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74
...마음은 요술쟁이이다. 몸은 환상의 성이고, 세계는 환상의 옷이며, 이름과 형상은 환상의 밤이다. 깨어나자, 꿈에 병이 나서 의사를 찾던 사람은 잠이 깨면 곧 병에서 벗어나게 된다.
p228
...그걸 선근마라고 한다. 자기가 하는 좋은 일에 너무 집착을 하면, 그 좋은 일도 자라지를 못하고, 수도에도 방해가 되는 법이다.
p253
똑같은 물이지만, 젖소가 마신 물은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신 물은 독이 된다. 자기 심중의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 마신 빛은 그 사람의 가슴속에서 앙금 같은 어둠이 된다. 진성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의 안에 자리 잡은 논리가 세운 질서일 뿐이었다.
...진성은 열차 안에 실려 있는 한 점 어둠인 자기를 생각했다. 그녀는 자기를 모르고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어둠을 몰랐다. 대학 4년 동안 나는 무엇을 공부했을까. 대학에서 공부한 모든 것들이 설컹거리는 논리로만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서 아무런 뜻도 찾지 못한 지금 그것들은 한낱 어둠의 살을 구성하는 섬유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타의에 의해서 질질 끌려왔다. 자기는 없었고, 전혀 다른 인격체가 자기 속에 건설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방인의 몸 냄새를 풍겼고, 감당할 수 없는 빚이었고, 극복하거나 화해하지 않으면 두려운 존재였다.
칸트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니체의 초인을 대면할 수 있게 된 것, 공자의 군자를 이해하게 된 것, 노자의 철인과 무위자연을 아는 체할 수 있게 된 것, 예수의 고민과 방황을 읽은 것, 인도의 위대한 왕자 싯다르타의 고뇌와 고행과 깨달음을 공부한 것, 현대 종교가 나아갈 길과 성직자들이 해야 할 일을 살펴본 것, 싱싱한 여자의 깊은 꽃살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소리치곤 하는 자연의 순리, 그 새빨간 행사의 생명력을 종교적으로 외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과 금기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이 몇 날 며칠 백야 속에서 꾼 백일몽처럼 그녀의 의식 속에서 자꾸 고개를 들고 허우적거렸다.
p301
저는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저를 버리고 자기 갈데로 간 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누구든지 철들어 독립할 수 있으면 부모 밑을 떠나잖아요? 저는 그 사람이 저를 배반했다고 생각지 않고, 그런 만큼 증오하거나 저주하지 않아요.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배반감이란 기대치에 정비례하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누구에게 무슨 일을 베풀든지 애초부터 그 사람한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했어요. 베풀면서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돈을 꾸어 주고 나서 이자를 꼬박꼬박 챙기려는 돈놀이하고 같은 것이니까요.
p317
있는 것을 왜 없다고 하는가. 없다고 하면 없어지는가. 나는 '없다'는 거짓말에 걸려들어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있다고 우기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나 나름대로 달마 대사의 수염의 실체를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실체, 본연의 그것. 그렇지만 이것도 한낱 알음알이의 논리일 뿐이다. 그 논리 저쪽에 무엇인가가 있다.
그게 무엇일까. 은선 스님은 나에게 바로 그것을 깨달으라고 그 화두를 내린 것이다. 나는 미친 바람 같은 이 무뢰한의 무슨 말, 어떠한 무례한 짓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나는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간에 나의 곧은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무소뿔처럼 절망하지 않고.
"흥, 빌어먹을 년. 여기저기 떠돌아 댕기는 책 읽고, 이론적으로 알았다고......그래서 건방져 가지고 그 이론대로 이렇게 저렇게 하면 깨우치게 될 것이라고.....오냐, 잘 깨달아라. 니 멋대로 혼자서 부처님 잘 되거라."
p383
여기 남아 있는 네 혼령이 너의 진짜인지, 떠도는 네 몸뚱이가 너의 진짜인지, 그것을 알게 되면 네 속의 모든 번뇌 망상은 사라질 것이다. 그때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p390
... 땅 표면을 디딘 채 하늘을 머리에 이고 숨쉬던 것들의 혼령들이 마침내 그 어둠의 겉껍질이나 속껍질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게 아닐까.
진성은 은선 스님의 거뭇거뭇해진 살갗과 눈자위와 볼에 앉은 검은 그늘을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둠이 어디 있고, 그것의 속껍질과 겉껍질이 어디 있으랴. 다만 시간이 있을 뿐이다. 없어지는 것과 앞으로 없어질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시간의 다리.
p391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얽매임으로부터 놓여나서 삶의 실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선과 악이 있고, 떠남과 머무름이 있고, 삶과 죽음이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놓여나라는 것이다. 선이 선 아니고 악이 악 아니면, 선이 악이고 악이 선인 것이며, 마침내는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우리의 실존 그 자체만 있는 것이다.
p397
"법도를 따지고, 그 법도대로 하는 것이 다는 아니오. 법이라는 것도 한낱 방편일 뿐이오. 그걸 버리고 오욕의 진창에 떨어져 뒹굴다가, 법도 속에 있으면서도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깨달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구태여 법도를 버린 허물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막 들어섰을 때, 이 아이 몸에서 날아오는 진실의 냄새를 맡았어요. 이 아이는 자영이나 진성한테 결코, 뒤지지 않는 내 귀한 상좌요."
p414
...순녀는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인연과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줄을 생각했다. 지금부터 스무 해쯤 뒤에는 어렵지 않게 그 아이와 내가 만나게 될 것이다....바야흐로 얼굴에 주름살이 굵어지고 깊어지기 시작하는 나와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무슨 힘인가가 분명히 작용할 것이다.
p423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그 한 생각에 얽매여 평생을 헤매는 것은 고달픈 일이에요. 고달픈 자에게는 갈 길이 멀기만 하고, 잠 오지 않는 자에게는 밤이 길고 긴 법입니다. 이 보살님, 어서 미망의 껍질을 벗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