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 손창섭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2
손창섭 지음, 조현일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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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의 절정. 이보다 더 우울할 수는 없다. 읽으면 한없이 우울해지는 작가들이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그런 작가는 있으리라.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레이먼드 카버? 얼핏 이런 이름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손창섭보다 더하지는 못하리라.

문득 손창섭의 작품이 무척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서점에서 주문해서 부랴부랴 읽기 시작했는데,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많이 읽으면 하루 세 편? 손창섭의 작품은 그게 한계다. 하루 두 편 혹은 세 편 정도. 그 이상 읽으면 하루 허용할 수 있는 우울의 양을 넘어서기 때문에 쉽게 극복할 수가 없다. 막판에는 남은 걸 다 읽을 셈으로 네 편을 몰아 읽었더니, 책을 덮고 나서 울렁거리는 울렁증 때문에 한동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더라. 가람기획에서 <손창섭 단편 전집 1, 2>권이 나와 있던데 이걸 또 읽어볼까 싶었지만 한동안은 못 읽을 듯하다.

손창섭을 처음 알게 된 건 열여덟, 열아홉 그즈음이었다. 수능 언어영역 지문이었나, 아니면 문학시간이었나. 문제풀이를 하던 중 문제지 지문에서 그의 작품 <비 오는 날>을 처음 읽었다. 전문은 아니었지만 꽤 긴 내용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지문을 읽는 동안 이미 문제 풀 생각은 사라졌다. 이런 작품이 다 있나 싶었다. 전문을 찾아 읽었는데, 한동안 그 작품이 주는 짙은 우울의 정서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비 오는 날>과 함께 잘 알려진 또 다른 작품 <잉여인간>도 찾아 읽었다. 이 작품은 <비 오는 날>처럼 심하진 않지만 역시 읽고 나니 엄청난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대학에 와서 손창섭 작품을 더 찾아 읽었다. 손. 창. 섭. 그의 이름 석 자를 마음에 새겼다. 마음에 들었다. 내가 만약 ‘언젠가 소설을 쓴다면, 단편을 쓴다면…. 이런 작품을 써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비 오는 날>은 그 분위기 하나만으로도 잊기 힘든 작품이다. 그의 문장은 사실 거칠고 투박하다. 별다른 꾸밈도 없다. 북한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문장을 음미하면서 읽는 소설가류는 아니다. 어쩌면 손창섭과 ‘꾸밈’이라는 말은 극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심하게 빠질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다.

불구자 문학이라고 해야 하나. 그의 작품에는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아, <잉여인간>의 ‘서만기’ 그 정도만 제대로 살고 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작품에서조차 만기를 둘러싼 다른 인물들은 하나같이 병신스럽다. 몸도 불구인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같이 마음이 병든 자들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사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고, 죽을 용기도 없어 근근이 살아간다. 삶은 즐겁기보다 고통 그 자체다. 왜 태어났는지 이유도 모르겠고,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는 더더욱 모르겠다. 좀비들 마냥 먹고 싸고, 자고, 흐리멍덩한 눈을 치켜뜨고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생을 향락하다니? 생의 어느 구석에 조금이라도 향락할 수 있는 대견한 요소가 있단 말인가? (‘사연기’, 28쪽)

살아 있다는 것은 동주에게 있어서 그냥 견딜 수 없이 뻐근한 상태일 뿐이었다. 무엇이든- 하다못해 공기나마 담고 있어야하는 항아리처럼, 그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희망을-아니면 절망이나 공허라도 채워져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생활적’, 77쪽)

무덤 속에 들어가면 이렇게 흙으로 덮어 주리라 느껴지듯, 산다는 것의 무의미와 우울이 꽝꽝 소리를 내어 다지는 것처럼 전신을 내리누르는 것이다. 동주는 사뭇 안간힘을 하다시피 무엇을 참고 견뎌내는 것이었다. (‘생활적’, 91~92쪽)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의 커다란 과오 같이만 해석되는 것이었다. 그처럼 인간 행세에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는 그는, 누구 앞에서나 실없이 불안하고 비굴할밖에 없었다. (‘피해자’, 143쪽)

인간의 일이 어찌 저렇게 값싼 눈물로 해결될 수 있단 말이냐.  (‘미해결의 장’, 178쪽)


그러면서 성(性)에 대한 욕구는 다들 또 충실하다. 그야말로 동물스럽다. 불륜도 상관없고, 이성이든 동성이든 성의 구분도 상관없다. 거기엔 어떤 도덕적인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냥 식욕처럼 자연스럽고 어떻게 보면 그래서 꼭 해결해야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손창섭 작품의 인물을 보면 인간이 아니라 동물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러다 문득 생각해 보면, 인간이 동물과 다를 바가 뭐가 있나 싶기도 하다.

손창섭 작품의 이런 극단적 우울, 불구적인 인물들, 삶에 대한 환멸스러운 태도 등을 논할 때 꼭 그래서 6.25 전쟁과 연관 지어 해석하려 한다. 하지만 오히려 손창섭 개인의 삶에서 찾는 게 더 옳지 않나 싶다. 거의 자전적인 소설인 ‘신의 희작’을 보면 이 사람의 삶 자체가 이런 문학을 쓸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손창섭은 그 자신을 '부모도 형제도 고향도 집도 나라도 돈도 생일도 없는, 완전한 영양실조에 걸린 육신과 정신이 피폐한 고아였던' 사람이라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던 자, 그래서 잃을 것도 없고, 때문에 무서운 것도 없는 삶. 스스로를 병신, 불구라고 부르던 사람. 희망은커녕 절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던 삶. 쓸 수밖에 없어서 썼는데 유명해졌고, 그 유명세가 싫어 홀연 사라져 버린 사람. 대중에게서 자신이 잊히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던 사람. 그 처절한 생의 기록이 그의 단편에 녹아있다. 때문에 삶은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거나, 혹은 인생이란 행복한 것이라고 공허하게 외치는, 근거 없는 희망을 역설하는 말캉말캉한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의 진실이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전해진다. 이 기묘한 지구에 하필이면 인간으로 태어나 이렇게 힘들게 한 생을 보내야 한다니, 참으로 안됐구나. 하는 쓸쓸한 시선에서 비참한 감동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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