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2
...뭔가 잘못된 점이 보이고, 안 좋은 점이 보였을 때 빠르게 정리하고 새로운 것을 취해야 성장하는 법이다. 일할 때 두되의 역량을 풀가동시키기 위해, 내 사생활에선 대체로 뇌를 내려놓고 사는 경향이 있었고, 나의 개인적 범주에 들어온 것들에는 정을 주어 잘 정리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기 손에 쥐고 있는 걸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나의 경우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그 편안함이 좋아서, 특히 나의 소중한 시간을 들여 쌓아온 인간관게에 대해서는 더더욱, 정말 최악이 아닌 한 그대로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오본휘라면, 내가 살아오며 자의로 쌓아 올린 관계 중에 내가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 그 시간과 노력의 양을 생각하면 실패해서는 안 되고, 실패할 수도 없는 존재.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패착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나에게 오본휘란, 너무 편해 서로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어도, 그의 생각이 다 읽히는 그런 존재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었으니.
p104
모든 결정에는 내가 먼저여야 한다. 이 진리를 나는 너무 늦게 깨우쳤다. 상대방 때문에, 상대방을 위해서, 상대방에 의해서 만나서는, 특히 결혼이라면 안 된다. 결혼은 자원봉사가 아니다. 누군가 나의 도움이 필요해 나에게 부탁을 하고, 그 사람이 안쓰러워 보여서, 혹은 내가 상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해서 상대의 뜻을 따르는 쪽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연애도 그러하지만, 결혼이라면 더더욱 나의 삶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결정이다. 온전히 상대방과 내가 잘 맞아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 이 사람과 함께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나도 상대에게 그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남은 생애를 더 가치 있고 후회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려해야 한다. 나를 위해, 내가 주도권을 쥐고 결정하여야 한다.
남에게 해가 되어서도, 폐를 끼쳐서도 안 된다고 배웟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주변과 같이 가는 삶, 양보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교육받고 자라는 동안 나는 공격성과 결단력을 기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렸을 때 부터 나와 동생은 늘 후원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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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쓸데없이 정이 너무 많았고, 내 것을 아끼지 않았는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부류의 사람을 만나는 동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금씩 배울 수 있었다. 마음이 약하고 정이 많다는 게 곧 호구를 의미하는 세상에서 나는 너무 타인 중심적인 삶을 살았다. 베푸는 삶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내게 여유가 있어야 하고, 어머니의 가르침은 내가 그런 지위에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 험한 세상에 맞서 싸울 만큼 나는 단단하지 않았고, 여유가 없었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먼저 챙겨야 하는데,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사람은 닥 부러져야 할 때는 그럴 필요가 있다. 끊어내고 거절해야 할 때는 특히 그 결정이 나에게 피해가 될 때는 좀 더 단호하게 내가 중심이 되는 결정을 밀어붙일 힘을 길러야 한다. 나는 슈퍼맨이 아니다.
사람을 불쌍해서 만나는 건 아니다. 특히 내 반려자가 될 사람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 불쌍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간 되려 내가 불상해질 수 있다. "물에 빠진 놈 건져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고 했다. 문구 하나가 선조 때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데에는 많은 사람의 인생 경험이 묻어 있는 것이니 곰곰이 생각해 보고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스스로 내 결정이 너무 이르고, 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으면 멈춰야 했다. 인생은 나의 선택의 집합체이니 어쭙잖은 동정심에 '지 팔자 지가 꼬는' 그런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p127
...남녀가 같이 뚜렷한 직업이나 일이 없이 은퇴 이후 30년가량을 계속 같이 지내며 아내만 가사를 부담한 경우, 아내의 스트레스는 남편에 비해 세 배 이상에 달하고, 우울감은 약 두 배 높다고 한다.
p144
살다가 무슨 ㅇ리이든 부모님이 극강으로 반대하신다면 다시 원점에 두고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알고 있던 것이고, 살면서 여러 번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막상 그 상황에 처하니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부모님을 꺾었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위하는. 본인들보다 내가 더 잘되길, 진심으로 내가 행복하길 바라는 이 세상에 유일한 두 사람.
p240
...예단이란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라 하여 신랑이 집을 하는 경우 신부가 보내는 그 10% 정도에 해당하는 현금을 일컫는다고들 한다. 그땐 시랑 부모가 꾸밈비로 그 절반을 신부에게 다시 보내는 것이라고 하니 번거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관례였다.
p255
아무 일도 없는 평시에는 서로 다른 시공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도 평온을 깨트리는 이례적인 사건 하나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다른 하나가 딸려 온다. 그렇게 그 뿌리를 향해 계속 가다 보면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던 너무 많은 것들이 근원이 되는 문제 하나를 둘러싸고 촘촘히 연결되어 있음에 놀라곤 한다.
p263
...사람 간의 관계에서 과도한 저자세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잘못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상대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본인에게 저자세로 다가오는 사람은 더욱 만만하게 보고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겸손하고 예의는 지키되, 내가 잘 모르는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고자 한다면 그렇게 먼저 굽실굽실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예비 시어머니라는 지위는 한국 사회에서 양육되어 사회적 관습에 물들어 있는 나에게는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을 뛰어넘는 특수한 자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기꺼이 자청하여 캔 깡통에 찌그러져 들어가 언제든 포크로 지르면 찔릴 고유의 향을 잃은 통조림 복수아가 되어가고 있었다.
p206
대화란 입으로 전하는 언어의 내용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빛, 말의 속도, 표정, 말투, 추임새, 고개 움직임을 포함한 행동, 자세 그 모든 것에 녹아 있는 태도가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들끼리도 마음을 전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도, 같은 문화권에서 살며 서로 같은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편함을 주고 마음이 닫히는 이유도 같은 원인에 기인한다.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는 화자를 둘러싼 공기의 온도를 좌우하고 이러한 미묘한 기류는 단어와 문장의 사전적인 의미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p325
.... 네가 기억하는 게 없는 건 나는 너를 그렇게 막 대해본 적이 없어서라고.
결혼을 일찍 햇던 누군가가 말했다. 시가에서 들은 상처 되는 말엔 방부제가 있어서 썩지도 않고 계속 그 자리에 그대로 남는다고.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p336
결혼을 할 거라면 먼저 나를 제대로 알고, 배우자 고르는 눈을 길러야 한다. 워런 버핏이 말했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이라면 본디 본받을 것이 있는 사람이어야 버틸 힘이 나겠지. 외모 보는 거 아니다. 언제나 늘 당연하게 "남자는 외모지."라고 외쳤던 과거의 나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20대로 돌아간다면, 여동생이 있다면 그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런 언니가 내 주변에도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듣지 않았다....
p344
...리서드 탈러와 캐스 선스타인이 말했듯, "관련된 이익이나 손해가 클수록 우리에게 연습할 기회란 더욱 적게 주어진다."결혼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햇던 어떤 결정보다 더 큰 영향을 가져올 이 결혼을 연습해 보기란 쉽지 않다.
연습을 해볼 수 없으니, 분석이라도 해야 한다. 아직 죽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사전 부검이 필요하다. 내 인생에 무엇인가 잘못된다면, 그 원인은 잘못된 결혼일 것이다. 35년간의 내 삶을 바탕으로 판단해 보건대, 지금까지 멀쩡했던 그리고 크게 잘못될 일 없는 이 커리어, 원 가족, 혹은 친구 무엇도 내 삶에 이렇게 부정적 영향을 준 적이 없었다. 나를 흔들어 놓았던 것은 남자. 이성을 보는 눈이 없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의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내기 전 그와의 결혼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스무 번쯤 돌려보았다. 감정적으로 결혼 결정 자체를 내리기 전에 사전 부검을 진행했어야 햇는데, 여러 경고 사인을 접하고 나서야 뒤늦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와의 결혼이 실패로 끝난다면, 유별난 어머니, 어른이 되지 못한 그, 그리고 그 점을 받아넘길 수 없는 나의 조합이 그 원인이 되리라는 것이 명백했다.
p357
전체 국토면적 0.6%를 차지하는 서울에 전체 인구 20%가 밀집되어 있다. 이는 전 세계 5대 도시인 런던, 도쿄, 파리, 뉴욕, 베이징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이다. 서울 근교 수도권에만 대한민국 전체인구 50%이상이 거주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비정상적으로 높은 인구 밀집도,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끝없는 경쟁과 줄 세우기, 높은 집단 내의 상호작용, 그에 비례해 높아지는 Peer Pressure와 사회적 비교, 평판과 남의 시선을 중시하는 문화, 그리고 매우 높은 IT보급률로 인해 더 가속화되는 정보교류. 그 모든 것들에 기해 불안과 스트레스에서 자유롭기 힘든 대한민국에 살면서, 또다시 사회적 시선을 고려해 치료까지 받지 않은 채 질환을 방치하니 높은 자살률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p360
...처음부터 존경할 수 있는, 닮고 싶은 사람을 만나자.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 함게 살아갈 배우자의 태도, 인성, 가치관, 그 모든 것들은 무엇보다 더 강하게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인격이 형성되는 10대 미만의 청소년이라면 모를까. 30대가 넘어 이미 머리가 클 대로 큰 어른의 근본이 변하는 일은 없다. 그저 목적달성을 위해 잠시 가면을 쓸 뿐.
p369
내 인생의 키를 제 3자가 쥐게 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결정권을 남에게 맡겨두고 권한 없이 그저 따르다. 그 배가 난파되면 원망할 새도 없이 그저 가라앉아 죽는 것밖에는 남은 옵션이 없다.내 인생은 온전히 내 것이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잘못되엇을 때 내가 아니라 남 탓을 하는 것만큼 초라한 것은 없다. 다시는 제 인생에 대한 중대한 결정조차 남을 따르고 "너 때문에."라고 부르짖는 비참한 순간이 오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중요한 결정은 내가 내려야 하고 한시라도 판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p370
...내 삶에서 편안한 공간을 벗어나 새롭게 성장하는 대신, 그의 결정을 따라 그가 하자는 대로 결혼을 통해 사생활에 변화를 주어 인생의 단계를 쉽게 전환시키려 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 나는 새로운 도전에 따라올 험난한 가시밭길이 두려웠고, 비겁하게도 그의 뒤에 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결혼을 통해 그저 더 편안한 길을 가고 싶었던 거시앋. 적당히 그럴듯한 구실을 더할 수 있는 기제를 마련했으니 스스로와 타협하고, 사회적인 나는 그대로 내려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쉽고 안락해 보이던 기릉ㄴ 곧 내가 녹아내리는 길이었다. 내가 내 힘으로 얻지 않은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인생에 공짜는 없고 쉽게 주어지는 건 결국 가치가 없는 것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