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개정판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이현우(로쟈)의 인문학 서재였나?

한동안 이 책을 선물했다고 하길래 읽어봤다.

그 중에서 가장 분량이 길고 유명해보이는 글(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만 읽고 서평을 쓴다.



1.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복거일은 내 스승이다.”106

그리고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스승의 어떤 견해들은 때때로 나를 곤혹스럽게 한다...무엇보다도그런 견해가 복거일이 옹호하는 자유주의·개인주의에 치명적일 것이기 때문이다.”109

 

그러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낸다.109~116

자유주의자개인주의자.

시사인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열린사회와 그 적들로부터 굉장한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은 논의전개에 별 필요없어 보인다

인물과 사상에 실렸기 때문인 듯조선일보를 욕하기 위해 본다는 각주내용도 그렇고.

 


2.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는 이렇게 요약가능하다.

이 글은 복거일이 촉발한 영어공용어화’ 논쟁을 검토하려 쓴 것이다.

그 논쟁의 본질은 민족주의다.

언어든사회든 열려있어야 하는데 민족주의의 본질 중 하나는 닫혀 있음이다.


 

논쟁을 검토하기에 앞서 누락시킨 논점을 살펴본다.

먼저 일본의 번역작업을 살펴본다.123

일본제 한자어가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그 단어들을 일본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133

다음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유럽어를 살펴본다. 마찬가지로 번역의 중요성이 강조된다.135

한국어 문장의 시작은 번역문이었다.149

외래어가 됐든 번역투가 됐든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몰아내 한국어를 순화하겠다는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다.151


독일어.

순수한 독일어라는 우상과 환상.152

독일의 역사에서 민족주의의 기운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높아질 때마다 이 순수주의가 기승을 부렸다”156


영어.

오늘의 영어를 만든 너그러움’159


끝으로 일본어.

개방주의와 순수주의를 오락가락한 일본어166


가장 좋은 문화정책이 문화를 그냥 놓아두는 것즉 무책이듯가장 좋은 언어정책은 언어를 그냥 놓아두는 것이다.”175

이 한마디를 위해 50여페이지.

본문을 보완하는 의미는 적어 보인다.


 

3.

본래 논쟁으로 돌아오자복거일의 논점은 세가지.

첫째 머지않아 영어가 국제어가 되어 모든 사회의 공식언어로 쓰일 것이다

둘째 민족어들은 차츰 대중들의 삶에서 떨어져 박물관 언어가 될 것이다

셋째 인류의 표준 언어가 되어가는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

이에 대한 반박을 소개하며 재반박한다.

그 내용은 별로 재미가 없다.

 

지은이의 생각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은 이중언어 사용자가 되리라고 생각한다나로서는 민족어가 사라지는 상황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197

공용어로서의 영어를 반대한다는 것은지식과 정보를 특정집단이 독점하는 걸 허락하겠다는 뜻이다... 지식과 정보는 곧 권력이다.”205

 

동의할 수 없는 부분.

앞으로 머지않은 시기에영어를 쓰지 않고 민족어를 쓴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추방하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한국에서 복거일이라는 사람이 영어공용어론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그리고 그 제안이 커다란 비판에 직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그들은 몹시 의아스러워할 것이다.”196

 

이것은 복거일의 글인데,

한 쪽엔 영어를 자연스럽게 써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고 일상과 직장에서 아무런 불이익을 보지 않고 영어로 구체화된 많은 문화적 유산들과 첨단 정보들을 쉽게 얻는 삶이 있다.”181-182

 



4.

지은이는 자신의 논지를 일관되게 끌고 간다

극단적으로 보이지는 않고 나름의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인상적이다. 

문체도 담백하고 논리정연하다.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는 글쓴이의 주장에 동의할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인간은 원자화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 적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근본적인 지점에 동의하기 어렵다

어쩌면 이런 생각의 차이는 특별한 근거를 제시하기 어려운 편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어려우니까.

 

이 글이 쓰인 것은 IMF 직후글쓴이가 바라바지 않는 무한경쟁이 도입되는 시점이었다

검증되지 않은 세계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면 글쓴이와 같은 결론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그것을 도외시한 경쟁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아담스미스의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함께 고찰한 일본의 어느 교수가 떠오른다

조만간 그 책도 읽어볼 예정.

 



5.

그렇다면 영어공용화에 대한 내 결론은 무엇인가?


한번 식민지를 경험한 민족적 트라우마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일본어에 대한 적개심이 그대로 이어질 수 있다

적어도 우리세대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영어가 국제어가 될 거라는 낙관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인터넷을 통해 영어의 헤게모니가 단단해지는건 사실이지만스페인어중국어일본어한국어와 같은 민족어 역시 독자적인 영역을 더 단단하게 다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언어가 권력을 나눠가질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가 네덜란드나 홍콩같은 무역국가라면 영어공용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일지 모른다하지만 우리 생활에 꼭 영어가 필요하다고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영어공용화에 반대한다(찬성론의 전제가 틀렸으므로 결론도 틀렸다).

물론 사교육 시장을 바로잡고 한국말이 더 풍부해지며 보다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영어공용화일 필요는 없다. 

지은이는 권력의 균점을 말하는데 우리사회의 특성에 비추어 권력은 더 공고해질 가능성이 높다(예컨대 나중엔 라틴어 어원 알아맞히기 시험성적이 취업을 좌우하게 될지도 모른다).

 

끝으로 영어를 쓴다고 갑자기’ 세상 사람 모두가 친구가 되고 첨단 정보들이 쉽게 얻어지는 꿈 같은 일이 일어날까그렇다면 영어를 쓰는 수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사는 이유는 뭘까? 복거일의 이 주장은 정말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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