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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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 중에 무척 유명한 책이에요.

추천하는 사람도 참 많더라구요.

한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


참 재미있게 썼고, 잘 읽혀요.

그래서 그런지 어떤 사람은 한줄이면 될 것을 한권으로 늘려서 팔아먹는다고 비난하기도 하더라구요.

나도 처음에 대충 볼땐 그랬어요.

그런데 손에 연필을 쥐고 꼼꼼히 읽어보니 그런 비난을 받을 책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논증을 시도하면서 3가지 사례를 드는데,

사례별로도 자세한 논증을 보여줘요(마치 프랙탈구조물을 보는듯해요).

개별 논증은 합쳐져 전체를 구성하고 그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에요.

풀하우스(시스템 전체)라는 제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요.


거칠게 설명하면,

오른쪽 꼬리만으로 전체시스템의 경향성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인간은 전체 생물군을 놓고 보면 오른쪽 꼬리에 해당한다고 해요(오른쪽 꼬리라는 말은 본문에 나와요).

그럼에도 모든 생명의 역사가 인간의 탄생을 위해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고,

진화의 최종목적이 인간이었다고,

우리가 가장 성공적으로 진보한 동물이라고 자화자찬한다는 것이지요.

그건 착각일뿐이라는 거에요..


기억에 남는 부분이 참 많은데 몇가지만 간단히 언급할게요.



1. 먼저, 엔트로피에 대한 부분.


"열역학 제2법칙의 기본은 에너지가 조직화된 상태에서 덜 조직화된 상태로 자연적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는 태엽이 계속 풀려나가고 있다(42쪽)"-스콧 펙의 '끝나지 않은 길' 재인용부분

이건 고등학교때 어설프게 엔트로피 이론을 알 때부터 오랫동안 고민했던 거 같아요.

결국 인류의 미래는, 생명의 미래는 허무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생명이란, 인간이란 허무에 맞서는 영웅적 존재이기도 해요.


"모든 생명체는 엔트로피와 같은 강력한 힘에 함께 맞서서 밑바닥에 축적된 힘으로 몇몇 선택된 생명을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밀어 올린다는 것이다. 치약을 아래에서 짜더라도 치약 전체를 밀어 올리는 힘에 의해 아주 적은 양이 그 꼭지에서 나와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힘은 인류를 진화 피라미드의 정상으로 밀어 올린다는 것이다(46쪽)."

그런데 이런 주장은 사실 엔트로피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생긴 오해에 불과해요.

이번에 오해가 명쾌하게 풀렸어요.


"지구는 닫힌 계가 아니다. 지구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태양 에너지로 목욕을 하고 있고, 따라서 열역학 법칙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으면서 지구의 질서는 증가할 수 있다(42-43쪽)."

그러니까 '지구에서 생명이 번성하는 것은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2. 다음으로 4할타자 부분


넓게 펼쳐진 보자기가 있어요.

그 보자기 가운데를 잡고 들어올리면 보자기는 높이 솟아오르고,

바닥에 닿는 면적은 좁아지겠죠.

그걸 2차원으로 표현하면,

종 모양이 더욱 뾰족해지고 양 극단은 짧아지는 모양이 될거에요.


종 모양이 더욱 뾰족해진다는 것은 야구선수 전체의 기량이 높아진다는 것이고,

양 극단이 짧아진다는 것은 실력의 편차가 줄어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4할 타자는 갈수록 나오기 힘들어진다는 설명이에요.


사실 이런 설명은 요즘 헬조선을 설명할 때도 유용하다고 봐요.

과연 요즘 젊은이들이 게으르고, 편한 일자리만 찾으려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종 모양이 뾰족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3. 박테리아 부분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 4할타자보다 읽기 힘들지만,

제일 재미있는 부분이었어요.


왼쪽 벽(생명체의 크기가 작아질 수 있는 한계) 때문에 생명체의 크기는 더 작아지기 힘들고 커질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커지는 경향은 시스템 전체의 경향이 아니라 아주 일부분의 경향일 뿐이다.

대다수는 원형태를 유지한다.

따라서 생명 전체를 놓고 볼 때 일부분의 경향성이 관찰될 뿐 진보는 관찰되지 않는다.



4. 의문점에 대한 답


4할타자에서 말한 보자기를 들어올리는 힘 자체가 어떤 경향성을 나타내는 건 아닐까요?

그러니까 전반적인 기량이 상승한다는 것이 진보한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건 생명현상 전체가 아닌 인간사회에서만 나타나는 문화적 현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생명진화의 경향성과는 구별되어야 해요.

"인류 문화의 유전만이 가진 독특한 라마르크적 유전이 인간의 역사에 자연의 다윈적 진화에는 없는 방향성과 축적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310쪽)."


박테리아보다 더 작은 생물은 나타나기 어렵고 큰 생물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구조라면,

결국 인간은 탄생할 수 밖에 없는 존재 아닐까요?

그건 결과론에 불과해요.

"만약 추첨을 다시 반복하면 당첨 복권은 다른 집단에게 무작위적으로 돌아가고 전혀 다른 집단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301쪽)."


어쨌든 인간의 관점에서 진화란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당연한 것 아닐까요?

"인류의 출현은 복잡성을 향한 추진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예측 불가능한 과정에서 우연하게 발생한 영광스러운 사건이었다(302쪽)."

그러니까 우연은 필연과 구별되어야 해요.


이처럼 책 곳곳에 치밀함이 살아있어요.

반복해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5. 결론


인간이, 바로 내가 우연한 존재임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사실 이 책의 핵심주장은 그것이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우리는 예외적인 존재이고, 특이한 존재이며 우연적 존재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인간만이, 나만이 특별할 이유는 없잖아요.


"우수성은 특정한 점이 아니라 넓게 퍼져 있는 차이들이다. 그 범위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 중에는 우수한 개체도 있고 덜 적합한 개체도 있다. 우리는 변화로 가득 찬 각각의 자리에서 우수해지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하지만 이 사회는 끊임없이,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획일적인 평범함으로 이전의 빼어난 것들이 가졌던 풍요로움을 대체하려고 한다. 맥도날드가 지역식당을 밀어내고, 대형 슈퍼마켓 체인점들이 구멍가게들을 내쫓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변이와 다양성 전체를 자연의 현실로 이해하고 방어하는 것은 이러한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 진화하는 시스템에는 필수적인 원료인 다양성과 변이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322쪽)."


이미 고인이 된 지은이를 흠모하게 되는 책이에요.

강력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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