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가장 좋은 점은 우리가 삶에서 마주칠 수 있는 그 어떤 고민과 갈등과 상처도 적당한 선에서 봉합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등장인물들을 삶의 저 어두운 골짜기로 이끌지도 모르는 작은 균열, 틈, 깨진 자리마다 이 드라마는 반짝이는 모래를 얇게 덮어 마무리하고 넘어간다. 때로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를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마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통속적인 노래와 감정으로 스윽 덮고 지나간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며, 천국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때로 생각한다.
삶의 진실은 때로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무자비하고 잔혹하여 똑바로 쳐다보기 어렵다. 당신은 나의 마음을, 나는 당신의 마음을, 다 알 수 없고, 끝내 알지 못할 것이며,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각자 절대의 고독 속에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진실.
그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우므로,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만났을 때 사회적으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장례 의식을 치르고 정해진 표현에 기대어 인사를 주고 받는다. 그리하여 나의 슬픔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장례식장에서 어제 장례식을 치른 사람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믿는다. 마치 그 정해진 몇 마디 어구로 표현할 수 없는 다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망자가 끝내 풀지 못하고 떠난 복잡한 인연의 실타래는 애써 묻어둔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유일성에 대한 감각을 점차로 지우고, 나 또한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나의 생각과 감정 또한 통속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믿는 것은 오히려 삶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완화하는 최선책이 아닐까. 수천 년 전부터 정교한 절차를 만들어 개인의 고유한 희노애락을 공동체의 공동 경험으로 끊임없이 돌려보내려 한 고대인들조차 이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여 세상을 떠난 사람의 숫자가 어제로 십만명을 넘었다.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고, 함께 슬퍼해주지 못한, 십만명의 죽음.
부모와 형제와 자식을 잃은 백만명의 사람들.
친구를 잃은 천만명의 사람들.
언젠가는 길에서 한 번은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희미한 인연으로 이어진 일억명의 사람들.
그 모든 사람들의 고유한 슬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애초에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과연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일까.
그 모든 사람들이 나누어 가진 공동의 운명과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을 공동의 감정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과연, 무책임한 미봉책에 불과한 것일까. 그것 말고는 달리 기댈 것이 없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