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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평점 :
저자 아베 코보는 '일본의 카프카'로 불리는 작가라고 한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었는데, 주인공이 벌레로
변한다는 설정이나, 이 책 <모래의 여자>처럼 우연한 계기로 모래 구덩이에 갇히게 된 주인공이 모래를 퍼올리는 일을 하다가 결국
세상에서 잊혀져간다는 설정은 기이하고 해괴하다는 점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다.
소설의 시작도 왠지 비슷한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한 것이 틀림없다. 아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어느날 그는 체포되었기 때문이다"로
시작하는 카프카의 <심판>이나,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기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변신>의 도입부분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이미 첫 문장에서 소설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사건을 결과처럼 미리 알려준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그 순간부터 이미 사건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모래의 여자> 또한 비슷하다. "8월 어느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 이렇게 하여 아무도 그가 실종된 진정한
이유를 모르는 채 7년이 지나 민법 제 30조에 의해 끝내 사망으로 인정되고 말았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데, 사실 이 문장만 봐도 사건의
시작과 결말을 알게 되는 셈이다.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야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교사이면서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한 주인공 남자(이 책에선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 남자와 주인공 여자가 있을 뿐이다)는 아내와의 결혼생활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에서도 만족감을 별로 얻지 못했던
것 같다. 아직 곤충대백과사전에 등록되지 않은 희귀종을 찾아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자 사구를 찾아 떠난다. 사구에서 곤충을 채집하다 돌아갈
시간을 지체하여 마을 주민의 안내로 묵을 곳을 찾아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이 하필이면 한번 들어가면 이제껏 누구도 자신의 의지대로 빠져나온적이
없는 모래 구덩이였다.
모래 구덩이에는 주인공 여자가 혼자 살고 있다. 여자는 밤낮으로 구덩이속 모래를 퍼 올리는 작업을 한다. 그 일을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면 여자가 살고 있는 집은 모래 바람 때문에 모랫속에 파묻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남자는 자신이 구덩이 속에 갇히게 된 이유가
자기로 하여금 여자와 함께 모래를 퍼내는 일을 하게 하려는 마을 주민들의 계획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다.
모래 구덩이 속 여자와 남자는 주민들에 의해 철저히 감시를 받는다. 하루 할당량의 일을 해야만 마실 물과 음식이 주어진다. 남자는
자신이 여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짐이 되는 존재처럼 보이고자 꽤를 부리거나 탈출시도를 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그리고 마시고
먹기 위해 여자를 도와 모래를 퍼올려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남자의 의식 속에서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는게 되는 시기는 여자와 첫 관계를 갖게 된 이후인 것 같다. 아내와의 잠자리는
남편으로서 해내야 할 의무 같은 것이었는데, 여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존감과 약간의 책임감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책임감 같은'이라고 한
이유는 주인공 남자가 스스로 그것을 부인하고 있으므로)
탈출에 가까스로 성공하지만 마을을 벗어나는데 실패하고 다시 붙잡히게 되는데, 이때 주인공 남자가 하는 말이다.
"살려줘!"
늘 정해져 있는 말! ... 아무렴 어떠랴... 다 죽어가는 판에 개성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나. 판으로 찍어낸 싸구려 과자 신세라도
좋으니, 아무튼 살고 싶다! ... 이제 곧 가슴까지 묻히고, 턱까지 묻히고, 코밑까지 빠지면... 그만! 이제
그만!"(192)
"납득이 안 갔어... 어차피 인생이란 거 일일이 납득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저 생활과 이
생활이 있는데, 저쪽이 조금 낫게 보이기도 하고... 이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어쩔 거냐는 생각이 가장 견딜 수 없어... 어떤 생활이든
해답이야 없을 게 뻔하지만... 뭐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 많은 쪽이 왠지 좋을 듯한 기분이
들거든..."(199)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종의 발견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주인공 남자가 결국 모래 구덩이에 빠져
살기 위해 끝도 없이 모래를 퍼내는 작업을 하면서 '판으로 찍어낸 싸구려 과자' 신세라도 좋으니 살고싶다고 말하는 이 부분이 소설의 의도를 가장
잘 담고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을 동경하면서 그곳에서라면 마치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실제로 이곳과 그곳이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마치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말이다.
결국 주인공 남자는 탈출할 기회가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모래 구덩이 속에 계속 살기를 선택한다. "어떤 생활이든 해답이야 없을 게 뻔하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 많은 쪽"이 도시가 아닌 사구 한 복판이었던 것이다.
안팎이 다르지 않으므로 안에 머물 건지, 밖으로 나갈 건지 선택하는 건 결국 각자의 몫일텐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인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어찌하는 게 좋을지.. 그저 답답할뿐이다.
아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은 일본이고, 주인공들도 일본인인데 실제로 일본에 이 같은 모래사막이 있는지 궁금했다.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