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  

 시에나 화파의 그림들과 마주친 때가 그런 버릇이 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처음에는 그 그림들에 ㅇ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 그림들에서 흔히 보이는 대칭적인 구도와 노골적인 시선이 무례하고 적대적으로 느껴졌다. 그 그림들은 내가 당시에 관심을 두었던 다른 그림들, 예컨대 벨라스케스, 마네, 티치아노, 세잔, 카날레토의 그림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낯설었다. 그 시에나파 그림들은 기독교적 관례와 상징이라는 은둔 세계에 속하는 것 같았다. 그 그림들이 기쁨을 주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의 의향을 거스르다시피 하면서 계속 그 그림들을 보러 갔다. 잠간 보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 그림들을 보면 내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그리고 해석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잔틴도 아니고 르네상스도 아닌 그 그림들은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조욜하는 휴식 시간처럼 악장과 악장 사이의 파격으로서 홀로 서 있었다.

 지난 사반 세기를 지나며 호기심은 더 깊어졌다. 그 그림들의 색, 섬세한 형태, 정지된 드라마가 점차 내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다...

p19

...그 장소로 인해 새로 만나는 건물이 새로 만나는 사람처럼 그때껏 우리 안에서 잠자고 있던 열정을 일깨울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우리는 건물이 일으키는 그런 변화를 대체로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그런 변화는 과정에서 일어나고, 많은 경우 상호적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받듯이, 방의 정취도 우리가 거기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표가 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라지지만, 아주 작은 그림자 같은 파편이 남는다. 그러지 않고서야, 끔직한 일이 일어났던 곳에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아름답고 고운 것에 쏟아진 관심을 오래 담았던 방에서 고요하게 고양되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숙소로 돌아갈 때마다 내 마음은 기대로 부풀었다. 시에나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시에나 어디를 가든 마치 비밀스러운 노래처러 그 방들이 주는 기쁨을 품고 다녔다.

 장식을 삼간 외부와 장려한 내부, 겉에서 보이는 침착한 초연함과 안에서 보이는 극직한 보살핌과 사려 깊음, 열렬한 심장을 감춘 겸손하고 또 절제하는 얼굴의 장난이 시에나의 관습이자 그 도시가 즐겨 펼치는 마술이다. 시에나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에는 놀래 주려는 욕구도 있지만, 내가 일찌감치 느꼈다시피, 문턱을 넘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변혁적일 수 있는지를 논증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다. 우리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건축물로 들어가거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가는 것으로 우리의 존재 의식이 얼마나 미묘하게 바뀌는지 같은 건 생각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대에 우리는 건축의 실용성을 과장함으로써 건축을 과소평가하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건축물을 인간의 삶이 형성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특정한 기능과 활동을 위한 장소로 생각한다. 시에나는 이에 저항한다. 띠처럼 이 도시를 둘러싼 방벽은 물리적 경계인 만큼이나 정신적 베일이기도 하다. 방벽은 그 자리에서 침략군을 막는 동시에 시에나의 자기감을 지킨다. 여기서 독립은 그저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자아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요청이자 자기 본성에 맞게 존재할 권리와 정신의 주권에 결부된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이다.

p22

 ...광장을 가로지르는 행위는 몇백 년이나 계속되는 춤에 동참하는 일이다. 완전히 홀로 존재하는 건 좋지 않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모든 고독한 존재에게 일깨워 주는 춤 말이다.

p24

...예술가가 원하는 바, 그 프레스코화를 그린 이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화가와 사진가가 원하는 바는 어쩌면 평면을 물리고 공간을 여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내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글자 그대로 프레스코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져버리는 사람을 떠올렸다. 우리는 그곳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거리는 각기 저만의 고유한 형태를 그렸다. 우리는 이슬람의 신성한 문양에 관해 얘기했다. 흔한 얘기지만, 서로 맞물리는 그 선과 형태에 홀려 바라보고 있으면 꼭 기도하는 기분이라고 말이다. 자주 입에 올리는 주제가 아니어서, 나는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하게 되다니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릴 때 만난, 성품이 섬세하고 온화하셨던 한 선생님 얘기를 했다. 유난히 말이 없는 분이셨는데 어느 날 내게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예컨대 골똘히 바다를 쳐다보는 것이 신을 찬미하는 것과 같다고 일러 주셨다.

p26

 말은 사상이다. 우리는 각 단어가 모순되는 사실들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각각이 제 뜻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영어 단어 '데몬스트레이션'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행진, 집회, 의견 천명이나 표현과 같은 공개적인 저항 행위를 지시하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드러내기 위한 보여주기, 명백하게 또는 분명하게 만들기와 관련된다. 아랍어 '무사하라', 페르시아어 '타사하라트', 프랑스어 '마니페스타시옹', 이탈리아어 '마니페스타치오네', 스페인어 '마니페스타시온', 언어적 뿌리는 다 달라도, 이 모두는 데몬스트레이션에 적어도 앞서 말한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나는 무언가를 분명하게 만드는 데 관계하고, 다른 하나는 거부에 관계한다. 다른 언어 몇 가지도 똑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너무도 자명한 이치인 듯하다. 무언가를 거부하려면 그것을 분명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같은 이유로, 나타내고자 하는 욕구는 망각에 대항하는 행위이자 공에 대한 저항이다. 스펙트럼의 양 끝에 예술과 죽음이 있는 것이다.

 로렌체티의 프레스코화를 읽는 한 가지 방법이 이 두가지 의미의 데몬스트레이션으로 읽는 것이다. 이 그림들은 칭송하고 비난한다.

p32

 ...이 프레스코화는 마치 민주적 통치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혹평하는 지점, 즉 그 기반이라 할 인간 본성에 대한 과장된 믿음과 공공선의 문제를 평범한 개개인이 가진 신뢰할 수 없는 모호한 내적 정신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점이야말로 이 체제의 강점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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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에서의 한 달
히샴 마타르 지음,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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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출신 작가. 의외로 그림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에나화파.

사전정보 없이 집은 작은 책인데, 내용은 컸다.

옮긴이주가 굉장히 친절하다.

그림 설명들이 꽤나 정치적이다.  

화자가 하는 이야기들을 따라 그림을 살피게 된다. 새로운 경험.

리비아에서 아버지가 실종되고 찾지 못한 작가.

작가가 그림에서 읽어낸 것들을 나도 느낄 수 있을까.

그림 안의 의미들, 이야기들을 알아보는 눈이 생길 수 있을까.

- 두초의 문

시에나로 가는 길이 좀 파란만장하구나.

작가가 보는 시에나화파의 그림들.

두초라는 화가의 그림

- 방의 형태

시에나는 차량진입이 제한된 도시구나.

시에나의 숙소, 광장. 보고 싶다.

- 머무는 곳

자유와 자기표현성

-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햇을 뿐이었던 그림에서 표정을 보고 의미를 찾게 된다.

- 갑옷, 무슨 갑옷?

그림에서 정치를 보네.

리바아출신의 화자에게 이 그림들의 의미는 더 복잡한듯.

아버지가 납치된 작가. 개인의 역사와 그림에서 나쁜 정치, 좋은 정치가 교차된다.

- 벤치

묘지의 벤치

- 흔적

음악, 이탈리아어 선생님. 아내의 목소리, 옛 기억

- 미술관 경비원들

시에나에 그림만 보러 간 게 아니고 홀로 애도하러,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아내려 간 것

- 푸른 리본

콘트라다의 아이, 푸른 리본, 분홍리본, 진정성, 인간적인 감정

- 앉기

신보다 인간의 삶에 큰 관심두는 그림

- 신앙의 문제

흑사병이 인간사회에 가한 변화. 역사, 사회학, 신앙, 의심

- 불

작가에게 시에나에서의 한달은 마침표 같은 쉼표였을까. 그런 시간을 나도 갖고 싶네.

- 터키식 목욕탕

친구 베아트리체의 욕실, 독립적인 유대감

- 천사의 곤경

어쩌면 이 작가가 본 그림들을 이 작가가 얘기한 것들을 떠올리며 다시 보고 싶노.

- 낙원

낙원보다 더 바라는 것은 알아봐지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은 개인사 때문인 것일까, 보편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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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  

 '몸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어긋나 있다면 다른 모든 부분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도널드 F. 페더스톤이 그의 책<dancing without danger>에서 언급한 이야기였다. 자유롭게 춤을 추기 위해서 신체의 정확한 선열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것. 그 말에 따라 늘 완벽한 자세 속으로 나를 밀어넣어왔다. 그런데도 나는 왜 춤을 추지 못하는 것일까?...  

p60

 아이들에게는 힘이 없다. 무언가를 똑바로 해내거나 이겨낼 수 있는 힘, 제대로 말하거나 알아들을 수 있는 힘이 매우 약하다. 아이는 어른처럼 제대로 이야기하기 어렵고, 알아듣기 어렵고, 바라보기 어렵다. 차츰 성장해감에 따라 똑바로 들을 수 있게 되고, 똑바로 말할 수 있게 되고,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어린아이에게 나타나는 사시 증상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의사가 말했다. 어린 시절에 말을 많이 더듬던 아이가 별다른 치료과정 없이도 나이가 들면 말을 더듬지 않게 되듯, 어린 시절 사시였던 아이 또한 자연교정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자연 교정이 되지 않으면 그때 수술을 받는 게 합리적이라는 이야기였다.

p63

 나는 너랑 있으면 마냥 평온해서 좋아. 나는 언제나 불처럼 타오르기만 했거든. 그렇게 위를 향해서만 날아올랐어. 그러려면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어. 잠시도 쉬지 않고 뛰어야만 했어. 그래야만 내 안에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오를 수 있었어. 나는 때때로 너무 힘들어. 너무 지쳐. 쉬고 싶은데, 쉴 수가 없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시키거나 명령하는 것도 아닌데 항상 그랬어. 그런데 너랑 있으면 아주 따스하고 평화로운 물속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어. 세계가 나를 안아주는 것만 같았어. 그럴 때면 나는 진짜로 실 수 있었어.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 스스로 너를 괴롭히지 않으면 좋겠어. 너에게 상처내지 않으면 좋겠어. 너를 예뻐해주면 좋겠어. 너는 정말 예뻐. 예쁜 사람이야. 그래서 내가 꽃 줬어.

p101

...왜,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해버리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일까? 이 모든 진짜와 가짜가 사실은 다 하나일 뿐이야. 한 가지에서 나오는 것이지. 변한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야. 나는 애초부터 이런 존재였다. 그런데 네가 나를 아름답게만 바라보고 있었잖아. 그것만이 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그것이 진실이라고 혼자 믿어버리고 있었잖아.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달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동시에 쓰고, 거칠고, 추악한 존재야. 한데 너는 언제나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았잖아. 네가 보고 싶은 대로, 네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바라보고 있었잖아. 나의 면에 감춰진 진짜를 보지 않고 있던 건 바로 너잖아. 그러니까 이건 네 잘못이야. 진실을, 대상을, 실상을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본 네가 아주 멍청했던 거야. 어리석었던 거야. 이게 '나'야. 진짜'나'야. 손은 일말의 죄의식도 없이,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한 위용을 뽐내며 내 숨통을 조여왔다.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너무 무섭고, 정말 죽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었다. 내 몸이, 나 자신이,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나에게는 그의 손으로부터 벗어나 그대로 죽고 싶다는 바람만 가득 차올랐다.

 p137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여자 중 그러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자신이 당한 일을 숨겨오기만 하다가, 누군가 먼저 이야기를 하자 마치 봇물이라도 터지듯 자기 안에 감춰둔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항상 감추어야 한다고 강요받은 이야기. 그리하여 평생 감춰온 이야기를 왜 이제야 토로하는지에 대해 오래 생각해 봐야만 했다.

.... 스님께서는 자비와 보시가 같으 의미이며, 자비에서 '자'는 사랑을 베푸는 것, '비'는 슬픔을 나누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좀 더 덧붙이자면 자는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어 타인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비는 타인이 슬픔과 곤경에 빠졌을 때 그것을 하께 나누어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햇다. 그리하여 자는 인간에게 행복을 가르쳐주고, 비는 불행을 없애준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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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주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2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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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가 주인공인줄 알았는데...상처입은 젊은이의 이야기가 주인공.

- 거북등

- 포인플렉스

발레동작들. 발레하는 사람은 손발이 크면 길어보여서 좋아하는구나. 발등고가 높아야 좋은거.

춤을 추진 못하고. 발등고를 보는 리나의 시선 때문에 다니는 무용원

- 아이

예체능 강사

뭐지 어릴 때 추행당한 경험있는 화자. 애들 지퍼내리다가 기억

- 꽃

전학생 리나 좋아하던 나(예정)은 왕따였구나. 신체적 특징이 놀림거리가 되고 다른 것이 놀림거리와 약점이 되는...그리고 어리면 그런 일이 성장, 성숙에도 문제가 되지...

사시. 리나가 사다주던 꽃. 친구. 우정. 다니던 무용원에서 가르치기.

- 재수없는 년

괴롭히는 남자애들에 대한 어른들의 반응 짱난다. 아이들에게 성범죄하는 것들은 정말 나쁘다.

어떤 말로도 커버칠 수 없는 일이다.

당한 아이들이 겪는 반응이 정말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주변의 반응도...나빠서라기보다 지켜주지 못한 무력함이 만들어내는 반응일테지만 그래도.

우리사회는 진짜 일반적으로 이럴 거같다.

그런 일로 한 인간의 삶이 주름져 버릴 수 있는 것인데...잊으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가 않지.

- 그랑주떼

사촌오빠의 손.

예정이는 왜 이런 일을 자꾸 겪고, 주변 어른은 왜 다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지.

트라우마로 남았구나.

리나는 거식증? 날아오르고 싶어서 가벼워지려고.

- 춤

리나한테 헤어지자고 했잖아...

나름 예정은 극복? 성장? 하는건가.

- 작가의 말

불편했던 이유가 나도 여자라서였을까

나도 말도 안괴게 그런 경우가 있다.

말을 해도 말을 안해도 감춰도 드러내도 상처로 남는 이야기.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는...

그런데, 진짜 슬픔이 나눌수록 줄어들까.

상처를 감춰둬도 잊혀지진 않지만 남들도 나와 같은 상처가 있다는게 공감과 동료를 만들어주진 하지만 상처는 결국 스스로 낫는게 아닐까.

이 이야기에서 토로되는 그 상처는 흔히 스스로를 괴롭힌다.

중요한 건 역시 내 탓이 아니라는 걸- 많은 일들이 그렇듯.

스스로 알고 그것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고 절망의 바닥으로 데려가서는 안된다는 것.

그걸 스스로 알고 나를 지켜내야지. 주변이 어떠한들.

내게 무슨 일이 있어도 중요한 건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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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4  

...마음은 요술쟁이이다. 몸은 환상의 성이고, 세계는 환상의 옷이며, 이름과 형상은 환상의 밤이다. 깨어나자, 꿈에 병이 나서 의사를 찾던 사람은 잠이 깨면 곧 병에서 벗어나게 된다.

p228

...그걸 선근마라고 한다. 자기가 하는 좋은 일에 너무 집착을 하면, 그 좋은 일도 자라지를 못하고, 수도에도 방해가 되는 법이다.

p253

 똑같은 물이지만, 젖소가 마신 물은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신 물은 독이 된다. 자기 심중의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 마신 빛은 그 사람의 가슴속에서 앙금 같은 어둠이 된다. 진성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의 안에 자리 잡은 논리가 세운 질서일 뿐이었다.

 ...진성은 열차 안에 실려 있는 한 점 어둠인 자기를 생각했다. 그녀는 자기를 모르고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어둠을 몰랐다. 대학 4년 동안 나는 무엇을 공부했을까. 대학에서 공부한 모든 것들이 설컹거리는 논리로만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서 아무런 뜻도 찾지 못한 지금 그것들은 한낱 어둠의 살을 구성하는 섬유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타의에 의해서 질질 끌려왔다. 자기는 없었고, 전혀 다른 인격체가 자기 속에 건설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방인의 몸 냄새를 풍겼고, 감당할 수 없는 빚이었고, 극복하거나 화해하지 않으면 두려운 존재였다.

 칸트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니체의 초인을 대면할 수 있게 된 것, 공자의 군자를 이해하게 된 것, 노자의 철인과 무위자연을 아는 체할 수 있게 된 것, 예수의 고민과 방황을 읽은 것, 인도의 위대한 왕자 싯다르타의 고뇌와 고행과 깨달음을 공부한 것, 현대 종교가 나아갈 길과 성직자들이 해야 할 일을 살펴본 것, 싱싱한 여자의 깊은 꽃살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소리치곤 하는 자연의 순리, 그 새빨간 행사의 생명력을 종교적으로 외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과 금기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이 몇 날 며칠 백야 속에서 꾼 백일몽처럼 그녀의 의식 속에서 자꾸 고개를 들고 허우적거렸다.

p301

 저는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저를 버리고 자기 갈데로 간 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누구든지 철들어 독립할 수 있으면 부모 밑을 떠나잖아요? 저는 그 사람이 저를 배반했다고 생각지 않고, 그런 만큼 증오하거나 저주하지 않아요.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배반감이란 기대치에 정비례하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누구에게 무슨 일을 베풀든지 애초부터 그 사람한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했어요. 베풀면서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돈을 꾸어 주고 나서 이자를 꼬박꼬박 챙기려는 돈놀이하고 같은 것이니까요.

 p317

 있는 것을 왜 없다고 하는가. 없다고 하면 없어지는가. 나는 '없다'는 거짓말에 걸려들어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있다고 우기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나 나름대로 달마 대사의 수염의 실체를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실체, 본연의 그것. 그렇지만 이것도 한낱 알음알이의 논리일 뿐이다. 그 논리 저쪽에 무엇인가가 있다.

 그게 무엇일까. 은선 스님은 나에게 바로 그것을 깨달으라고 그 화두를 내린 것이다. 나는 미친 바람 같은 이 무뢰한의 무슨 말, 어떠한 무례한 짓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나는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간에 나의 곧은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무소뿔처럼 절망하지 않고.

 "흥, 빌어먹을 년. 여기저기 떠돌아 댕기는 책 읽고, 이론적으로 알았다고......그래서 건방져 가지고 그 이론대로 이렇게 저렇게 하면 깨우치게 될 것이라고.....오냐, 잘 깨달아라. 니 멋대로 혼자서 부처님 잘 되거라." 

p383

 여기 남아 있는 네 혼령이 너의 진짜인지, 떠도는 네 몸뚱이가 너의 진짜인지, 그것을 알게 되면 네 속의 모든 번뇌 망상은 사라질 것이다. 그때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p390

... 땅 표면을 디딘 채 하늘을 머리에 이고 숨쉬던 것들의 혼령들이 마침내 그 어둠의 겉껍질이나 속껍질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게 아닐까.

 진성은 은선 스님의 거뭇거뭇해진 살갗과 눈자위와 볼에 앉은 검은 그늘을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둠이 어디 있고, 그것의 속껍질과 겉껍질이 어디 있으랴. 다만 시간이 있을 뿐이다. 없어지는 것과 앞으로 없어질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시간의 다리.

p391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얽매임으로부터 놓여나서 삶의 실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선과 악이 있고, 떠남과 머무름이 있고, 삶과 죽음이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놓여나라는 것이다. 선이 선 아니고 악이 악 아니면, 선이 악이고 악이 선인 것이며, 마침내는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우리의 실존 그 자체만 있는 것이다.

p397

 "법도를 따지고, 그 법도대로 하는 것이 다는 아니오. 법이라는 것도 한낱 방편일 뿐이오. 그걸 버리고 오욕의 진창에 떨어져 뒹굴다가, 법도 속에 있으면서도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깨달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구태여 법도를 버린 허물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막 들어섰을 때, 이 아이 몸에서 날아오는 진실의 냄새를 맡았어요. 이 아이는 자영이나 진성한테 결코, 뒤지지 않는 내 귀한 상좌요."

p414

 ...순녀는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인연과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줄을 생각했다. 지금부터 스무 해쯤 뒤에는 어렵지 않게 그 아이와 내가 만나게 될 것이다....바야흐로 얼굴에 주름살이 굵어지고 깊어지기 시작하는 나와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무슨 힘인가가 분명히 작용할 것이다.

p423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그 한 생각에 얽매여 평생을 헤매는 것은 고달픈 일이에요. 고달픈 자에게는 갈 길이 멀기만 하고, 잠 오지 않는 자에게는 밤이 길고 긴 법입니다. 이 보살님, 어서 미망의 껍질을 벗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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