무척 좋은 도구라고 하워드 진은 지적한다) 등등.


마지막에 수록된 ‘실망을 이겨내고’라는 하워드 진의 스펠먼 대학 졸업 축사는(그는 1956년 애틀랜타에 있는 흑인 여자 대학 스펠먼 대학에서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1963년 ‘불복종’을 이유로 해고 당한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고, 보수적인 학교 운영에 반발한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5년 하워드 진은 스펠먼 대학으로 돌아가 명예학위를 받았고 졸업식 축사를 했다) 이 책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절망적인 현실에 놓여 있는 지금, 절대로 실망하지 말 것을 하워드 진은 당부한다. 역사는 그러한 때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민중의 뜨거운 움직임에 의해 언제나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여 왔음을 지적하면서.


“물론 여러분이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일자리를 구하고 결혼을 해서 자식도 낳아야겠지요. 부자가 되어 우리 사회가 성공이라 규정하는 ‘성공’을 거두기도 할 겁니다. 재산을 모으고 사회적 지위와 권위도 쌓아갈 겁니다. 하지만 ‘좋은 삶(Good Life)’은 그런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무슨 일은 하던, 교사가 되던, 사회 운동가가 되던, 사업가, 변호사, 시인, 과학자 등 무엇이 되던, 여러분의 자식, 아니 모든 아이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여러분의 삶을 조금이라도 투자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세대는 전쟁 종식을 강력히 요구하고, 여러분의 세대는 역사에서 아직 이뤄내지 못한 일을 해내고,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 짓는 국경을 지워버리길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회에서 성공이라고 평가하는 그 성공에 안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당한 규칙에까지 순종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감춰진 용기를 마음껏 끌어내서 행동하길 바랍니다. 흑백을 넘어서 우리가 귀감으로 삼을 사람은 많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콜린 파월, 클라렌스 토마스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귀감으로 삼지는 마십시오. 그들은 권력자와 부자의 하수인이 됐을 뿐입니다. W.E.B 듀보이스, 마틴 루서 킹, 맬컴 엑스, 매리언 라이트 에델먼, 제임스 볼드윈, 조세핀 베이커 그리고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지배집단에 도전한 훌륭한 백인을 귀감으로 삼으십시오.”


미국 국부의 상당한 부분이 군사비에 지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모두가 안보라는 이름하에 자행되는 짓이지요. 하지만 일상적인 삶에서 국민의 안전은 도외시됩니다. 국민이 노동을 중단하고 싶은 연령에 이르렀을 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안보입니다. 모든 국민이 비용을 걱정하지 않으면서 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안보입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을 때 언제라도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안보입니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구조적인 위기다’ p.14)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 가운데는 공직에 나선 적이 없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연히 그랬어야 합니다. 일단 공직에 나서면 역사적으로 덜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물론 지배계급의 눈에는 의사결정권을 갖는다는 점에서 더 중요한 인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회적 변화를 유도하는 변수로서는 덜 중요해집니다. 왜냐고요? 공적에 취임하는 순간부터 부와 권력에서 비롯되는 모든 수단에 길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문화 지도자들은 대중을 이끌 수 있다’ p.61)

대니 셰터라는 독불장군 같은 방송인이 쓴 <오랫동안 볼수록 아는 건 줄어든다 The More You Watch, The Less You Know>라는 책이었을 겁니다. 맞습니다. 정확한 지적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미국인이 텔레비전에서 정보를 얻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기업과 정부의 시녀에 가깝습니다.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 p.90)

권력을 쥔 사람들 우리가 모든 걸 잊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지 못해야 우리가 어제 태어난 사람처럼 기업의 지배 하에 있는 언론이나 정부가 우리에게 하는 말을 점검할 방법이 없을 테니까요. 기억, 즉 역사는 과거의 거짓말과 속임수를 적발하는 수단이며, 겉으로는 무력해 보이는 국민이 권력을 쥔 지배계급을 무찌를 수 있는 무기입니다. (‘역사는 기억되어야 한다.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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