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
시에나 화파의 그림들과 마주친 때가 그런 버릇이 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처음에는 그 그림들에 ㅇ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 그림들에서 흔히 보이는 대칭적인 구도와 노골적인 시선이 무례하고 적대적으로 느껴졌다. 그 그림들은 내가 당시에 관심을 두었던 다른 그림들, 예컨대 벨라스케스, 마네, 티치아노, 세잔, 카날레토의 그림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낯설었다. 그 시에나파 그림들은 기독교적 관례와 상징이라는 은둔 세계에 속하는 것 같았다. 그 그림들이 기쁨을 주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의 의향을 거스르다시피 하면서 계속 그 그림들을 보러 갔다. 잠간 보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 그림들을 보면 내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그리고 해석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잔틴도 아니고 르네상스도 아닌 그 그림들은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조욜하는 휴식 시간처럼 악장과 악장 사이의 파격으로서 홀로 서 있었다.
지난 사반 세기를 지나며 호기심은 더 깊어졌다. 그 그림들의 색, 섬세한 형태, 정지된 드라마가 점차 내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다...
p19
...그 장소로 인해 새로 만나는 건물이 새로 만나는 사람처럼 그때껏 우리 안에서 잠자고 있던 열정을 일깨울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우리는 건물이 일으키는 그런 변화를 대체로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그런 변화는 과정에서 일어나고, 많은 경우 상호적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받듯이, 방의 정취도 우리가 거기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표가 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라지지만, 아주 작은 그림자 같은 파편이 남는다. 그러지 않고서야, 끔직한 일이 일어났던 곳에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아름답고 고운 것에 쏟아진 관심을 오래 담았던 방에서 고요하게 고양되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숙소로 돌아갈 때마다 내 마음은 기대로 부풀었다. 시에나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시에나 어디를 가든 마치 비밀스러운 노래처러 그 방들이 주는 기쁨을 품고 다녔다.
장식을 삼간 외부와 장려한 내부, 겉에서 보이는 침착한 초연함과 안에서 보이는 극직한 보살핌과 사려 깊음, 열렬한 심장을 감춘 겸손하고 또 절제하는 얼굴의 장난이 시에나의 관습이자 그 도시가 즐겨 펼치는 마술이다. 시에나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에는 놀래 주려는 욕구도 있지만, 내가 일찌감치 느꼈다시피, 문턱을 넘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변혁적일 수 있는지를 논증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다. 우리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건축물로 들어가거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가는 것으로 우리의 존재 의식이 얼마나 미묘하게 바뀌는지 같은 건 생각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대에 우리는 건축의 실용성을 과장함으로써 건축을 과소평가하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건축물을 인간의 삶이 형성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특정한 기능과 활동을 위한 장소로 생각한다. 시에나는 이에 저항한다. 띠처럼 이 도시를 둘러싼 방벽은 물리적 경계인 만큼이나 정신적 베일이기도 하다. 방벽은 그 자리에서 침략군을 막는 동시에 시에나의 자기감을 지킨다. 여기서 독립은 그저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자아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요청이자 자기 본성에 맞게 존재할 권리와 정신의 주권에 결부된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이다.
p22
...광장을 가로지르는 행위는 몇백 년이나 계속되는 춤에 동참하는 일이다. 완전히 홀로 존재하는 건 좋지 않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모든 고독한 존재에게 일깨워 주는 춤 말이다.
p24
...예술가가 원하는 바, 그 프레스코화를 그린 이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화가와 사진가가 원하는 바는 어쩌면 평면을 물리고 공간을 여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내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글자 그대로 프레스코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져버리는 사람을 떠올렸다. 우리는 그곳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거리는 각기 저만의 고유한 형태를 그렸다. 우리는 이슬람의 신성한 문양에 관해 얘기했다. 흔한 얘기지만, 서로 맞물리는 그 선과 형태에 홀려 바라보고 있으면 꼭 기도하는 기분이라고 말이다. 자주 입에 올리는 주제가 아니어서, 나는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하게 되다니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릴 때 만난, 성품이 섬세하고 온화하셨던 한 선생님 얘기를 했다. 유난히 말이 없는 분이셨는데 어느 날 내게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예컨대 골똘히 바다를 쳐다보는 것이 신을 찬미하는 것과 같다고 일러 주셨다.
p26
말은 사상이다. 우리는 각 단어가 모순되는 사실들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각각이 제 뜻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영어 단어 '데몬스트레이션'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행진, 집회, 의견 천명이나 표현과 같은 공개적인 저항 행위를 지시하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드러내기 위한 보여주기, 명백하게 또는 분명하게 만들기와 관련된다. 아랍어 '무사하라', 페르시아어 '타사하라트', 프랑스어 '마니페스타시옹', 이탈리아어 '마니페스타치오네', 스페인어 '마니페스타시온', 언어적 뿌리는 다 달라도, 이 모두는 데몬스트레이션에 적어도 앞서 말한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나는 무언가를 분명하게 만드는 데 관계하고, 다른 하나는 거부에 관계한다. 다른 언어 몇 가지도 똑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너무도 자명한 이치인 듯하다. 무언가를 거부하려면 그것을 분명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같은 이유로, 나타내고자 하는 욕구는 망각에 대항하는 행위이자 공에 대한 저항이다. 스펙트럼의 양 끝에 예술과 죽음이 있는 것이다.
로렌체티의 프레스코화를 읽는 한 가지 방법이 이 두가지 의미의 데몬스트레이션으로 읽는 것이다. 이 그림들은 칭송하고 비난한다.
p32
...이 프레스코화는 마치 민주적 통치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혹평하는 지점, 즉 그 기반이라 할 인간 본성에 대한 과장된 믿음과 공공선의 문제를 평범한 개개인이 가진 신뢰할 수 없는 모호한 내적 정신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점이야말로 이 체제의 강점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