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흔히 신선한 소재를 바탕으로 한 영화나 소설 작품에 '발칙한 상상력' 또는 '상상을 뛰어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을 보았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비카스 스와루프) 처럼 엄청 기대를 했지만 발랄하거나 발칙한 정도의 상상력이 아니어서 조금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열외인종 잔혹사>(주원규. 한겨레출판) 처럼 상상을 초월한다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경우도 있다.

누구나 새로 개봉된 영화나 신간 소설을 읽을 때마다 전에 본 특정 작품들과 비교하기 마련이다. 나에게도 비교 기준으로 삼는 작품 몇 가지가 있다. 영화로는 '지구를 지켜라', '식스티나인', 소설로는 <남쪽으로 튀어> 정도. 하지만 벌렁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며 단숨에 읽어내려간 작품은 <열외인종 잔혹사>가 처음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나서 긴 숨을 몰아쉬며 아쉬움에 책을 스윽스윽 쓰다듬어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앗. 한 가지 더! 만화책과 소설, 수필 등을 통털어 책을 읽으며 키득키득 소리내어 웃어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나이 80 가까이 된 '박통의 남자' 극우수구파 노인 장영달, 최저임금노동자로 살다 해고되어 무료급식으로 연명하는 노숙자 김중혁, 콜라 없이 햄버거만 먹더라도 진짜 같은 짝퉁을 고집하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윤마리아, 인터넷 게임머니 2만 포인트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 거는 17살 기무. 낯설지 않은 케릭터다. 매일 언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심지어 내 친구이기도 하고, 내 친구의 친구이기도 하다.

1부에서는 네 명의 각자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2부에서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물론 서로를 알지는 못한다. 어디선가 한 두번씩 부딪힌 사이지만 그때 그 사람이 지금 이 사람인지는 깨닫지 못한다. 그들이 모인 곳은 서울 강남의 코엑스몰. 작가 서문이나 작품평들을 읽어보면, '코엑스몰'이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들 하는데 서울에서 지내면서도 한번도 가본적이 없기 때문에 잘 알 수는 없다.

'그' 코엑스몰에서 양의 탈을 쓰고, 연미복을 입은 무장 집단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주인공 네 명은 각자 다른 시선으로 사건에 대처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웃음을 준 주인공 장영달은 빨갱이들이 주도한 테러로, 김중혁은 예언자가 말했던 노숙자들의 혁명으로, 윤마리아는 자신이 믿는 데이비드종교(?)가 마련한 '십헤드 카니발'로, 기무는 2만 포인트가 걸린 온라인게임 행사로.

1부가 현실 속의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공간이라면 2부는 그야말로 스펙타클한 상상의 스릴러가 전개되는 공간이다. '아이리스'에서 보다 더한 총격전과 전투신이 내 머릿 속에 펼쳐진다.

"설마.."
"이거 진짜야?"
"우와. 진짜로?!"

이런 긴장감이 유지되다가도, 극우파 노인 장영달이 "이런 씨발새끼들이... 감히 어른을 가지고 놀아?"라고 한번씩 뱉어낼 때 마다 웃음이 연실 터진다. 특히 장영달이라는 캐릭터에 정이 가는 이유는 그가 비록 반공, 멸공을 부르짖는 과거형 인간이어도 가식없고, 솔직하며 자기 삶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점(ㅋㅋㅋ)에 끌렸던 것 같다. 열외인간. 나도 어쩔 수 없는 열외인간이기 때문에 느낀 동병상련, 연민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충격적인 것은, 열외인간들이 자기들 내부에서 끊임없이 또 다른 열외인간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이었다. 무장집단의 여성지도자는 여성 인질 중 몸무게 70kg이 넘는 사람을 분류해 총살시키고, 남성들 중에서는 나이 60이 넘은 사람을 분류해 잔인하게 제거해버린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루저 발언'이 떠올랐다. 사람을 나이, 몸무게, 키, 연봉 등 숫자화된 잣대로 분류하는 것. 말도 안되는 이러한 일들이 현실에서, 소설 속에서 일어난다. 내가 순간 계급을 성골과 진골, 6두품으로 철저하게 구분해 놓았던 신라시대의 골품제도를 떠올렸다고 한다면 지나친 오바일까?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직업병이라고.

영화나 소설이 아무리 자극적이고, 충격적이고 신선한 스토리를 내놓아도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에는 깊은 여운을 남기지 못한다. 때로 허망함만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개연성있게 전개되어 나에게도 일어날 법한 일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 그 여운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열외인종 잔혹사>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교묘하게 오간다. 허구인 줄 알면서도 "뭐야, 이거 진짜야?"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한다.

양들이 목자를 따라서만 이동하듯, 열외인간들은 자신들을 이끌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열외인간들이 일으키는 혁명. 그게 꼭 상상속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일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