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명의 성난사람들 - [초특가판]
시드니 루멧 감독, 헨리 폰다 출연 / 피터팬픽쳐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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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토론 프로를 자주 봅니다. 공중파 3사의 토론 프로를 골고루 봅니다. 희한하게 토론 프로의 질은 시청률과 반비례하더군요. M모 방송국에서 하는 100분 어쩌구는 자극적이라 저도 모르게 보게 되지만 거의 욕하면서 보게 됩니다. 사회자 손모 교수가 인기가 있는데다 싸움닭 같은 패널들을 주로 섭외하기 때문에 싸움구경 하는 맛은 최고지만 토론의 질은 최하입니다. 사회자, 패널, 청중이 모두 싸움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비슷한 성격의 사람들로 구성돼 분위기가 살벌하죠. 비판과 대안제시는 실종되고 비난과 모욕이 난무합니다. 생산적인 토론을 위해 잘 중재하며 토론을 이끌어야 할 사회자도 수수방관 내지 편파적인 진행을 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나라의 토론문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프로라 욕하면서도 자주 봅니다.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민주주의도 시간이 필요하겠죠. 앞으로 더 많은 토론이 이어지다 보면 좀 더 생산적이고 성숙한 토론문화도 생기리라 믿습니다.
이 영화는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 원리를 기가 막히게 샘플링 해서 보여주는 걸작 중의 걸작입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재판을 받는 18세 빈민가의 소년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상습적으로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해 온 소년은 전과 5범의 불량소년, 지하철 건너편의 한 여자가 살인장면을 목격했다고 하고 그 아래층 노인의 보충증언도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피해자의 가슴에 꽂힌 칼은 소년이 샀다는 칼로 추정됩니다. 다른 직접증거는 없는 상태. 아버지와 싸우고 영화를 보러 갔다는 소년은 영화제목과 주인공 이름조차 기억 못합니다. 누가 봐도 범인은 소년이 분명한 상황입니다. 국선변호사조차 유죄를 인정하는 분위기, 이제 남은 건 배심원들의 유죄판정만 남았을 뿐입니다. 만장일치로 유죄 판정이 내려질 거라는 예상으로 가볍게 판정실에 모인 12명의 배심원들, 뜻밖에 한 사람의 배심원이 무죄를 주장합니다.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아야 하는 규칙상 토론이 이어지는데, 유죄를 확신하는 사람들 중 유일한 반대자는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받습니다. 성질 급한 사람들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고 논리적인 그 사람(헨리 폰다)은 소년이 유죄일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하지 않다면서 차분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힙니다. 감정적이고 편견 강한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조목조목 재판의 헛점을 밝혀나갑니다. 논리적인 그의 말에 설득당해 판정을 번복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토론은 더욱 격렬해집니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이 영화는 영화의 처음과 끝만 제외하고 전 장면을 좁은 방에서 12명이 토론하는 장면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설정이지만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는 영화입니다. 한 소년의 목숨이 12명의 결정에 달려 있기도 하지만 그건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닙니다. 영화엔 소년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전혀 없으며 감정적인 동정도 없습니다. 오히려 정황 상 소년은 동정의 여지가 거의 없는 부랑아일 뿐입니다.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민주주의의 위대함입니다. 민주주의는 약점이 많은 제도죠. 영화도 민주주의의 그런 약점을 잘 짚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민주주의는 승리한다는 게 이 영화의 믿음입니다.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 관용, 생산적인 비판과 용기있는 인정, 서로의 선의와 이성을 믿는 태도가 어우러져 마침내 민주주의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TV나 신문을 보면 늘 싸우는 사람들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싸우는 거 나쁘지 않습니다. 규칙을 지키면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비판하고 경쟁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생명이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좀 더 우아하게, 좀 더 생산적으로, 좀 더 신사적으로 싸우면 좋겠습니다. 그게 잘 안 되면 이런 영화 한 편 보면서 다시 민주주의의 기본을 배워 보는 것도 좋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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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 North by North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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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의 이혼 경력에 약간 사기꾼 기질도 있는 광고업자 로저 손힐(캐리 그란트)이 어느 날 괴한들에게 납치당합니다. 괴한들은 손힐을 비밀요원 '조지 케플란'으로 오인해 정보를 캐내려 합니다. 기지를 발휘해 겨우 탈출한 손힐은 조지 케플란을 직접 찾아보려 합니다. 손힐은 그 과정에서 오히려 살인 누명까지 덮어쓰고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사실 조지 케플란은 미국 정보기관에서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입니다. 영문을 모르는 손힐은 경찰과 괴한들의 추적을 받습니다. 기차간에서 미모의 아가씨 이브 켄달(에바 마리 세인트)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한 손힐은 그녀가 일러 준대로 대평원에서 조지 케플란을 기다리는데 정작 나타난 것은 그를 죽이려하는 비행기.
 천신만고 끝에 살아돌아온 손힐은 이브가 자신을 쫓는 괴한의 정부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합니다. 사랑과 배신감 사이에서 갈등하는 손힐에게 미국 정보기관의 부장이 나타나 이브가 기관의 이중스파이임을 알려줍니다. 자신으로 인해 발각될 위기에 처한 이브를 구하기 위해 손힐이 직접 악당들을 추적합니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식 써스펜스 스릴러 영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문을 모르고 쫓기는 억울한 사나이와 그를 돕는 미모의 여성이 나오는 구도는 히치콕 영화의 전형이라 해도 좋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사건들과 조금씩 밝혀지는 사건의 전모 또한 교과서적입니다. 지금도 헐리웃 영화에서 쉼없이 재생산되는 스릴러의 공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제목은 "노스웨스트 항공을 타고 북쪽으로"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텐데 좀 이상한 번역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매우 인상 깊은 제목이 되었습니다. 러쉬모어 산의 큰바위 얼굴들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액션씬들이나 대평원에서 비행기에 쫓기는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꼽힙니다. 정교한 콘티와 화면은 영화학도들에겐 교과서로 지금까지 사용될 정도로 뛰어난 작품입니다. 시중에 이 영화 DVD를 구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지요. 전엔 연말 특선으로 가끔 TV에서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 마저도 없네요. 다시 보고 싶은 걸작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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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 비즈니스 - Monkey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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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기업의 연구책임자인 바나비(캐리 그란트)는 일에 몰두할 때면 만사를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두꺼운 안경을 벗으면 거의 장님에 가까운 사람이고 재미라곤 없는 중년남자입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천진난만한 점이 유일한 매력이랄까요. 바나비는 연구실에서 '젊어지는 약'을 만들고 있는데 쉽지 않습니다. 이런 남편을 아내 에드위나(진저 로저스)는 무한한 포용력으로 내조합니다. 
 어느 날 바나비가 잠시 연구실을 비운 사이 실험용으로 키우는 에스더란 침팬지가 우리를 나와 화학약품들을 마구 섞어 정수기에 부어놓는 일이 발생합니다. 영문을 모르는 바나비가 돌아와 자신이 만든 약품을 직접 마셔 시험합니다. 약품을 마시고 정수기의 물을 마시는데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시력이 회복되고 기분까지 젊어집니다. 마음까지 20대로 돌아간 바나비는 미모의 사장 비서(마릴린 몬로)와 스포츠카를 몰고 시내를 질주하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등 난리를 피웁니다. 약효가 떨어지자 제정신을 차린 바나비는 정수기 물의 효능을 알 리 없어 자신의 실험이 성공했다고 믿습니다.
 비록 약효 때문이긴 하지만 바나비가 미모의 비서와 놀러 다닌 사실을 안 아내 에드위나는 약간의 질투를 느껴 자신도 약을 마십니다. 물론 바로 정수기의 물도 마시지요. 이번엔 에드위나가 신혼 시절의 아가씨로 변신합니다. 에드위나는 놀라운 체력과 정열을 회복해 남편을 괴롭힙니다. 신혼시절의 호텔을 찾은 두 사람은 밤 늦도록 춤을 추고 첫날밤의 추억이 어린 호텔방으로 갑니다. 그런데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그 시절로 돌아간 에드위나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바나비는 방에서 쫓겨납니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다음날 다시 실험실로 온 에드위나와 바나비는 정수기 물로 커피를 타 마시는데 이번엔 그 양이 많습니다. 바나비와 에드위나의 소동을 전해들은 사장은 이사들을 소집해 약품의 성공을 알리고 비법을 사려 하는데 데려 온 두 사람은 완전 10대 소년 소녀의 행동을 합니다.

 하워드 혹스 감독의 "몽키 비즈니스"는 전형적인 '스크루볼 코메디' 영화입니다. 뒤죽박죽 엉킨 에피소드에 빠르고 재치있는 대사가 오가는 로맨틱 코메디죠. 늘 잘 생긴 신사역만 주로 맡던 캐리 그란트의 코믹 연기와 어릴 적 춤과 노래로 일세를 풍미했던 진저 로저스의 빼어난 개인기가 돋보이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자식도 없이 무덤덤한 중년을 보내던 부부가 회춘의 묘약을 마시고 일시적으로 젊어져 과거의 가슴 뛰던 로맨스를 재연하는 연기는 지금 봐도 일품입니다.
 내용은 말도 안 되고 유치하다고 할 수 있지만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이 주는 느낌이 유쾌하고 행복합니다. 실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 다시 보니 더욱 사랑스러운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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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인의 수색자 - [초특가판]
존 포드 감독, 존 웨인 출연 / 에이치디디브이디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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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전쟁이 끝난 지도 어언 3년이 흐른 어느날, 텍사스 황량한 평원의 외딴 집에 한 사나이가 찾아옵니다. 남군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이든(존 웨인)이 동생을 찾아온 것이죠. 이든은 왠지 거칠고 삐뚤어진 느낌을 주는 남자로 과거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듯 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 한참 만에 나타난 이든을 동생내외는 반겨 맞아줍니다만 이든은 함께 살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아무튼 정착을 할 작정입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인디언을 추적하러 간 사이 동생의 집이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불타고 여조카 둘이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든과 마을 자경단은 인디언을 추적합니다. 추적 초기 인디언과 일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숫자의 열세로 범인 확인도 못하고 큰조카 루시의 죽음만 확인합니다. 장기적인 추적을 할 수 없는 마을사람들은 추적을 포기하는데. 어린 조카 데비(나탈리 우드)의 생사를 알아내기 위해, 그리고 그보다 더 잔인한 복수를 위해 이든은 홀로 수색자가 됩니다. 과거 이든이 인디언에게 납치됐다 죽은 여자 품에서 구해 동생네에 맡겼던 아이였던 마틴(제프리 헌터)이 이든을 따라 나섭니다.
 무려 5년이 넘는 집요한 추적이 계속되면서 범인은 코만치 인디언의 한 부족 추장인 스카인 것으로 드러나고 데비도 살아있음을 알게 됩니다. 물물교환 장사치로 가장해 인디언의 캠프로 들어간 이든과 마틴은 마침내 데비를 만납니다만 데비는 이미 추장의 아내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든은 복수를 위해 스카를 죽이고 이미 인디언에 더렵혀진 조카 데비도 죽이려 합니다. 마틴은 그런 이든을 말리려고 합니다.

 존 포드 감독의 "수색자"는 서부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존 웨인. 존 포드 명콤비의 영화들과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는 영화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들었던 지난날의 수 많은 서부영화와 많은 차이를 보여줍니다. 이전 영화들은 단순한 이분법적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주인공은 바람과 함께 나타난 정의의 사나이로 언제나 멋지게 악당들을 제거합니다. 선악이 분명했고 갈등은 단순했습니다. 인디언은 대개 야만스럽고 호전적인 야만인들로 묘사되었습니다.
 한데 이 영화는 이전의 그런 도식을 스스로 다 무너뜨립니다. 주인공은 결코 선인이 아닙니다. 어딘지 모르게 침울하고 삐뚤어져 있으며 편견도 심한 사람입니다. 또한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 시대야 말할 것도 없고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시대상황도 백인우월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다분히 노골적으로 표현되던 시대이긴 했습니다만 이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 이든이 결코 멋있게 그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문제가 많은 인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 것들이 영화 초반 간접적으로 묘사되면서 스크린 속에 뭔지 모를 긴장과 불안이 조성되는데 결국 이든의 문제 많은 성격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요갈등의 원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든의 사연이 영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속시원히 밝히지 않고 슬쩍슬쩍 분위기만 잡고 넘어가는 그 연출이 영화를 매우 풍부하게 만듭니다. 보는 사람마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교묘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든이 처음 동생집에 도착해서 제수에게 던지는 시선은 매우 끈적하고 복잡합니다. 분명 과거에 뭔가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만 겉으론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든이 전쟁에 지고 3년 동안 어디서 무얼 했는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내놓는 두둑한 돈뭉치는 뭔가 어두운 냄새를 풍깁니다.
 영화 초반 이든의 숨겨진 사연들이 영화의 주제가 되겠거니 짐작하는 순간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느닷없는 인디언의 습격으로 동생가족이 몰살 당하면서 영화는 전혀 다른 쪽으로 달려갑니다. 이든의 사연은 뒷전으로 밀리고 인디언과 백인들의 싸움이 등장합니다. 그러곤 전형적인 기병대 액션이 펼쳐지나 했더니 그것도 잠시, 이번엔 또 지루한 추적이 이어집니다. 지루한 세월을 묘사하기 위해 좀 분위기에 안 맞는 듯한 코믹한 에피소드들이 삽입되는데 이든의 갈등은 여전합니다.
 서서히 이든의 갈등이 해결되려는 순간, 또 한 번 반전이 있습니다. 조카 데비가 원수인 인디언 추장의 아내가 돼 있는 상황이 등장하고 이든의 분노는 최고조에 이릅니다. 이든은 인디언에 대한 복수와 함께 이미 인디언에게 동화된 조카마저 죽이려 합니다. 이 때 계속 조연으로 양념 역할만 하던 마틴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드라마를 이끕니다. 인디언 추장 스카도 백인들에게 두 아들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 저지른 짓이라는 게 드러나면서 이분법적 선악구도가 깨집니다. 인디언 추장 스카나 이든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틴은 이든의 광기 어린 복수를 막으려 합니다. 마틴이 인디언에게 납치됐던 여자의 아들이고 이든이 그런 마틴을 인디언 피가 섞였을 지 모른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장면이 영화 초반 몇 번 보였기 때문에 마틴의 행동은 많은 걸 상징합니다.
 부모를 죽인 원수의 아내가 되어 사는 데비나 인디언의 피가 섞였을 지도 모르지만 누구보다 정의롭고 용감한 마틴은 편협한 백인의 전형인 이든의 대안입니다. 바로 자유롭고 평등한 미국의 미래인들입니다. 상황상 인디언 추장의 죽음과 이든의 복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존 포드 감독의 의도는 이전의 영화들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보입니다. 버팔로에게 광기 어린 총질을 해대고 인디언 추장의 머리가죽을 벗기는 이든은 백인들이 경멸해 마지않던 야만적인 인디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인디언에 물들었다고 조카를 죽이려 하는 이든은 복수를 위해 백인들을 죽였지만 데비를 아내로 삼음으로 인해 화해와 용서를 갈구하는 인디언 추장 스카보다 결코 우월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조카 데비를 끝내 죽이지 않는 이든의 선택은 감독이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했는지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따뜻한 가정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문밖으로 걸어가는 존 웨인의 쓸쓸한 뒷모습이 진한 여운을 남기는  "수색자"는 걸작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깊은 맛이 있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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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된 공주
카렌 두베 지음, 안성찬 옮김 / 들녘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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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평소 왕자와 공주, 난쟁이와 드래곤 따위가 나오는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판타지는 좋아하는 편이지만 '왕자와 공주' 나오는 이야기는 별로였습니다. 아무리 재미있게 이야기를 엮어도 기본 구도 자체가 워낙 유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차라리 고전이라면 모를까 현대에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슷한 소설들엔 흥미가 없었습니다. 판타지 문학 자체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이 장르가 한국사람들 정서엔 잘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이런 생각과는 달리 '왕자와 공주' 나오는 판타지 소설들이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릴 때부터 서양 동화나 영화로 익숙해진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판타지 매니아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왕자와 공주, 기사나 드래곤'이 나와야만 읽는다는 사람들도 많더군요. 그렇다면 혹시 내가 선입견으로 새로운 흐름을 잘 못 읽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한 권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납치된 공주". 제목에 공주가 들어가서 눈에 확 띄었습니다. 작은 판형과 야시꾸리(?)한 표지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 이번 기회에 제대로 왕자와 공주 나오는 판타지 한 번 읽어보자! 

 결과적으로 이 책은 처음 저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 전혀 반대의 책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참! 하필 고르고 고른 게 주류에서 벗어난 책이라니! 역시 전 '왕자와 공주' 스타일 소설관 인연이 안 맞나 보다 싶었습니다. 아무튼 내가 원했던 본격 판타지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매우 유쾌한 책읽기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쉽게 말하면 약간 비틀어 놓은 '왕자와 공주' 이야기입니다. 동화나 전설 속의 공주와 왕자, 기사와 드래곤, 난쟁이와 괴물 등을 조금씩 비틀어 풍자적으로 묘사한 이야기입니다. 기본 줄거리는 가장 고전적인 이야기를 따르고 있지만 각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전혀 고전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현대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이 패러디에 가깝지만 그저 가벼운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엔 제법 묵직한 울림도 있습니다. 여성 작가가 썼기 때문인지 아직 자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청소년들의 진정한 자아찾기가 매우 섬세하게 그려집니다. 이건 분명 성장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재미도 있지만 얻을 것도 있는 이야기라는 얘기죠. 본격 판타지를 기대한 사람들은 실망하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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