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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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이 죽었을 때, 그의 부인이라도 살아있었더라면.. 그러니까  어린 단종에게 수렴청정 해줄 어머니만 살아있었다면 과연 계유정난은 일어날 수 있었을까?

 

문종은 여복이 없었다고 한다. 휘빈, 순빈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했는데, 순빈 같은 경우 레즈비언이었는지 궁녀들과 색을 즐기다 발각되어 세종의 손에 쫓겨났다고 한다.;;

 

김종서는 태종, 세종, 문종, 단종  네 임금을 모신 당대 최고의 문신이자, 무신이기도 했다. 또 당대 제일의 역사가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태조때 편찬된 <고려국사>는 중국 황실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데다가 누락된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고 역적으로 몰린 후에는 정도전이 편찬한 역사서를 대대로 전수할 수 없다는 정치적 고려도 있었기 때문에 고려사를 다시 편찬하게 되는데, 세종은 이 임무를 김종서에게 맡겼다.

 

<고려국사> 편찬자 정도전과 <고려사> 편찬자 김종서는 모두 왕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문종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허리에 난 종기 때문이었는데, 이때 내의원 전순의라는 자가 종기와 상극인 꿩 고기를 먹게 한 것이 드러나 쫓겨나게 됐다. 그런데 세조 즉위 후 1등 공신으로 책봉된다. 문종의 죽음에 수양대군이 매우 깊숙히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319)"김종서의 죽음은 그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종의 죽음이자 그가 섬겼던 세 임금, 즉 태종과 세종, 문종이 만들어놓은 정상적인 헌정질서의 죽음이었다."

 

(369)"태종이 피의 숙청을 통해 법 아래의 존재로 끌어내린 공신들을 세조는 법 위의 존재로 끌어올렸다. 태종이 국가권력을 천명의 실현도구로 생각했다면 세조는 공신집단의 사적 이익실현의 도구로 사용했다."

 

김종서는 <노산군일기>, <세조실록>에 계속 역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종서에 대한 공식적인 신원은 쉽게 이뤄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이 모두 세조의 핏줄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사망한 지 거의 300여 년 뒤인 영조 시기에 신원된다.

 

김종서와 사육신을 모시는 서원은 노량진, 함경도 등 전국에 산재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했던 한명회, 권람 등을 모시는 서원은 단 한 군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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