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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강진 유배 시절,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한 위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수많은 역작을 남겼다. 그리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열다섯살의
황상 역시 그 중 한명이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입신양명과 출세에 목적을 두고 다산의 곁에 머물고자 했지만, 황상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저 다산의 제자로 남기를 원했고 죽을 때까지 그 뜻을 지켰다.
이 책은 다산과 치원(황상의 호)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서로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며 지낸 시간들을 그들이 남기거나 주고받은 서신과 시를
통해 복원해냈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을 보내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생각했는데, 해배되어 한양으로 돌어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한양에는 살고 있는 스승과 강진에 남은 제자가 서로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면서도 자주 연락하거나 볼 수 없어 안타까워 하는 모습, 서로를
염려하는 모습이 전해져 읽는 내내 마음이 뭉클했다. 이런 사랑도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산이 죽은 뒤, 다산과 황상의 연은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을 통해 계속 이어진다.
황상이 괴로워하며 다산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부분과, 다산이 가을을 노래한 시(물론 한시)의 일부를 옮겨 적는다.
먼동이 저만친 터오고 있었다. 황상은 정학연 형제의 배웅을 받고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소내의 안개가 금세
물가에 서서 손을 흔드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웠다. 배 위에서 황상은 스승이 주신 보퉁이를 끌어안고 울었다. 삼근계를 받던 1802년 10월
17일의 풍경이 떠올라서 울고, 학질에 걸려 덜덜 떨며 공부할 때 '학질 끊는 노래'를 지어주며 힘을 실어주던 그 정다운 목소리가 생각나서
울었다. 신혼의 단꿈에 빠졌을 때 혼이 다 나갈 만큼 야단치시던 그 편지가 생각나서 울고, 아버지의 장례 때 다시는 안 보겠다며 서슬 파랗게
진노하던 그 사랑이 그리워서 울었다. 살아서는 네 편지를 다시는 받아보지 못하겠구나 하는 스승의 편지를 진작 받고도 7년 넘게 미적거린 자신의
미욱함이 미워서 울고, 그 아픈 중에 제자를 위해 삐뚤빼뚤하게 규장전운이란 글자를 쓰던 그 마음이 고마워서 또 울었다.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은 처음에 종을 쳐서 시작하고, 끝에는 경(磬)을 울려 마친다. 순수하게 나가다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마침내 화합을
이룬다. 이렇게 해서 악장이 이루어진다. 하늘은 1년을 한 악장으로 삼는다. 처음에는 싹 트고 번성하며 곱고도 어여뻐 온갖 꽃이 향기롭다. 마칠
때가 되면 곱게 물들이고 단장한 듯 색칠하여 붉은색과 노랜색, 자줏빛과 초록빛을 띤다. 너울너울 어지러운 빛이 사람의 눈에 환하게 비친다.
그러고서는 거둬들여 이를 간직한다. 그 능함을 드러내고 그 묘함을 빛내려는 까닭이다. 만약 가을바람이 한차례 불어오자 쓸쓸해져서 다시 떨쳐 펴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텅 비어 떨어진다면, 그래도 이것으로 악장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산에 산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매번 단풍철을
만나면 문득 술을 갖추고 시를 지으며 하루를 즐겼다. 진실로 또한 한 곡이 끝나는 연주에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 백련사에서 노닐면서 단풍잎을 구경하고 지은 시의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