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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8월
평점 :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집에 있으면서 읽은 책이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남겨진 삶까지도 부정하게 돼 결국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인물의 고백체 소설이다.
1부 선생님과 나, 2부 부모님과 나 에서의 화자는 '나'이지만 3부 선생님과 유서 에서의
화자는 '선생님'이다. 누구를 주인공으로 봐야할지 헛갈리는 이유이다. 하지만 소설에서의 핵심은 결국 유서에 담긴 '선생님'의 자기 고백에 있고
'나'는 그걸 이끌어냈고 들어주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주인공은 '선생님'으로 봐야할 것 같다.
하긴 누가 주인공인지 따지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저 자신의 마음만이 알고 있는 비밀,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한 무겁고 절박한 비밀이 냉정하게 바라봤을 때는 지극히
사소한 일일 수 있다는 사실, 그치만 당사자에겐 살아야하는 이유를 뿌리부터 송두리째 뽑아 흔드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단순하고 솔직하게, 그렇게 단단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살아야할 이유가 꼭 있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살아야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죽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없어서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거야말로 말이야 막걸리야;;
자기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의 일상이 얼만큼 괴로울 수 있는지, 그래서 그 삶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보여주는 소설.
착잡. 우울하네.
-발췌-
나는 침체되면 침체된 대로 빨리빨리 일이
돌아가야 하는 도시의 술렁거리는 불안 속에서 유일한 한 점의 불빛인 선생님 댁을 보았다. 나는 그때 이 빛이 암흑의 소용돌이 속에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차피 그 불빛도 빛을 소멸해갈 운명인데 지금 내 눈앞에 잠시 보류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의 번민은 사모님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계획적으로 나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시작된 거야. 모녀가 내 뒤에서 서로 입을 맞춰 지금까지 모든 일을 진행해왔다고 생각하니 나는 갑자기 숨이 막혀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됐지. 불쾌한 정도가 아니라 이젠 더 이상 발을 내딛을 곳이 없는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네. 하지만 나는 마음 한구석에선 그녀를 굳게
믿었네. 그렇기 때문에 믿음과 의혹 중간에서 올바르게 행동할 수가 없었지. 나에겐 어느 촉이나 진실이고, 또 양쪽 모두 허상이었던 거야.
작은아버지에게 배신당했을 때 사람은 믿을 게 못된다는 점을 절실히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건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겟다는 것이지,
내 자신에게만큼은 그때까지만 해도 확실한 믿음이 있었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나 자신은 멋진 인간이라는 신념이 마음속 어딘가에 있었단 말이지.
그 믿음이 K로 인해 무참히 깨져버리고 나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 마음은 심하게 흔들리게 됐네.
인간들에게 등을 돌린 나는 결국 나 자신도 저버리고 닫힌 공간에 날 가두게 된 것이지.
그가 죽기 전에 내 머릿속에는 사랑이라는
한 단어만 꽉 차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그때의 내 판단은 너무 단순했고 또한 일방적이었네. K는 실연에 대한 상처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판단했지.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침착해진 상태에서 그 사건을 바라보니 그렇게 간단히 결론을 낼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네. 이상과 현실의
충돌-이것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지만-나는 이런 생각도 했네. K가 나처럼 혼자 남겨진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결국 마지막 길을 선택하게 된
건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난 갑자기 소름이 끼쳤네. 나 또한 K가 선택한 길을 그의 뒤를 따라 밟아가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던
거야. 소리 없이ㅇ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렇게 홀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