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최근 10주년 특별판이 나왔더라. 이 책이 불온도서로 찍히는 웃기지도 않은 일이 10년 전에는 있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10주년 특별판이 아닌, 그때 그 시절- 불온도서라는 게 존재하던 그 시절에 읽었고, 이 리뷰 또한 그즈음에 썼던 글이다.


고등학교 때 무척이나 싫어했던 과목 중 하나가 ‘정치경제’이다. 흔히 ‘정경’이라고 부르던 과목. 요즘도 이런 과목을 배우는지 모르겠는데… ‘수능 사회과학탐구’ 영역에 정치/경제에 관한 몇 문제가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이 지겨운 과목을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꼭 들어야 했다. 기말고사나 중간고사에 나오는 ‘정치/경제’ 문제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놀랍기 그지없다. 주관식으로 나오는 문제라는 게 이런 식이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을 일컫는 말은?’ 정답은 GATT- 놀랍다고? 이건 정말 실제 상황이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지에이티티’ 이런 식으로 줄줄이 교과서를 외우기 바빴다. 그러고 나서 학교를 졸업하면 GATT 따위가 우리 사는 생활에 무슨 소용이 있냐는 듯 금세 잊었고…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읽으면서 들던 가장 큰 생각은 ‘정치경제’와 같은 과목을 중고등학생에게 가르칠 때 저렇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적용될 때 어떤 식의 파급 효과를 미치는지, 그리고 대부분의 세상 일이 그렇듯이 동전의 앞뒤처럼 좋은 면, 나쁜 면에 대해 조목조목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면, ‘정치경제’라는 과목을 내가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았으리라.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도 고등학교 ‘정치경제’ 시간에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단어들 ‘보호무역, 자유무역, 관세, IMF, 세계은행, WTO, 신자유주의’ 이런 것들이다. 재미있는 발견 중 하나는 내가 그때 배웠던 정치경제 교과서는 분명 내가 고등학생일 당시 나라를 이끌던 정부의 정책에 따라 철저히 그들 입맛에 맞게 쓰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그때 보호무역이 민족주의적 성향에 입각하여 우물 안 개구리들이 우물 속에서만 잘 먹고 잘 살다가 우물 안에서 결국은 그들끼리 빠져 죽고 말 정책인 것처럼 교육 받았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국사책도 다를 바 없던 것 같다. 외국 문물과 교류 없이 폐쇄적인 정책을 실행하다 조선이 망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런 식의- 그때는 ‘세계화’와 그에 따른 ‘자유무역’, ‘신자유주의’ 이런 것들이 최고의 기치로 여겨지기 시작했던 때이니까.
   
이 책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한다. 그러니 위와 같은 교육을 받았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재미있고(동전의 양면처럼 사물이나 현상의 이면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통쾌한 책인지 모른다. 저자 장하준은 많은 역사 속의 사례를 들어 현재 최고의 부자 나라인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가’들이 경제 개발 초기에는 높은 관세와 보호자금 등 철저한 ‘자국 산업 보호’를 통해 성장했음을 지적한다. 오늘날과 같이 ‘잘 사는’ 나라로 진입하고 나서는 ‘신자유주의’ ‘자유무역’과 같은 이론을 거들먹거리면서 개발도상국 등 가난한 나라에게 일방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펼 것을 강요한고 말한다. 정확히는 IMF, 세계은행, WTO라는 사악한 삼총사와 지역별 FTA나 투자협정 등을 통해 개발도상국들이 '자국의 발전에 알맞은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왜? 이미 잘사는 나라에 진입한 그들에게는 ‘신자유주의’가 그들에게 더욱 유리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반면 ‘신자유주의’는 개발도상국이나 가난한 나라에게 있어 단기적으로는 경제적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절대로 좋은 제도일 수가 없다. 저자는 역사 속의 각종 사례를 들어 조목조목 ‘신자유주의’ 예찬자들에게 일격을 가한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저자가 자신의 여섯 살 난 아들 ‘진규’의 예를 들어 설명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여섯 살 난 아들에게 부모에게 의존하지 말고 경쟁과 자율과 시장은 좋은 것이니 지금부터 나가서 일찍 돈을 벌어오라고 하는 것이다(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실제로 세계 각지에서 이 또래 아이들이 일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과잉보호를 받고 있으니 좀 더 생산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경쟁에 노출 시켜야 하고, 일찍부터 경쟁에 노출되다 보면 아이의 발전에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섯 살 먹은 아이를 지금 노동 시장에 내몰면 아이는 당장 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이 아이가 뇌수술 전문의나 핵물리학자가 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만일 아이가 이런 직업을 가지려면 적어도 10년 동안 아이를 보호하고 아이의 교육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 여섯 살 난 아이는 대부분의 가난한 나라, 개발도상국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진국과 어느 정도의 정당한 경쟁 상태에 오르기까지 개발도상국 및 가난한 나라들은 ‘보호’를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어야 하는데, 자율과 경쟁을 모토로 삼는 ‘신자유주의’는 그들에게서 그럴 기회조차 빼앗고 있다.  

때문에 이 책에서는 올바르고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경기가 이루어질 경기장부터 평평하게 만들 것을 주장한다. 약한 나라들이 자국의 생산자들에 대한 보호와 보조금 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하고,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해 보다 엄격한 규제를 하도록 허용해야 하며, 이들 국가가 선진적인 나라들로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차용할 수 있도록 지적소유권 보호를 완화하는 것도 허용해야 하며, 부자 나라들은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가난한 나라에게 기술 이전을 해줌으로써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물론 부자 나라들이 과연 이런 일을 할까? 하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으나 저자는 이렇게 하는 것이 결국 모두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주장한다. 가난한 나라들이 신자유주의를 도입했을 때보다 보호무역, 높은 관세 등으로 자국 시장을 보호했을 때 보다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왔음을 지적하며 개발도상국들의 소득이 높아지면 그만큼 부자나라들이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이 넓어진다고 이야기 한다. 즉 개발도상국가를 비롯한 아직도 수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잘 살기 위해서는 부자 나라만 더 살찌우는 획일적인 ‘신자유주의’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개별국가의 경제 정책과 국가 간의 경제적 상호 작용에 관한 규칙이 변해야 할 것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결국 이 책이 전반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경제를 '잘' 사용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잘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특정한 개인, 집단, 국가만이 계속 잘 살게 된다는 것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돈'이 먼저가 아닌 '사람'이 먼저인 경제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 안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여전히 유효하다. 양극화에, 날로 치솟는 자살률에, 저출산 문제까지- 신자유주의가 이 땅에 드리운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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