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크게 보면 1부에서 비난의 부정적인 면(비난사회), 1부에서는 비난의 긍정적인 면(공정사회)을 살펴본 후 3부에서 회복사회로의 이행을 희망하며 마무리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2.
1부는 ‘타인을 깎아내림으로써 우위에 올라서려는 심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세부적으로 1. 비난이 일상이 된 사회, 2. 언제, 어디에나 희생양은 존재한다, 3. 무분별한 비난이 경직된 사회를 만든다 3파트로 되어 있다. 1파트에서 심리학적 분석, 2파트에서 언론의 작동기제를 언급하고 3파트에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실제로는 각 파트별 내용이 혼재되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의도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유기적 연관성이 떨어지는 단편적 서술로 읽히다보니 집중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비난은 심리적인 ‘쓰레기 내버리기’라는 설명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30쪽). 내 마음의 짐을 덜기위해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현대사회에 비난이 폭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지쳤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에 쓰레기를 담아둘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자꾸 밖으로 쓰레기를 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난이 일상화되면 비난의 고유한 기능, 그러니까 수치심을 통한 도덕의 내면화라는 목표는 달성될 수 없게 된다. 순기능을 상실한 비난은 피해자를 양산하는 가해의 과정일 뿐이다.
현재 우리 이야기로 읽히는 대목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이슬람이 두 번째로 신도가 많은 종교인데도 무슬림이 일자리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주류 문화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무슬림은 무슬림 공동체를 형성해 그 안에서 정체성을 찾고 일자리 등의 사회적 지원을 구하게 된다. 그러면 무슬림 공포주의자들은 이를 무슬림이 프랑스 사회에 동화되기를 거부한다는 증거로 사용한다.”(79쪽)는 대목에선 파리 테러 사건이 떠오르고, “가장 가시적으로 잘못이 있는 사람을 지목해서 그에게만 비난을 쏟는 것은 재난의 재발을 막는 데 그리 효과가 없었다.”(83쪽)는 대목에선 세월호 사건이 떠오른다.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가 비난사회에 살고 있음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3.
2부는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비난의 순기능’인데 이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아쉽다. 왜냐하면 시민단체나 내부고발자의 비난이 사회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깨닫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1부에서 다루는 ‘비난’이 개인에게 향하는 감정적·구조적 배설의 문제라면, 2부에서 다루는 ‘비난’은 공정사회를 위한 도덕적 행위이자 저항의 문제로 양자가 개념적으로 명확히 구별되기 때문에 양자를 연속선상에 놓고 대비시키려는 지은이의 시도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지만 비난의 순기능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어왔으며, 그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례는 간직할만하다. 특히 쉽게 접하기 어려운 (영국 등 유럽중심의) 다양한 내부고발, 문화방해(문화방해가 무엇인지는 본문을 참조) 사례는 참고가 된다.
4.
3부는 비난의 최종 목표는 잘못을 바로잡는 데 있다는 내용을 다루며 ‘회복적 사법’을 얘기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대면함으로써 소모적인 비난이 아니라 진정한 사과와 용서를 통한 치유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진정한 회복은 진정한 사과를 전제로 한다. ‘비사과성 사과’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비사과성 사과는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이뤄지며,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다. 단어를 잘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뛰어난 비사과성 사과는 언어가 매우 능란하게 배배 꼬여 있다. ‘유감’이라는 표현이 ‘사과’나 ‘사죄’보다 많이 쓰인다.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 행위에 대해서는 ‘유감스럽지’ 않은 경우라 해도 그것이 일으킨 결과에 대해서는 ‘유감스러울’ 수 있다. 또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부당함을 암시하는 말도 덧붙인다. ‘누군가가 상처를 입었다면’, ‘실수가 있었을지도 모르나’, ‘나의 판단 중 일부가 잘못되었다면’과 같은 식의 소극적이고 조건부적인 표현은 가해자와 가해 행위를 분리한다.”(193-194쪽). 우리가 늘상 접해온 사과는 오히려 이런 것이 아니던가?
일본의 종군 위안부와 관련한 사과도 그렇다고 말한다. “말은 좋으나 이 사과에는 하나가 빠져 있다. 바로 배상이다. 그래서 많은 피해자들이 이것을 사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제적 압력이 쏟아지자 일본은 민간 기금을 구성해 보상하기로 했지만 피해자들은 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 국가의 책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직접 배상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위안부가 강제로 끌려왔다는 것을 입증하는 문서화된 증거는 없다며 고노 담화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의 상처를 다시 헤집었다.”(203쪽) 그리고 우리 박근혜 정부가 어떻게 처신했는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물론 “불완전할지언정 사과와 배상은 중요한 단계이며 사과와 배상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206쪽)는 말은 맞다. 하지만 불완전함의 정도도 문제가 된다.
개인과 사회의 파멸을 가져오는 비난사회가 아닌 회복적 사법으로 대표되는 회복사회로의 전환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에필로그를 통해 지은이는 말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비난문화를 회복문화로 바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함을 지적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저질러진 비난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5.
지은이도 고백하듯 “교과서처럼 종합적으로 다루었다고 자처할 수는 없”는 책이다.(9-10쪽) 번역이 괜찮았는데 옮긴이 후기가 없는 것은 아쉽다.
이 책을 읽은 후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 몫으로 남겨져있다. 표지처럼 멋지게 주먹을 불끈쥐고 시작해보면 어떨까? 책표지를 이렇게 활짝 펴놓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