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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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는 조금 뒤늦은 감이 있지만, 예전부터 읽어보리라 생각했던 책을 올해 첫 책으로 읽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파계>는 새해 첫 책으로 읽기에 참 괜찮았던 작품이었다. 찾아보니 나쓰메 소세키가 극찬한 작품이라고 하던데, 꼭 그래서만은 아니라 꼭 한 번은 읽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절대로 네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숨겨라’ 주인공 우시마쓰에게 내려진 아버지의 계율이다. 아버지는 우시마쓰에게 ‘절대로 네 신분을 밝히지 마라. 밝히는 순간 사회로부터, 너는 영원히 밀려나게 된다.’ 한다. 우시마쓰의 아버지는 백정 출신. 그러니까 그의 집안은 대대로 백정 집안이다. 에도 시대 때부터 백정은 최하층 천민으로 여겨지며 특별지역에 거주하면서 부랑자나 거지보다 더 하등한 인종 취급을 받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분제 폐지로 그들은 ‘신평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적 시선은 차디차다. 가혹할 정도다.

그렇게 살던 고향을 떠나 철저히 신분을 숨긴 채 어느 시골 학교의 교사가 된 우시마쓰. 그가 어느 날 목격한 장면은 백정 출신으로 밝혀져 여관에서 쫓겨나는 한 남자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거침없는 조롱은 물론, 욕설을 내뱉고, 그가 떠난 뒤 소금까지 뿌려댄다. 끔찍하다. 가혹하다. 그는 그런 장면을 본 뒤 더욱 움츠러들 수 밖에 없다. ‘숨겨라’-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윙윙거린다.

그런 그에게도 숨길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이노코 렌타로’- 자신이 백정 출신임을 당당히 밝히고도 무시할 수 없는 지식인, 사상가의 반열에 오른 그. 우시마쓰는 위험을 무릅쓰고(그의 책을 읽음으로써 누군가 자신을 백정 출신으로 의심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 그의 저작이라면 빠짐없이 찾아 읽고, 그를 숭배한다. 우시마쓰에게 렌타로는 어쩌면 정신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렌타로는 자신의 정체를 떳떳이 밝히고는 자유롭게, 당당히 사회의 차별이나 냉대에 맞서며 살아간다. 렌타로를 존경하는 마음이 커갈수록 우시마쓰의 갈등과 번뇌는 깊어만 간다. 숨겨야 하는 삶, 그렇기에 두려움과 공포로 점철된 삶. 자신과 같은 백정 출신이기에 렌타로에게만은 자기 정체를 밝혀볼까 고민하지만 번번히 망설이다 끝나고 만다.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는 이렇게 자기의 정체성(신분)을 숨기고 살아가야만 하는 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을 담백하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린다. 육체적 아버지의 ‘계율’과 정신적 아버지가 보여주는 당당한 삶의 모습에서 그가 진실된 자기 삶,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어찌보면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한가지쯤 타인에게 절대로 밝히고 싶지 않은 작은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밝혀지면 사회적으로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맛보며 나락으로 떨어지고야 말 그런 비밀 하나쯤. 우시마쓰에겐 그것이 바로 ‘신분’이었다. 아무리 신분제가 폐지되었다지만, 여전히 사회 최하층 출신이자 상종 못할 인종 취급을 받는 백정.

<파계>가 흥미로운 점은 그의 정체성이 ‘백정 출신’이라는 신분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예를 들면 ‘게이’라는 성적 취향을 숨기고 사는 어떤 한 개인의 이야기로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커밍아웃하지 못해서 언젠가 타인에 의해 자기 정체가 탄로날까 봐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사는 삶, 잠 못 이루는 삶. 그런 벽장 속에 갇힌 어느 게이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의 정신적 지주인 ‘렌타로’에게만은 커밍아웃하고 싶으나 그마저 번번히 실패하고야 마는 소심하고 약하디 약한 어느 가엾은 인간.

마침내 그는 어떤 일을 계기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야 만다. ‘파계’- 육체적 아버지의 ‘계율’을 깨드린 것이다. 진실을 밝힘으로써 거짓된 삶을 버리고 참된 삶으로 나아가고자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그가 가르치던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진실을 밝히는 순간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를 아끼던 이들이 여전히 변함 없을 때, 그 또한 훈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시마쓰 또한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색안경 끼고 바라본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어렵지만 어느 순간 진실을 따름으로써, 조금 더 스스로 강해지는 때가 오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 앞에서 그를 둘러싼 이들이 진짜 ‘그’의 사람이라면 변함없이 그를 지지하고 믿어주리라는 것을 <파계>는 담담하지만 묵직하게, 감동적으로 그린다.

어떤 이유로든 온전한 자신을(또는 자신의 비밀을) 감추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수많은 ‘우시마쓰 ‘들에게 한 번쯤은 자기를 믿고, 또는 자기 주위 사람을 믿고 ‘계율’을 깨뜨려 보는 일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어떤 작은 희망을 <파계>는 보여준다. 비록 아버지가 바랐던, 그리고 한때는 우시마쓰 그 또한 바랐던 사회적 명예와 부, 명성 같은 것을 모두 잃었지만, 허울뿐인 거짓된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우시마쓰에게 작은 응원을 보내며 책을 덮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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