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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8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현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최인훈의 <회색인>을 읽다가 중간에 카프카에 대한 언급이 있길래, 또 그 이름을 어디서 많이 들어본듯하여 읽게 되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가, 꼭 읽어야 할 작품 등으로 얘기됐던 것 같다. 사실 이런 찬사는 그리 보기드문 게 아닌데, 어쨌든 그런 말이 적혀있음으로 인해 괜히 관심을 더 갖게 되는 효과는 확실히 있는 것 같다.
소설은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한 것이 틀림없다. 아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어느 날 아침 그는 체포되었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오늘 카프카의 또 다른 소설, 단편 <변신>을 읽었는데 첫 문장에서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을 알려주는 것이 카프카 소설의 특징인 것 같다.
<변신>은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로 시작한다. 쓰고 보니 첫 문장에서 이미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벌어져 있다는 것 말고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바로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이 '어느 날 아침'이라는 거다. 예상치 못한 일이(소설 밖에선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어느 날 갑자기 벌어졌다는 설정 자체가 독자로 하여금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 같다.
다시 <심판>으로 돌아가서, <소송>으로 번역된 책도 있던데 어떤 게 더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송>이 더 맞을 것 같다. 심판이라고 했을 때 왠지 기독교적인 느낌, 결정권을 지닌 절대적 존재와 나약한 인간 같은 이미지가 연상되는데 소송이라고 하면 동등한 인간 사이에 행해지는 법에 의한 결정이라는 느낌이 묻어나서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또 써놓고 보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따르자면, 이 소설은 '소송'으로 시작하여 '심판'으로 끝나고 있다. 주인공 K는 자신이 왜 체포되었는지도 모른채 소송에 휘말리게 된다.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을 뿐더러 어떤 불찰 혹은 오해로 인해 소송에 휘말렸지만 일상생활을 그대로 영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중대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K의 직장 동료, 친척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소송 사실을 모두 알고 있고, 자신을 걱정하자 혐의를 벗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화가를 만나고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만나 해결책을 모색해보지만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화가는 K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슨 죄를 지어서 기소되는 것이 아니라 기소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유죄가 된다. 그러므로 일단 기소되면 실제적인 무죄 판결이란 없고 가능한 것은 형식적인 무죄 판결과 소송을 한없이 지연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 유죄를 인정하는 것만이 최후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다."
결국 소설이 끝날 때 까지도 주인공K가 기소된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K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어 갈수록 '대체 왜!'라는 궁금과 짜증이 폭발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재판관들은 하나같이 무책임하다. 문지기, 곧 재판관은 말한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거든 내가 금지하는 것을 어기고라도 들어가 보게나. 그러나 내겐 권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둬. 그리고 나는 가장 낮은 문지기이 지나지 않아. 문마다 문지기가 서 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권력이 강하지. 세 번째 문지기를 보면 나도 겁이 나."
K는 결국 최후의 심판을 받아들인다.
"흐려져 가는 눈으로 K는 두 남자가 눈앞에서 뺨을 맞대로 자신의 종말을 지켜보는 것을 보았다. '개같이!' K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남을 것 같았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에게나 최후의 심판이 다가오는 순간이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죽음의 집행이 유예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법의 비인간성, 관료주의의 폐해를 꼬집고자 한 것인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