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 세트 - 전4권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아주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한번 읽었다. 역시나 새롭다.

 

역사를 왜 배워야하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답해주면 좋을 것 같은 글귀라 옮겨 적는다.

 

"문제는 관점과 기준입니다. 일어난 일은 분명 하나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분명 이토 히로부미를 쏴죽였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분명 유가증권을 위조했습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그 행동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국의 의명장으로서 우리를 침략하는 일본국의 수괴 이토를 사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입장에 서느냐,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느냐, 아니면 일제의 입장과 일부 겹치지고 하지만 모든 개인테러행위를 비난하는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그 행동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래서 역사는 골치 아픕니다. ... 세상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품는 자세, 세상일을 판단하는 자신의 관점을 확고히 하는 입장, 그리고 자신의 관점에 대해서도 엄격함을 유지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기 눈으로 세상과 역사를 보고, 또 자신의 판단까지도 의심해보는 그런 자세 말입니다." 

 

1910년대 까지는 공화제에 대한 논의가 거의 전무했다. 복벽주의나 입헌군주제가 대세였다. 신민회가 최초로 공화정을 지향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많은 학자들이 자료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다고 한다. 공화주의적 지향이 명확하게 나타난 것은 1917년에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임시정부가 입헌군주제에 대한 논의 없이 바로 공화정을 채택한 것은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한다.

 

태극기를 도안한 사람은 중국인 마건충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재외동포에 관한 법률은, 재외동포를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던 자 및 그들의 자손'으로 정의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민을 떠난 재중동포나 옛 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재외동포에서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할때 일본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 등은 박정희와 만주군에서 맺은 인연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만주군에서의 경험은 집권 이후 박정희가 보여준 통치 스타일에 많이 반영되었다.

 

*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뻗어나온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이 처음 출현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아무리 올려 잡아도 한말 이상 거슬러올라갈 수 없고, 이런 의식이 전 국민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좀더 세밀히 연구해보아야겠지만 신분제와 신분의식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에 들어와서일 것이다. 우리 역사에 처음 출현한 국가의 창건자로서 정치적인 군장이자 제사장적 성격을 지닌 임금을 가리키는 칭호였던 단군은 어느새 '단군 할아버지'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이다."

 

*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봉한 선무공신에는 이순신, 권율 등 18명만이 책봉되었는데 그나마 의병장은 단 한 명도 끼지 못했다. 반면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도망가서 명나라에 파병을 청해 불러들인 공로로 정곤수를 일등공신에 봉한 것을 필두로 무려 86명이 공신이 되었다.

 

* 평양성 전투에서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군이 베었다는 왜군의 머리 절반은 실상 조선 백성의 것이었다. 이여송이 평양을 공격할 때 조선 백성의 머리를 벤 다음 앞머리털을 빡빡 깎아서 왜군의 머리로 만들어 전공을 속였다는 것은 명나라 병사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 휴전협정 조인을 앞둔 1953년 6월 18일 송환을 거부하는 공산군 쪽 포로 2만 7천여 명을 석방해버린 일이다. 이에 격노한 처칠은 이승만을 배신자라고 규탄했고, 이때가 8년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자다가 일어난 유일한 때였다는 아이젠하워는 친구 대신 또 하나의 적을 얻었다고 탄식했다. ... 이승만은 정접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뒤엎는다는 위협을 가하여 미국한테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을 뿐 아니라 한국군의 증강, 미국의 군사경제적 원조 등을 따냈다. 이남의 어느 대통령도 미국을 상대로 이런 외교적 '성과'를 얻어낸 사람이 없지만, 그 '성과'는 주한미국의 장기 주둔, 대미 예속의 강화, 이남의 군사주의화 등등의 저주받은 유산을 남긴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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