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자유다 - 수전 손택의 작가적 양심을 담은 유고 평론집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수전 손택은 크게 세 가지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심미안을 가진 예술 비평가로, 열렬한 투사로 그리고 작가로. 분류하기 애매한 책들도 있지만 굳이 나누자면 <해석에 반대한다>, <강조해야 할 것>,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우울한 열정> 같은 책에서는 그 누구보다 뜨겁게 예술을 사랑했던 비평가로서의 수전 손택을 만날 수 있으며 <타인의 고통>, <사진에 관하여>, <은유로서의 질병>과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의 제3장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하노이 여행’ 등에서는 다양한 목소리를 억압하는 사회, 집단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폭압에 저항하는 투사로서의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화산의 여인>,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인 아메리카>에서는 스스로 그 어떤 이름보다 ‘작가’로 불리기 원했던 수전 손택의 문학적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문학은 자유다 : At the Same Time (2007)>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굳이 나누자면 어떤 분류에 들어갈 것인가?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에서 유추하기로 문학가로서의 수전 손택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은 그 어떤 분류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모든 분류를 포함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1장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비평가로서의 손택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으며 2장 ‘미국의 야만성’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9.11테러 이후 미국 사회의 파시즘적인 행태(특히 부시행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쓴 소리가 펼쳐지고 있어 ‘투사’로서의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마지막 3장 ‘투쟁하는 독자’는 그녀가 쓴 소설이나 희곡이 실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사회에서 작가의 의무, 작가란 어떤 위치인가, 번역의 의미(와 중요성) 등 문학 전반에 관한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책의 성격상 수전 손택을 처음 만나는 사람이거나, 그녀에 대해서 깊이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적합한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나는 이 책을 2장, 3장 그리고 1장 순으로 읽었는데, 이렇게 장의 순서를 바꿔 읽어도 전혀 상관이 없을 정도로 각 장은 개별적이다. 그렇다면 전혀 상관없는 에세이들을 엮어놓은 산만한 책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러나 각 장을 다 읽고 책을 덮을 때 즈음 머리 속에 그려지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자기 부족에서 떨어져 나오기, 자기 집단에서 나와 정신적으로는 더 넓지만 수적으로는 더 작은 세계에 들어가기. 고립이나 반체제에 익숙하고 편안한 사람’ (p.242 ‘용기와 저항’)으로서의 수전 손택의 모습. ‘저항해 보았자 부당함을 막을 수 없다고 해서, 진심으로 깊이 숙고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행동하는 걸 포기’(p.252 ‘용기와 저항’)하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이다.

'문학, 세계문학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국가적 허영, 속물주의, 강압적 지역주의, 알맹이 없는 교육, 결함 있는 운명과 불운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길이었습니다. 문학은 더 큰 삶, 다시 말해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게 해 주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독서와 내성內省의 가치가 끈질기게 위협 받는 요즈음, 더더욱 문학은 자유입니다.' (p.274 ‘문학은 자유다’)라고 그녀가 말했듯 손택에게 문학은 이 세상의 진실을 향해서 거침없이 나아가도록 이끌어준 세계였고, 문학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1장의 ‘소멸되지 않음’에서 그녀가 찬미한 ‘빅토르 세르주’의 삶에서 수전 손택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오버랩 된다. 자기 자신은 작가로 불리기를 원했지만 작가보다는 거대한 헤게모니와 맞서 평생을 싸운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더욱 확고했던 것까지. 빅토르 세르주의 삶과 묘하게도 닮았다.

베스트셀러를 내놓고 싶고, 문학계의 한 판을 차지하고 싶고, ‘작가’라는 타이틀로 거드름을 피우며 사회의 지식인 노릇을 하고자 하는(혹은 하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들에게도 수전 손택의 문학에 대한 생각과 그녀가 찬미한 세르주의 삶은 ‘작가’란 과연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따라서 문학은(여기서 저는 단순히 그렇다고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자의식이고, 회의고, 양심의 거리낌이고, 깐깐함입니다. 또한(이번에도 역시 그럴 뿐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래고, 자발성이고, 찬미고, 환희입니다. (p.203 ‘말의 양심’)


양심이나 이해관계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자발적으로 나서고 논쟁에 뛰어들거나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의견(도덕주의적인 문구)을 내놓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거기 가 본 적도 그런 일을 한 적도 없으면서 이건 지지하고 이건 반대한다는 식으로. 작가는 의견을 내놓는 기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시를 쓰지 않는다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비난을 받던 미국의 흑인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지요. ‘작가는 주크박스가 아닙니다.’ (p.206 ‘말의 양심’)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행동을 스스로 기록하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적어도’ 혹은 ‘특히’ 미국에서는 실제 사건을 실시간으로 찍는다는 앤디 워홀의 이상이(삶은 편집되지 않는데 왜 삶의 기록은 편집되어야 하는가?) 인터넷 중계에서 당연한 기준처럼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일상을 기록하여 저마다 리얼리티 쇼를 방송한다. (p.183 ‘타인의 고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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