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기질
유진 오닐 지음, 백승진 옮김 / 지앤유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한 집안을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 그로 말미암은 정신적 몰락과 붕괴 등을 그리는 데 탁월한 유진 오닐은 <시인의 기질>에서도 또 한 번 그 재능을 발휘한다. <시인의 기질>에도 한 가족이 등장한다. 이제 마흔 다섯 살인 ‘코닐리어스 멜로디’와 그의 아내 ‘노라’, 그들의 딸 ‘사라’가 이 희곡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톨스토이의 그 유명한 말처럼 이 가정의 문제는 무엇일까? 물론 아무런 문제가 없는 단란한 가정일 수도 있지만 어찌 유진 오닐의 작품에서 그러기를 바라겠는가. 그리고 이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


1828년 7월, 보스턴에서 몇 마일 떨어져 있는 어느 마을,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코닐리어스 멜로디는 여관 및 술집을 운영하고 있다. 한때 이 여관은 역마차들이 지나다니며 번창했으나 노선이 끊기면서 몇 년 동안 방치된 상태이다. 손님도 거의 없는 이 퇴락한 여관 식당에서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면서 이 작품은 시작한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로 미루어보건대 여관 주인인 멜로디에게는 문제가 좀 있어 보인다. 술을 좀 좋아하는 것 같고, 지나간 세월에 얽매여 사는 인물인 듯하다. 이게 뭐 그리 큰 문제인가 싶을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게 곧 드러난다. 


두 사람의 대화에 이어 멜로디가 모습을 나타낸다. 그는 한때는 아주 잘생겼지만 이제는 피폐해진 얼굴이 그의 방탕한 생활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유진 오닐은 멜로디를 ‘적의를 품은 바이런류 영웅의 얼굴로 입은 오만하고 관능적이며 코는 조각을 해 놓은 듯’하다고 묘사한다. 또한 그의 매너는 과장돼 있어서 실제 그의 모습이 아니라 어떤 역할을 과장해서 연기하고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특별하고 인상적인 뭔가가 있는데, 반도전쟁 당시에 영국 귀족이 입었던 스타일의 고가의 우아한 맞춤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입만 열면 장교와 신사의 품격을 운운하면서 바이런의 시를 낭독한다. 퇴락한 여관에서 아침부터 술기운을 풍기며 영국 귀족 옷을 입고 바이런 시를 읊는 사나이라니,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신사와 귀족의 품격을 운운하는 이 기묘한 사나이의 비밀(?) 아닌 비밀은 그의 아내 노라가 등장하면서 조금씩 벗겨진다. 마흔인 노라는 세월의 흔적으로 빛바랬지만 젊었을 때는 꽤 아름다웠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그녀는 신사병에 걸린 변덕쟁이 남편의 눈치를 보느라 아침부터 전전긍긍이다. 남편은 술이 들어가면 너그러워졌다가 불현듯 노라에게 화를 낸다. 그런데도 노라는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고, 또 그를 어떻게 달래는지 아는 것 같다. 멜로디의 지나간 과거를 화려하게 부추겨주고 조금씩 술을 마시게 해주면 되는 것이다. 비록 멜로디로부터 머리에서 스튜 냄새가 난다고 무자비하게 구박을 받을지언정, 허름한 옷차림에 종일 여관 일을 돌보고 오늘은 또 어떻게 외상을 얻을까 고심할지언정 노라는 남편을 받들어 모신다. 마치 멜로디가 자신의 지나간 시절과 바이런의 시를 받들어 모시듯이.


사라는 이런 부모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특히 경제적으로 무능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귀족놀이에 빠져 순종 말을 타고 다니면서 거들먹거리기만 하는 아빠에 대한 반감은 상당하다. 멜로디가 순종 말을 타고 다닐 때 노라와 사라는 아빠의 축하연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 열기 속에서 땀 흘리며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런데도 멜로디는 딸이 귀족적이지 못하다고, 천하고 탐욕스럽다면서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사라가 아일랜드 사투리를 쓰면 무섭게 화를 낸다. 그러다가도 그런 자신의 모습에 흠칫 놀라 진정하고는 한다. 그런 천박한 말을 하면서 사라를 몰아세우는 것은 결코 ‘신사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귀족적이고 신사다워 ‘보일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라는 그런 멜로디를 간파하고도 남는다.

 


사라: 세상에, 오직 환상만이 아빠에겐 현실이야. 그런 동화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굉장해. 그런데 내 일을 걱정하면서 아빠의 환상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술이나 마시고 내 일에는 신경 쓰지 마. 아빠! 아빠는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도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해? 제정신이 아니야. 뭐가 거짓이고 환상이고, 뭐가 사실인지 전혀 분간이 안 돼? (<시인의 기질>, 59쪽)


사라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자 희망이 있는데, 바로 여관 2층에 머물고 있는 사이먼과 결혼해서 이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는 것이다. 사이먼은 하버드대를 졸업한 몽상가로 하포드 가(家)의 상속자이다. 오두막에서 홀로 살면서 자연과 하나가 된 삶을 꿈꾸던 그는 사라를 사랑하게 되었고, 몸이 좋지 않아 사라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여관에 머물고 있는 중이다. 사이먼의 배경을 아는 사라는 물질과 신분 상승을 꿈꾸며 어떻게든 그와 결혼하려고 애를 쓴다. 사실 사이먼의 집안인 ‘하포드 가(家)’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진 오닐은 1755년부터 1932년까지 거의 200년 동안 하포드 가(家)의 역사를 추적하는 11편의 드라마를 썼다. 하포드 집안 이야기를 통해 그는 미국 자본주의 정신이 타락해 가는 과정과 물질적 탐욕으로 인해 인간성이 어떻게 상실됐는지를 비판하고자 했다. 한 집안의 역사를 추적하고 그와 얽힌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미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그리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1편의 작품 중 대부분은 유진 오닐이 죽기 전에 불태워 버렸고, 지금은 <시인의 기질> 등 단 세 편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이 <시인의 기질>은 하포드 가와 얽힌 멜로디 집안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하포드 집안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멜로디 집안은 위기를 맞는다. 사이먼과 사라의 관계를 떼어놓으려고 하포드 가에서 손을 쓰게 되는데, 그로 인해 ‘멜로디’의 환상이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환상이 무너지고 난 뒤의 멜로디는 더없이 처참하다. 더 이상 신사이기를 포기한 그는 딸에게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폭언을 퍼붓는다. 사이먼이 아니라 여관에서 일하는 말로이가 사라의 상대로 적합하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와 말로이는 잘 통할 거야. 사투리도 잘 어울리고. 그는 건장한 동물이지. 너희 둘은 가축우리 같은 집의 진흙 바닥 위에서 소리 지르면서 돼지들과 싸울 무식쟁이 애들을 많이 나을 수 있을 거야.’ 집안에 감도는 이상 기운 때문인지, 멜로디에게 한없이 순종적이기만 했던 노라마저도 남편에 대한 진짜 자기 생각을 사라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노라: 자기 자신하고 자기 자존심 말고는 누군가를 생각해 본 사람이 아니야. 맞아. 빌어먹을 영국의 빨간 군복을 입고 있는 위대한 신사인 네 아빠가 나를 생각한 적은 없었어. 자존심 하나는 대단해! 그런데 그게 허상 아닌가? 더러운 술집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을 잘 속여 먹는 네드 멜로디의 핏줄 아닌가? 아니야! 이런 말 하면 안 돼! 결코 안 돼! 네 아빠는 자신의 환상을 결코 비웃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시인의 기질>,164쪽)


이 가정에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하포드 가와 어떤 일이 있었기에 고고한 ‘신사’였던 멜로디는 그렇게 한순간에 무너졌으며, 또 노라는 왜 그토록 멜로디에 대한 신랄한 발언을 딸에게 하기에 이르렀을까? 멜로디가 보기에 ‘체면을 차릴 줄 알고 몽상가이면서 어수룩’한, ‘시인의 기질이 있는’ 사이먼은 탐욕스러운 사라에게는 ‘식은 죽 먹기’와도 같은 제물이다. 사라는 정말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을까? 멜로디가 바이런을 읊으며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그러나 끝내 가질 수 없었던 ‘시인의 기질’을 하포드 집안의 장남인 사이먼은 정말 갖고 있을까? 이 모든 궁금증은 <시인의 기질>을 직접 읽는 독자들만이 알 수 있으리라. 


멜로디가 그토록 아낀 순종 말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환상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환상은 살아갈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바이런의 시와 순종 말 한 마리, 잘 다려진 군복. 이런 것들만을 좇던 멜로디의 허세는 한심스러웠지만,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의 모습은 어쩐지 가엾기도 하다. 이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의 환상이 필요한 건 아닐까 싶어지기도 한다. 사람을 살게도 하고 또 때로는 죽게도 하는 환상의 실체가 <시인의 기질>에서는 생생하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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