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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의 빨간 수첩
소피아 룬드베리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도리스의 빨간 수첩(소피아 룬드베리, 이순영 옮김, 문예출판사)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때, 그들의 모험에 동참할 수 있던 나만의 방법을 기록한 것이다.” - 소피아 룬드베리
‘사람책’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한 사람의 인생이야기는 한 권의 책과 같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생각난다. 1945년 해방되는 몇 달 전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머니를 일찍 여윈다. 새어머니와 배다른 형제들이 생긴다.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들고 군대에 갔다가 베트남에 파병되어 다녀온다. 군인이었을 때 결혼을 하고 남매를 낳았다. IMF때 직장을 잃고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했고, 5년전 부인과 사별하고 늙은 아버지는 일흔넷에 혼자 생활하고 있다. 그 사이사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프랑스 파리, 전쟁을 겪고 미국 뉴욕, 영국을 거쳐 다시 고향인 스웨덴으로 돌아온 도리스. 이제는 늙은 도리스와 그녀의 수첩과 이야기를 통해 늙는다 것은 무엇인가? 나를 스쳐가는 많은 이름과 사람들, 그리고 후회없이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나와 나의 주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많아지는 것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모든 사람의 처음과 끝은 같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과정인데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자신에게 필요하다. 여러 선택으로 그 과정은 채워지고 곧게 펼쳐진 길일수도, 커브 길일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는 길일수도 있고, 혼자만 걷고 있는 길일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도리스의 유언인 편지에서도 그런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제니, 삶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냥 살아. 네가 원하는 대로 사는 거야. 웃어. 인생이 너를 즐겁게 해주는 게 아니라, 바로 네가 인생을 즐겁게 해줘야 하는 거란다. 기회가 오면 과감하게 그것을 잡아.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 좋은 것을 이뤄내라. 세상 무엇보다 널 사랑한다. 언제나 그랬어. 그걸 절대 잊지 마라. 내 사랑하는 제니.
늙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는 지금도 늙고 있고 언젠가 죽는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늙고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거나 잊으려하고 한다. 늙는다는 것이 유쾌한 경험은 아닌 것 같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지 않는 몸과 생각을 갖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직 정확하게 와닿는 것은 아니지만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된다.
늙고 몸이 아프다는 건 고역스러운 일이다. 언제 피로가 풀렸는지 아니면 피곤하지 혹은 그 중간쯤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무억을 해야 하는지 혹은 하면 안 되는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다.
이름을 기억하는가?
빨간머리 앤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생각난다. 초록지붕에서 보이는 벚꽃을 ‘눈의 여왕’이라고 이름 짓는 앤. 어떤 동물이나 사물에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 누구나 이름을 갖는다. 그 이름은 다른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무엇을 기억하는 것은 이름을 잊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네 친구들을 모두 적어두렴. 네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말이야. 앞으로 네가 가게 될 흥미진진한 모든 장소에서 만날 사람들. 그러면 넌 그들을 절대 잊지 않는 거지.”
당신은 후회없이 사랑했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늙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을 기억하는가? 모두 다른 질문이 아니다. 결국 우리가 살면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사랑하며 살다가 늙어 죽는가이다. 그 때 다시 물을 수 있는 질문은 ‘당신은 후회없이 사랑했는가?’이다.
사랑은 모든 묘비 아래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랑이 있다. 삶 전체를 휘청거리게 하는 잠깐의 시선. 공원 벤치 위에 포개진 두 손. 갓 태어난 아기에게 향하는 부모의 눈길. 너무도 강렬해 어떤 열정도 필요 없는 우정. 몇 번이고 반복해 하나로 합해지는 두 몸. 사랑. 그것은 단 하나의 단어일 뿐이지만, 너무도 많은 것을 품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랑뿐이다.
당신은 후회 없이 사랑했나요?
도리스와 앨런이 공원에서 만나는 장면
어느 날 그 사람이 그 공원에 나타났어. 나는 보리수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었지, 밝은 햇살이 나뭇잎과 가지들 사리로 내리쬐면서 내 책의 흰 페이지에 빛이 퍼졌어. 그런데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내 위로 드리우는 거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두 눈과 딱 맞닥뜨렸어, 그 사람이 웃고 있는 것처럼 두 눈이 반짝거리더구나. 그날 그가 입고 있던 옷이 지금도 정확히 기억난다. 구겨진 흰색 셔츠, 붉은 색 양털 스웨터, 베이지색 바지. 정장 차림도 아니었고 옷깃이 빳빳하지도 않았고 황금색 버클이 달린 벨트도 없었지. 겉으로 보기엔 부의 표시가 전혀 없었어. 하지만 그의 피부는 실크처럼 매끈했고, 진지해 보이는 입매는 어찌나 아름답던지 즉시 몸을 기울려 키스하고 싶을 정도였어. 이상한 느낌이었어. 그가 앉아도 되겠내는 눈빛으로 내 옆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의자에 앉는 거야. 나는 계속 책을 읽으려 했지만, 우리 둘 사이에서 고동치는 에너지에 온통 신경이 쓰였지. 그리고 그의 냄새에도 그에게서는 아주 기분 좋은 냄새가 났어. 그 냄새가 내 영혼 속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았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