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클레르 카스티용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끊임없이 사랑을 하고 싶어 한다. 인생에 사랑이 없으면 큰일이나 나는 듯하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그 관계로 인해 성가신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 딱히 눈에 드러나는 일이 아니더라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이런 상태가 오래되어 ‘감정 소모’에 진이 빠지게 되면 사랑의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자기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만약 그곳에서 빠져나온다면? 잠시 혼자 있을 수는 있지만 묘하게도 또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사랑은 이타적인가? 사랑은 관대한가? 사랑은 한없이 너그럽고 따뜻한 성질의 것인가? 사랑의 모습은 아름답게 포장되어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지지만 어쩌면 사랑이란 애초에 그런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기에 반대로 그렇게 꾸며대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기적이다. 이타적인 사랑의 표본처럼 생각하는 부모의 사랑도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자식이 이렇게 해주길 바라고, 자신의 기대에 차길 바라고, 노후의 보험처럼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도 많다. 나는, 내 부모는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 참 순진하군요.’ 말해주고 싶다.

영화나 소설, 드라마 등에서 순수한 사랑의 전형처럼 그려지는 짝사랑도 그렇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기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럴까? 짝사랑은 이미 대상을 욕망하면서 발생한다. 욕망은 이기적이다. ‘그저 바라만 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라보는 순간,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순간, 그 사람이 나에게로 와서 내 것이 되어주길 고대한다. 내 사랑의 부름에, 내 마음의 욕망에 그 또는 그녀가 화답해 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고백하지 않고 혼자 좋아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렇다. 그 사람의 작은 친절에 감동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을 보통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대하는 걸 발견하는 순간 짝사랑하는 이의 마음에는 파문이 인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내가 너에게 관심을 가진 만큼 너는 그렇게 하지 못했음에 화가 난다. 단지 그걸 표현할 수 없을 뿐이다. 이런데도 짝사랑은 이타적이며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연인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 그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수많은 연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문제는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상대의 마음이 내 마음의 크기와 똑같지 않아서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들. 내 마음은 작은데 상대방의 마음은 너무 커서 부담스럽다거나 그와 반대로 내 마음은 여전히 뜨거운데 상대방의 마음은 이미 다른 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거나, 애당초 크기가 작았는데 마지못해 관계를 시작했다거나 등등. 사람은 내가 준 것만큼 내가 준 크기만큼 받고 싶어 한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동안은 너도 나를 꼭 사랑해야 해.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종용하는 약속들.

사랑은 원래 그렇지 않은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기적이라 사랑이 그렇게 변했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인간의 마음이 매혹에 이끌려 움직이는 상태라고 본다면 결국 사랑이란 사람 마음속에 존재할 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으므로 사랑을 사람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젊은 작가 클레르 카스티용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에는 이런 이기적인 사랑이 23편의 단편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클레르 카스티용의 단편 속에 드러나는 사랑은 뻔뻔하고 치졸하고 이기적이다 못해 사악하고 비열하다. 사랑이 이런 것이라면 사람들은 대체 왜 사랑을 하려고 안달일까? 싶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사랑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엄마를 속이고 펼쳐지는 아버지와 딸의 사랑, 아들과 섹스 하는 엄마 등 근친상간은 아무 일도 아니며 행복한 부부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바람난 남편, 바람난 부인, 남편을 갖다 버리고 싶어서 안달 난 여자, 부인에게 툭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 형제의 치부와 상처를 이용하는 가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모든 관계의 삐걱거림이 ‘이제 그만!’하고 외치고 싶어질 정도로 펼쳐진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를 실물로 보면 알 수 있듯 책의 두께는 무척 얇다. 200페이지 남짓한 크기. 그런데 담겨 있는 이야기는 23편이다. 그만큼 짧고 간결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서걱서걱하는 감정이 묻어나오는 느낌이다. 이런 불편한 사랑이야기를 쓰면서 이렇게 담담하게 쓸 수도 있구나 싶어진다. 아멜리 노통브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노통브의 작품을 읽으면 느껴지는 기분처럼 클레르 카스티용 또한 인간에 대한 모든 ‘선한’ 기대는 포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작가들은 어떤 경험을 했기에 이런 작품을 쓰는 걸까 사생활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궁금해서 찾아봤다. 아름답고 고혹적인 외모와는 달리 가치 전복적이며 도발적인 작품을 쓰기 때문에 ‘천사의 얼굴로 악마의 글을 쓰는 작가’라는 호칭이 있다고 하니, 노통브와는 달리 외모가 좀 특출(?)난 듯하다. 1975년 프랑스 불로뉴 비앙쿠르 생. 열여덟 살 때 광장공포증에 걸려 길고 지난한 정신과치료를 받던 중, 스물다섯에 첫 소설 <다락방>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음. 그 후 거의 매해 한 편씩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고. 노통브처럼 소설은 엄청나게 써대고 있는가 보다. ‘광장공포증’에 걸려 정신과 치료 받았다는 사실에 살짝 호감 증가. 그러나 사진을 찾아보니 ‘천사의 얼굴’이라고 말하기는 좀 무리인 듯 싶었다.


작가에 대한 관심은 이쯤에서 접었고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극악무도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서도 책의 제목이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라니 이럴 수가 있나? 뭔가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려니 하고 낚이는 사람들이 있을 듯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다. 사랑을 하면 발생하는 감정소모를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왜? 외로우니까. 외롭기 때문에 사랑을 시작한다는 자체가 사랑의 이기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클레르 카스티용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에서 그런 인간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정말로 백치처럼 구는 날이면 나는 그에게 묻는다. 아무 문제없냐고, 정말 괜찮으냐고. 그러면 그는 ‘괜춘해’라고 대답한다. 나는 그에게 비타민을 먹여보려고도 했다. 그의 사고 체계가 약간이나마 활성화되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는 인상을 쓰며 완강하게 도리질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대신 먹고 있다. 나는 내 지적 수준을 유지하고 싶다. 하지만 요구르트를 별로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스물네 개짜리 묶음보다 두 개짜리 묶음을 구입하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흥분해 날뛰는 남자와 같이 살면서 높은 지적 수준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로 하여금 뭔가에, 가령 음악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노력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고전음악은 그에게 수면제나 다름없다. 게다가 서정적인 것들은 괜히 사람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다며 그는 투덜댄다. (‘한없는 관용’ p.47~48)


위 구절을 읽는데 정말 너무 너무 웃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