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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ㅣ 블랙 장르의 재발견 1
오스카 와일드 지음, 서민아 옮김 / 예담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운 좋게 재밌는 소설을 발견했다. 엊그제 읽었던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서 주인공의 대사 중 언급이 되었던 소설이다. 기영이 남파된 간첩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회의하면서 이 책을 얘기했던 것 같은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외모와 양심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인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역시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의 공존'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 비슷한 느낌의 책이다. 1890년대쯤 쓰여진 책이고 지금까지 여러 차례 영화, 연극화 되었다고 하는데 난 왜 몰랐을까;
화가 홀워드는 영혼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도리언 그레이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를 모델로한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스무살이 채 안 된 도리언 그레이의 외모에 완전히 매료되어 자신의 예술적 혼을 담은, 그래서 도리언의 초상화이지만 곧 자기 영혼의 초상화이기도 한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그전까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인지 몰랐던 도리언은 홀워드가 완성한 초상화를 보고 자기 모습에 홀딱 반하게 되었다. 초상화를 보며 도리언은 영원히 늙지 않기를 원한다는 기도를 하게 되고 이것이 곧 그의 삶을 바꿔놓게 된다.
"나는 점점 늙고, 추하고, 끔찍해지겠지요. 하지만 이 그림은 언제까지나 젊음을 간직하고 있을 거예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유월의 오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고요. 아, 그와 정반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는 언제까지나 젊은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그림이 나 대신 점점 나이를 먹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난 무슨 짓이든 할 거예요! 그래요, 그럴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무엇이든 가져다 바치겠어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바칠 거예요!"(54)
도리언은 극장에서 알게 된 배우 베인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홀워드와 그의 친구 헤리(헤리는 도리언을 쾌락에 빠지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는 한순간에 사랑에 빠져버린 도리언을 지켜보며 복잡한 감정에 휘말린다. 홀워드는 질투 비슷한 감정을, 헤리는 순수하고아름다웠던 도리언이 쾌락의 맛을 알아가며 변해갈 모습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도리언은 홀워드와 헤리에게 베인을 소개시켜주기 위해 그녀가 연극을 하고 있는 극장에 둘을 데려갔다. 도리언과 결혼을 약속한 베인은 진실한 사랑을 알게 되자 무대 위에서의 연기가 모두 가짜, 위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완벽한 배우에서 모두가 경악할 정도의 '발연기'의 1인자로 전락하고 마는데 이 모습을 지켜본 도리언은 베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충격받은 베인은 그날밤 자살을 한다.
이별을 통보하고 집에 돌아온 도리언은 우연히 자신의 초상화를 보다가 표정이 어딘가 달라졌음을 알게 된다. 초상화에서 입가의 잔인한 표정을 읽게 된다. 도리언은, 자신은 젊은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초상화가 나이를 먹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아름다움은 녹슬지 않고 자신의 열정과 죄악의 모든 짐을 켄버스 위의 얼글이 대신 짊어지면 좋겠다고, 그림속 얼굴을 고통과 걱정으로 생긴 주름살로 시들어가고 자신은 이제 막 깨닫고 있는 소년기의 섬세한 청순함과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면 좋겠다고, 그렇게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도리언은 그림이 그에게 눈에 보이는 양심의 거울이 되게 하겠다고, 유혹과 쾌락에 저항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베인에게 바로 사과의 편지를 쓴다. 그러나 그 다음날, 헤리로부터 베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도리언은 자신에게 사죄의 기회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자책한다. 헤리는, 베리가 예술가로서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역할을 해낸 것이라는 말로 도리언을 위로 하고, 도리언은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후 초상화는 더욱 추악하게 변해가지만, 도리언은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이자 부유한 상속자로서 명성을 쌓아간다. 도리언이 쾌락에 빠져들수록 초상화를 더욱 사납고 추악하고 끔찍하게 변해갔고, 도리언은 자기만 볼 수 있는 곳에 초상화를 감춰버린다.
"홀워드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 앞에 서서 캔버스 위의 늙고 사악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 곁에 윤이 나게 닦엔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보고 활짝 웃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들여가보곤 했다. 그 현저한 대조가 그의 쾌감을 자극했다. 그는 점점 자신의 미모에 반했고, 점점 자신의 영혼이 타락하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237)
어느덧 2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고, 점차 도리언에 대한 추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도리언을 가까이 한 사람들이 모두 망하거나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 그가 늙지 않는 이유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기 때문이라는 것 등의 소문이 퍼지게 되고 이를 염려하게 된 홀워드는 깊은 밤 도리언을 찾아갔다. 홀워드의 충고가 견디기 힘들었던 도리언은 그에게 그가 그린 초상화가 어떻게 변했는지 직접 보여주고, 변한 추상화를 본 유일한 사람이 된 홀워드를 죽이게 된다.
도리언 때문에 자살했던 베인의 오빠가 도리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쫓기 시작하면서 도리언은 점점 벼랑끝에 몰리게 된다. 나중에 도리언을 쫓던 베인의 오빠마저 사라지게 되지만 도리언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눈길과 관심에도 진저리를 치게 된다.
"아! 세월의 짐은 초상화가 모두 떠맡고 자신은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며 흠 없이 화려한 빛만 발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오만과 정념으로 똘똘 뭉친 극악무도한 순간들이여! 그의 모든 타락들은 바로 그 기도 때문이엇다. 차라리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즉시 확실하게 벌이 내려졌더라면 좋았을 것을. .. 가장 공정한 신에게 바치는 인간의 기도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가 아닌 '우리 죄를 벌하시고'가 되어야 했다."(402)
결국 도리언은 홀워드를 살해했던 칼로 초상화를 찢어버리기로 결심한다. 도리언의 집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에 경찰이 출동했다. 그의 다락방에서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의 앳된 청년이 그려진 초상화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바닥에 쓰러져있는 늙은이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외모의 아름다움을 쫓다 완전히 타락하게 된 도리언의 이야기..
결국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장 공정한 신에게 바치는 인간의 기도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가 아닌 '우리 죄를 벌하시고'가 되어야 했다."라는 말로 정리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