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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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시리도록 춥다. 이런 겨울에 읽기에 딱 알맞은 책 한 권이 있다. 바로 이디스 워튼의 <겨울>. 원제는 <Ethan Frome>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다. 문학동네에서는 제목을 <겨울>이라고 명명했다. 문학동네 이전에는 문예출판사에서 <이선 프롬>으로, 열린책들에서 <그 겨울의 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적이 있다.


처음 책을 읽기 전에는 <이선 프롬>이라는 원제와 <겨울>이라는 제목 사이에 너무 큰 괴리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책을 읽고 나니 <겨울>이라는 제목이 꽤 그럴 듯하다. 더욱이 문학동네에서는 이 책과 함께 이디스 워튼의 <여름>도 함께 출간했었다. <여름>은 <겨울>과 달리 ‘생의 열기로 뜨거웠던 한여름 소나기 같은 사랑’ ‘젊은 여성의 성장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자면 워튼의 이 작품은 <여름>과 대비되는 주제와 내용을 다뤘다는 의미로 <겨울>이라 번역한 것도 꽤 괜찮은 느낌이다.

이 작품에는 평생 ‘겨울’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겨울과 같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 혹독한 추위와 함께 모든 것이 얼어붙어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겨울. 그런 겨울이 지나면 꽃이 만개하는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하지만 봄도 없고 끝없이 겨울만 이어진다면? 주인공 이선 프롬이 바로 그런 남자다. 그의 인생에서 봄이 존재했던 적이 있는가? 아, 그래 그에게도 봄이 잠시 찾아왔다고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봄은 끝내 그와 함께 겨울에 머물고 만다.

<겨울>은 무척이나 차갑고 슬프다. 아무도 없는 눈 덮인 설원 위를 혼자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액자 소설 구조를 띄고 있어서 슬픔이 조금 미약해지는 느낌인데 만약 액자 소설 구조를 탈피했다면 이 작품의 우울한 정서, 슬픔은 정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듯하다. 책의 뒤표지에 “<겨울>이 뿜어내는 암울한 심리를 좋아했다. 이렇게 좋은 작품은 마음속으로 혼자만 즐겨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 톄닝 (소설가)”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던데, 정말 그렇다. 이 작품은 더없이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이선 프롬은 19세기 미국 뉴잉글랜드의 작은 마을, 항상 겨울만 존재하는 듯한 마을 스탁필드에 사는 남자다. 그에게도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고 그 꿈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모가 아프고 그 부모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부모가 죽은 뒤에 꿈을 찾아 나섰으면 되는데 인생은 또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모를 돌봐주던 한 여인에게 청혼을 하고 그 여인과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 마을의 기운 탓일까, 이 마을은 유난히 병든 사람들이 많고 이선이 결혼한 여인도 결혼 전에는 그렇게 생명력을 뿜더니 결혼 후에는 그녀 역시 병들고 만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한줄기 희망 같은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매티- 아내의 먼 친척이다. 병든 아내를 돌보기 위해 매티는 이선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게 된다.

이쯤하면 병든 아내를 사이에 두고 매티와 이선의 그렇고 그런 불륜(?)이 그려지려니 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매티를 향한 이선의 가슴앓이, 혼자만 앓는 질투와 사랑, 기대, 아내에 대한 책임감과 죄의식….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자신에게 기대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배반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처음에는 병든 아내를 곁에 두고 다른 여인을 욕망하는 이선의 행동에 화가 났는데 점점 매티를 향한 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 사랑을 응원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최고 절정 부분에 이르러서는 그의 간절한 희망이 부서지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나 어쩐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그 가련한 꿈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책을 덮고도 한 동안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겨울 공기는 찬 만큼이나 투명하고 가슴 시리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차갑지만 오염되지 않은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찌른다. 이선의 사랑이 딱 그랬다. 원문으로 읽으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싶어진다. 비록 번역서로 읽었지만 이디스 워튼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섬세한 심리 묘사, 눈에 잡힐 듯한 아름다운 배경 묘사, 녹록치 않은 주제의식까지….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이디스 워튼의 열렬한 팬이 될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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