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 Just Stories
박칼린 지음 / 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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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군가 나에게 안부를 물어오면, 나의 대답은 “뭐, 그냥 그렇죠.”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웃으며 대답하지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는 나의 삶을 다시 한 번 확인 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속으로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짜증만 낸다. 그러면서 또 다른 누군가가 똑같이 물어 올 때마다 똑같은 대답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무의미한 반복만 계속하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짜증만 내고 마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이미 답은 나와 있는데, 나의 게으름이 인정하기 싫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남자의 자격 - 하모니 편」을 보면서 즐거움과 감동을 함께 느꼈지만, 그에 못지않게 반가운 만남이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과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평소 이상적인 리더십을 생각하면서 부드러움과 강한 카리스마의 공존을 생각했지만, 현실에서 찾기란 쉽지 않았고, 혹은 현실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직접 이렇게 마주할 수 있게 되니 반가우면서도 얼마나 낯설게만 느껴지던지… 비록 TV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박칼린’이라는 인물과의 만남은 나에게 있어서 아주 반가우면서도 낯선 경험이었다. 눈빛만으로도 누군가를 압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사랑합니다!’라는 말과도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그런 모습이 사실은 오랜 시간 동안의 열정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오랜 열정과 노력이 오늘날 많은 이들이 ‘워너비’라 칭하는 그녀를 만든 것이라 생각하지만, TV를 통한 짧은 만남이라 그런지 구체적으로 그 열정과 노력들이 만져지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그녀에 대해 더 궁금해지고, 계속해서 어떤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만져지지 않던 그 모습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박칼린, 그녀가 많은 이들 앞에 내놓은 『그냥』이라는 책을 통해서 말이다. 

 박칼린이 쓴 책이 나왔다고 해서 반가웠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남자의 자격」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만나기 전까지 전혀 알지 못하던-적어도 나는 그랬다- 인물이 이제 좀 인기를 얻고 나니, 각종 프로와 CF에도 출연하고 결국에는 책까지 출판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뭔가로 인해서 한 번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 뽕을 뽑는구나,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처음에는 관심 있게 바라보던 이 책, 『그냥』도 차츰 시큰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나의 삐뚤어진 시선에 사로잡힌 오해였을 뿐이었다. 『그냥』은, 최근에 얻게 된 그녀의 인기와는 상관없이, 그녀가 그동안 준비해온 그녀만의 이야기,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도 혹시나 했지만, 「남자의 자격」과 관련된 이야기는 책의 제일 마지막부분에 짧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TV를 통해서 얻은 최근의 인기를 그대로 몰고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남자의 자격」이야기가 책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서 TV가 끼친 영향은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온 삶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만큼 그녀의 이야기는 인기와는 상관없는 인간 박칼린의 깊은 향기를 담고 있었다

 『그냥』은 그녀의 어릴 적 기억과 추억을 시작으로 지금의 그녀가 있기까지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담아놓은 책이다. 그녀가 바라보는 사람과 세상을 이야기하고, 삶의 활력소가 되는 여행을 이야기한다. 그녀 삶의 소소한 것들에서 얻는 즐거움들을 이야기하고,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서서히 그녀의 삶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누군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부러움을 느끼다가, 그 부러움이 감탄으로 바뀌고, 때로는 그것이 질투로 바뀌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 사람이 겪었던 수많은 고통과 노력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당연히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내가 그런 상황이었더라도 그러고 말았을 거라는 오만으로 사로잡힌 생각을 하게 된다. 단지 그 사람은 ‘운 좋게’도 그런 상황이 닥쳤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는 어이없는 생각으로 말이다. 말도 되지 않는 질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생각-혹은 질투-은 『그냥』을 통해 박칼린이 이야기하는 ‘3일 또는 100번’이라는 개념을 한 번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쉽사리 깨지게 된다. 그녀는 평탄하지만은 않은 그녀만의 환경 속에서 ‘3일 또는 100번’을 행동으로 옮기는 삶을 살았으니까 지금의 이런 멋진 삶이 있는 것이고, 반면에 나는, 견디기 힘들었던 많은는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 ‘3일 또는 100번’이라는 개념은커녕 이런저런 핑계만을 가져다 붙이고 있었기에 지금의 ‘그냥’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는 완벽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후회 없는 노력, ‘3일 또는 100번’을 다짐한다. 그녀가 그랬듯이…

세상에…… 운명에게 그냥이란 없다. 

곧 죽는다 하여도 그냥으로는 살지 말지어다. - P83

나는, 내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를 생각해 본적이 있었던가, 그들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항상 최고이기만을 바라면서도 최선의 선택을 위해 노력 한 적이 있었던가, 를 떠올려본다. 이제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내가 아닌, 새로운 모습을 나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이다. 물론, ‘그냥’ 그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 한두 가지가 아닌 필요한 것을 찾기에 앞서서 적어도 ‘그냥’ 그런 삶은 살지 말아야겠다는,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았던 다짐을 해본다. 그래, 운명에게 ‘그냥’ 이란 없는 것이다.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하고 있는 일에 감동을 받기를 바란다. 

그 세포들이 지지고 볶으면서 거대한 에너지가 발산되기를 바란다. 

내가 선택한 일과 그것을 위해 최고와 최선이기를, 

그것들을 위해 불타오르기를 바란다. - P259

‘그냥’이라는 말로 내가 가장 확실하게 얻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열정’이다. 박칼린이라는 인물을 알게 되고, 그녀를 알아가면서 느낀 많은 것들, 그녀가 ‘그냥’이라고 표현했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열정’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다가온다. 내가 원했던 삶, 그게 무엇이든, 그것은 열정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가슴으로 느낀다. 그리고 이제 내 삶의 가장 뜨거운 곳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그러고는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다. 이전의 ‘그냥’ 그런 삶이 아닌, 열정이라는 것이 그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그냥’ 그런 나의 삶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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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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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왜 그토록 당당한가!?

 

 세계 초일류국가가 되어야 한다며, 강하고 위대한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며, 국민들에게 그 길을 함께 가자는 대통령 후보가 있다. 반면에, 그것은 누구를 위한 대한민국이냐, 며 반문을 하며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를 이야기하고, 삶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나라를 이야기 하는 대통령 후보가 있다.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는 그 어느 나라보다 앞서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초일류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허상에 가까운 경제 수치보다는 국민 삶의 가치가 우선시되는 발전이 필요하다는 주장. 만약 저 두 명의 후보 중 한 명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물론, 이 가정은 요즘 방영되고 있는 「대물」이라는 드라마 속 캐릭터가 하는 주장에서 따온 것에 불과하지만, 결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갈만한 문제는 아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이제는 드라마가 아닌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뉴스에서 접했던 사실을 이야기 해볼까?!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 후 머물 사저 경호시설 건립비로 100억 원대의 예산을 책정하고 청구했다는 기사를 봤다. 물론, 국회에서 부지 매입비 70억 가운데 30억을 삭감하고 40억 원만 통과시켰지만, 예비비로 보충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달았다고 하니 그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고… 암튼, 그 비용도 비용이지만, 이런 누가 봐도 황당한 국고의 사용에 소위 말하는 메이저 언론에서는 입 다물고 있다는 사실에 어떤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언젠가 -이제는 고인이 된- 노 전 대통령의 경우 지금의 1/3 정도의 비용으로, 물론 그것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무슨 아방궁을 짓는다는 둥 난리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쯤 되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조금은 눈치 챘으리라 생각한다. 초일류국가, 강한나라 대한민국을 외치지만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고, 분명 잘못된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그 기준이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더불어, 결국에는 특정한 누군가,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소수의 누군가를 위해 이 사회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저 꼭대기에 있는 그들을 제외한 우리는 그들을 결코 막지 못하고 있으며, 그럴 생각도 크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토록 당당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쪼그라들어간다. 왜 일까?! 

 

 - 지금 우린 어디에 서있는가?! 

 

 오늘도 TV뉴스에서 우리 지역 고등학교에서 서울대 합격을 한 학생이 몇 명이며, 작년에 비해서 몇 명이 증가했다느니 하며 주절거린다. 또 다른 뉴스에서는 우리나라 교육이 문제라고 외치면서, 또 이런 뉴스는 뭐란 말인가?! 싫다고 하면서도, 이런 줄세우기식 교육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이러한 정치 혐오는 실상 혐오스런 정치를 

계속 혐오스런 상태로 있게 하는 강력한 정치적 힘이다.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혐오스러운 정치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가 바꿀까.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남이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 P182

얼마 전 국회에서 새해 예산안 날치기 통과를 했다. 국회는 폭력사태로 얼룩졌고, 여당과 야당은 여전히 날을 세운 채 서로 으르렁 거린다. 언론들은 이때다 싶어 ‘양비론’을 들고 나온다. 둘 다 잘못 한 것은 맞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둘 다를 욕하며 “그런 더러운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라고 다짐하며 스스로의 권리를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길거리를 가다가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등록금 인하를 외치는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 “저것들 또 시끄럽게 지랄이네!”하며 욕하며 지나가는가?! 그런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위치는 어디인가?!”라고. 당신, 혹은 당신의 가족, 친구 중 누군가는 노동자이며, 누군가는 학생이다. 그들이 외치는 주장들이 결국에는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되는가?! 그들만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런 생각들은 돈을 가지고,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말해볼까?! 내가 사는 대구. 아시다시피 한나라당 텃밭이다. 서민 경제가 좋지 않다 어쩌고저쩌고 이야기를 하면서, 왜 부자들의 당에 자꾸만 투표를 하는 것인지. 솔직히 내가, 소위 말하는 가진 자라면, 나의 이익을 대변하는 그 부자당에 투표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나의 이익을 대변하는 다른 당에 투표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과는 상관도 없는 당에 왜 자꾸 “그래도 대구니까!”라는 정신 나간 생각으로 투표를 하는 것인지. 설마 그들이 말하는 ‘서민, 서민, 서민’을 믿는 것인가?! 

 

 - 다시, 그들은 왜 그토록 당당한가!?

이것이 ‘미친 교육’의 실상이다. 즉,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부하면서도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는 자기 생각과 논리가 없어 

지배세력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사회구성원을 양산하는. - P43

이제, 처음 던졌던 “그들은 왜 그토록 당당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당당한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뻔뻔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답… 그저 그들이 하는 대로 그들이 알려준 대로 받아들이고 수긍하는 자세가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미친 교육’의 결과로 나온 무조건 수긍하는 자세 말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고, 사회에서 배운 것들이,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뜻은 단순명료하다. 

자본가는 자본가의 일상과 이해관계에 따라 자본가 의식을 갖고, 

노동자, 농민은 노동자, 농민의 일상과 이해관계에 따라 

노동자, 농민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 P74

앞서 언급한 이런 다양한 문제들은 적어도 자신의 위치만 제대로 생각하고 행동만 하더라도 지금의 이런 사회에서는 조금 벗어나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일만 제대로 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정도로는 여전히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그 부족함을 『생각의 좌표』에서 보다 명확한 이야기, 아니 단 한 줄의 질문으로 채워준다.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라는 질문으로 말이다.

내 안에 있던 인간과 국가가 부서졌다. 졸지에 고아가 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어린 고아였다. 

우선 내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했다. 

나는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가, 왜 하필 여기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다음 문제였다. - P214

어느 한 순간-실제로는 고통스럽게도 길었던- 방향을 상실하게 된다. 방향의 상실 이후에는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 싸움의 시작에 있는 것이 “나는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가, 왜 하필 여기인가.”라는 자기 성찰,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정치, 종교, 교육, 사회문제 등 여러 곳에서 이미 ‘의식화’를 당했고, 당하고 있다. 세상을 돌리는 것은 나이지만, 내가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저 내가 돌리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은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고, 다행스럽게도 그 실마리를 이 책, 『생각의 좌표』에서 만날 수 있다. 

 

 『생각의 좌표』는 내 생각은 나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단순히 그런 문제제기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실마리까지 제시한다.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작은 실마리를 말이다. 지금껏 세상이 심어놓은 가치와 기준에서 벗어나는 ‘탈의식화’를 꾀해야 한다는… 그 실마리는 이제 주어졌고, 이제는 그것을 잡고 놓치지 않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그 길이 외로울 것이라 생각하는가?! 물론, 아직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책으로, 이 책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서로 힘을 주고,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 다시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라.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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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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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그런 일을 하는 거지? 르포 같은 거라도 쓸 생각인가?” 

아뇨, 그저 애도할 뿐입니다.” - p44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병이든 사고든 심지어 자살이든, 그 어떤 이유라도 상관없이 사람이 죽은 곳이라면 어디든 그 장소를 찾아다니는 남자. 사람이 죽은 장소를 찾아가 고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고 다니는 남자. 사람이 죽은 장소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남자. 그 이상한 행동이라는 게, 왼쪽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가 가슴으로 가져오고, 왼손은 땅에 닿을락 말락 하게 내렸다가 가슴 앞에서 오른손과 포개는 것을 말한다. 그와 동시에 뭔가를 외우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기도 하는……. 누가 봐도 수상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뭐냐, 이 녀석은, 뭐냐, 이놈은?’ 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한 남자.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애도하는 사람”이라 부른다. 

 

『애도하는 사람』은 제목 그대로 “애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당사자의 생각이나 느낌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애도하는 사람”은 타인에 의해 그저 관찰되어 질뿐이다. 주간지 기자 ‘마키노 고타로’, “애도하는 사람”인 사카쓰키 시즈토의 어머니 ‘사카쓰키 준코’, 남편을 살해하고, 그 죗값을 치루고 나온 ‘나기 유키요’. 세 사람이 그 타인이 되고, 이야기에서의 중심이 되어 시즈토의 모습을 그려낸다. 주간지 기자 ‘마키노 고타로’, 그는 말초적 신경을 자극할만한 아주 자극적인 기사를 소설처럼 써내는 기자이다. 우연히 “애도하는 사람”, 시즈토를 알게 되고 그로인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남편을 살해하고, 그 죗값을 치루고 나온 ‘나기 유키요’. 그녀는 -그녀가 죽인 남편을 안고- 시즈토의 애도의 길에 함께 하게 되면서 비로소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즈토의 어머니 ‘사카쓰키 준코’. 그녀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계속해서 아들을 기다리지만, 일부러 불러들이지는 않는다. 그를 이해하기에 ㅡ. 세 명 모두가 가까운 곳에서 시즈코를 지켜볼 수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즈토를 받아들이기에 -특히 준코는 그의 어머니이기에 더더욱- 그를 이해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애도하는 사람”을 바라보면서는 어떤 생각을 할까?! 

 

 - 위선과 가식?!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문득 생각났다. 피곤함에 절어 점점 지쳐가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찾아와 절하고, 기도문을 외우는 사람들과 마주해야만 했던 순간들 ㅡ. 그 사람들과 절을 하고, 의례적인 위로의 말들을 주고받아야만 했던 순간들 ㅡ. 당연히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피곤함과 뭔지 모를 감정으로 끝임 없이 짜증만 솟구쳐 올랐다. 조문하는 사람들은 진심을 담아했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저 예의에 불과한 말로 들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의 당사자가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이 정말 그런 말들을 쏟아낼 수 있는 것일까’라는 말도 되지 않는 우월감 같은 것들로 인해 주위 모든 것들이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차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에 와서는 내가 그 순간들에 느꼈던 것들이 그저 단순한 피로와 상실감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변명해보지만, 그 순간 느꼈던 그 감정들을 완벽히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에는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그 감정들이 “애도하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옮겨갔다. 적어도 처음에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의 ‘애도(哀悼)’도 알겠고, 시즈토가 애도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왜 하는 것인지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지금도 쉽지만은 않다. 더군다나 전국을 떠돌며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을 위해 애도를 하는 것이라니……. 소위 말하는 ‘아는 사람’도 아닌데, 뜬금없이 나타나 그 ‘모르는 사람’에게 애도를 표시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이없는 짓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뭘 위해 저런 일을 하고 다니는 것인지 일단은 의심부터 생기기 마련이다. 돈을 벌기위한 단순한 쇼인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일까?! 행여 좋게 봐준다고 하더라도 그저 어떤 종교에 심취해서 행하는 일시적인 행동이 아닐까 하는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 애도하는 사람은 애도의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아이이든, 병으로 죽었든 사고로 죽었든 심지어 자살로 죽었든 전혀……. 그러니 더더욱 모순되고 가식적인 모습으로 밖에 볼 수 없으리라. 하지만 당사자인 “애도하는 사람”은 이야기한다. 당연히 모순적이라고,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차라리 병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고 ㅡ. 그래, 그것이 그를 이해하기에 쉬울지도 모르겠다. 이해라기보다는 인정이겠지만……. 

 

 - 그저 애도할 뿐?! 

 

내가 “애도하는 사람”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왜 ‘애도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찾고, 그 이유를 무조건 머릿속에 넣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조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책에서는 사람들이 “애도하는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애도하는 사람”은 위선자가 아니라는 단편적인 사실에서부터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나오지만, 현실에서는 역시 쉽지않은 일이다. 책에서도 사실, 『애도하는 사람』에 대한 정확한 정의나 정확한 논리는 제공되지 않는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제공될 거리도 없는 것이다. 그는 그저 애도할 뿐이기에 ㅡ. 

 

애도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에서 벗어나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애도를 받는 사람이라면?!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그래도 나를 위해서, 나를 이야기하고, 나를 생각하며, 나를 애도한다면?! 가끔씩 나이 드신 분들이 “내가 죽으면 제삿밥이나 얻어 먹을 수 있을까?!”라는 말씀을 하고는 하신다. 따지고 보면 제사라는 형식과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잊힌다는 것이 슬퍼서, 제사라는 핑계로나마 가끔씩이라도 기억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이기적이기만 한 자기 만족으로 비춰질 수 있는 타인에 대한 애도가 때로는 정반대의 이타적인 행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것이다. 

 

 - 죽음에 대한 경중?!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경중을 따지는 행위는, 

나아가서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목숨에 대해서도 

경중을 묻는 것과 같습니다.” 

- 작가 인터뷰

예전의 우리는 양반과 상놈이라는 구분을 두어 사람과 사람사이에 경계를 두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경계와 차별은 어느 정도 완화되었고,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자본주의라는 큰 틀에서 돈이라는 수단으로 또 다른 경계가 생기긴 했지만……. 어쨌든 현실과 달리 -이상적으로는- 누구나 평등했으면 하는 -정말 당연한- 생각을 품고 살아가며 세상도 그렇게 진화를 해간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을 하며, 나 역시도 그렇게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애도하는 사람』을 통해 또 다시 나의 부족함만을 확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죽음에 경중을 따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말 많은 사건사고 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연예인에 대한 수많은 이들의 추도에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 바로 나였다. 물론 누군가의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었지만, 그것이 자살이라는 이유로, 또 다른 곳에서 생사확인이 되지 않은 채 물 속 어딘가에 있을 장병들과 비교하며 혀를 차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생(生)에는 경중을 따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사(死)에는 경중을 따지고 있었고, 결국 그것이 다시 생에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음에 반성을 하게 되고, 그것이 생과 사의 순환 고리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ㅡ. 

 

 - 가족 그리고 다시 생(生)  

 

“애도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누구나 인정할 만한 아쉬움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타인을 위한 애도에는 충실하지만 자신의 가족에게는 한 발 늦은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시즈토의 행동에 있다. 그런 행동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답답해 하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그런 시선과 달리 가족들은-특히 그의 어머니는- 계속해서 그를 감싸 안는다. 그것이 가족이고, 가족이기에 또 그는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이해가 결국에는 눈물로 이어지지만 그 눈물은 다시 희망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로인해 『애도하는 사람』이 단순한 슬픔에서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없이 슬프게만 바라볼 수도 있는 삶과 죽음에서 그 속에 담긴 본질적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애도하는 사람』은 나를 정말 먹먹하게 만들기도 하고, 부끄럽게 만들게도 하면서, 또 다른 생으로 삶의 힘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죽음을 희망으로 바꾸는 동시에 책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놀랍기만하다. 감히 2010년 최고의 책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ㅡ.


이 사람은 누구에게 사랑받고, 누구를 사랑했을까요? 

사람들은 어떤 일로 이 사람에게 감사를 표했을까요?” - p65

‘내가 죽고 나서 누군가가 죽어있는 나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해온다면 어떨까?!’라는 마지막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그 대답은 누구나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단순한 생각만이 아니라, 풍성하면서도 부끄럽지 않게 느껴질 만한 대답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보게 한다. 살아있을 때 풍성함을 말이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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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1 세계문학의 숲 1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 안인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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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올해를 시작하면서 세웠던 목표들을 떠올려본다. 항상 그래왔듯이 이건 뭐 제대로 해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중에서도 책과 관련된 목표에 대해서는 특히 더하다. 2010년에는 소위 말하는 고전부터 시작해 세계 문학 작품들 좀 제대로 읽자는 소소한 목표를 세웠다. 그 목표는 결코 소소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결과가 소소했고, 내가 소소한 것이었다. 다양한 책들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만 하면서 실제로는 단순히 재미만을 찾는 독서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얼마 남지 않은 2010년이지만, 다시 ‘내년에 재도전!!’이라는 생각보다,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조금씩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새로운 작품을 만나 본다.

2010년의 끝에서 내가 만난 작품은, 2002년 노벨연구소 선정
‘54개국 작가가 뽑은 최고의 세계문학 100선’ 하나이자 독일 근대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인, ‘알프레트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다. 이는 시공사에서 2010년 창사20주년을 맞아 야심차게 내놓은 세계문학 총서의 그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그 어떤 것이든 ‘시작’이라는 것에는 큰 의미가 담겨 있다.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그 의미 있는 시작을 알리는 책으로 선택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라면 이 작품의 가치에 대해서는 다른 언급을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미리 알아둬야 할 사항이 있다. 엄청 맛난 음식을 파는데, 주인장은 불친절한, 그런 식당에 갔다 온 경험이 있는가?! 그렇다면, 불친절해서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자신도 모르게-주변의 다른 여건과는 상관없이- 그곳의 맛난 음식이 계속 그리워지는 그런 기분도 경험해 봤으리라.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 그런 식당 같았다.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내 그 맛에 빠져버리고 마는… 그래서 또 찾아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식당, 아니 그런 작품 말이다.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작품이었다. 도대체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누구의 시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뜬금없는 흥얼거림은 무엇인지. 뚝뚝 끊어지는 흐름에, 심지어 이 작품이 단편집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래. 이건 나 같은 사람에겐 한없이 불친절함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작품의 해설에서 이런 것들을 ‘의식의 흐름’또는 ‘내면의 독백’기법, ‘몽타주 기법’, ‘공감각적인 텍스트’등등으로 표현하면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익숙함의 차이였다. ‘이 식당 원래 그래!!’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아버리는 순간 불친절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이 작품도 ‘뭐 원래 이런 식이야!!’라고 마음을 내려놓고 조금씩 익숙해지다 보면 오히려 그것이 더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뭐, 미리 알아두면 괜찮을 것 같아서...;;;; 

 

바야흐로 형벌이 시작되고 있었다. - P14

 

이제 우리는 ‘프란츠 비버코프’라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그가 테겔 감옥을 떠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4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오는 그 순간부터… 보통이라면 새롭게 자유를 부여받는 그 순간을 즐겨야 함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는 두려움부터 느낀다. 그 순간을 형벌로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앞으로 펼쳐질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그의 새로운 삶은 시작된다.

앞서 밝혔듯이, 프란츠 비버코프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알고 보면 그의 삶이 그리 복잡하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감 생활을 끝내고 세상에 나온 한 남자가 겪게 되는 새로운 삶이라는 한 줄로 요약될 만큼 말이다. 사실 줄거리는, 각 권의 시작에 앞서서 이야기되는 것들과 각 장의 제목들을 통해서 쉽사리 예상할 수 있다. 단순한 줄거리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것은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928년경 베를린의 모습들과 사회적 큰 혼란으로 인한 전환점을 앞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사람들 중 하나인 프란츠의 의식을 통해 생각해보는 인간 본성, 그리고 그에 대한 이해 등.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이런 거대한 흐름으로 작가인 ‘알프레트 되블린’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실들을 곳곳에서
찾는 재미가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들도 언급했지만, 사실 내가 이런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저런 표현을 하면서도 솔직히 나조차도 아직 완벽하게 이 모든 즐거움들을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걸작이라고 부르는 한 작품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무례하고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작품은 단 한 번의 독서로 마무리하는 것 또한 무례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곁에 두고 긴 호흡으로 몇 번이고 다시 천천히 이 작품의 즐거움을 찾아가야 겠다는 작은 다짐을 해본다. 다음의 독서에는 또 어떤 즐거움과 느낌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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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12월에 읽을 주목할 만한 신간 도서 - 소설】

벌써 12월, 2010년의 마지막달이다 ㅡ.
한 해의 마지막을 함께할 11월에 출간된 책들.
그중에 어떤 책들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여기저기 기웃~기웃~!! ^^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오수완, 뿔(웅진) 

‘1억 원 고료의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이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ㅡ.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만한 제목이 아닐까?!
그 내용 또한 ‘책탐’에 관한 소설이라니,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문학동네 

은희경 작가를 처음 접했던 작품이 첫 장편소설이자,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새의 선물〉이었다.
처음(?!)이라는 의미가 있어서인지 그 이후로 나에게 특별한 느낌을 안겨주는 작가이다.
이 책을 원하는 이유는 ‘당연히’라고 해두자 ㅡ. 

 

《나는 유약진이다》 류전윈,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다섯 번째 책, ‘당대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2007년 출간된 해 중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며,
치밀한 서사와 농도 짙은 블랙코미디, 그리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니..
중국에서의 이 작품에 대한 열기는 심상치 않았던 듯싶다.
좀처럼 접하기 힘든 중국문학 작품을 만나볼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마루 밑 남자》 하라 코이치, 예담 

풍자와 유머로 우리의 모습을 그린 다섯 편의 작품이 수록된 책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유쾌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군다나, 일본에서 서점 직원의 강력 추천과 독자들의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이라니, 실망과는 거리가 멀 듯하다. 


《운명》 발레리 통 쿠옹, 비채 

프랑스에서 출간된 해에 이곳저곳에서 ‘올해의 책’으로 뽑힌 소설이라고 한다.
지옥과도 같은 하루의 시작이 이런 저런 우연과 인연으로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삶을 겪게 되는 네 사람의 이야기 ㅡ.
그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니, 12월의 마지막을 희망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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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인 2010-12-2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었습니다. 최고였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