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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평점 :
참된 우정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 한야 야나기하라, 『리틀 라이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내가 보기에, 우정의 오랜 요령은 너보다 더 나은 사람들 ― 더 똑똑하다거나 멋진 사람들이 아니라 더 친절하고 더 아량 있고 더 관대한 사람들 ― 을 찾는 거야. 그리고 그 친구들이 네게 가르쳐주는 것들에 감사하고, 친구들이 너에 대해 말해주는 것들, 아무리 나쁜 ― 혹은 좋은 ― 말이라도 경청하려고 하고, 그들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거지. 그게 제일 힘든 일이야, 하지만 가장 좋은 일이기도 해.”
― 『리틀 라이프』 1권 312페이지 중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길이란
우정이란 무엇일까요?
너무 쉬운 질문인가요? 물론 우리들 중에 ‘오래 두고 사귄 벗’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참된 우정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고 윤택하게 만들어 주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친구가 없다면 이 험한 세상을 견디기가 더 힘들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우정’이란 다소 추상적인 가치입니다. 누구나 우정의 중요성을 알지만, 우정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경우에 따라 매우 다양할 것 같습니다. 우정은 연인의 사랑처럼 배타적이거나 상호구속적인 것도 아니고, 혈육의 사랑처럼 맹목적인 것도 아닙니다.
우정은 단순한 친목의 관계에서 그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는 타인들과 ‘친목’을 나눌 수는 있지만, ‘우정’을 쉽게 나눌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필요하죠. 그러나 오랜 시간이 쌓인다고 하더라도 모든 관계가 우정의 관계로 발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프리스턴대 철학과의 알렉산더 네하마스 교수는 이러한 우정의 불명확한 특성 때문에, 우정에 대한 문학적 ‧ 학술적 관심이 분명히 소홀했던 측면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정이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쌓이는 우정의 가치를 아래와 같이 표현합니다.
“우정은 우리를 그냥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바를 이루도록 길을 인도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철학 한 입』(데이비드 에드먼즈 外, 열린책들) 중에서
잔인한 고통의 노래, 『리틀 라이프』
그리고 여기, 『리틀 라이프』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미국작가 한야 야나기하라의 장편소설입니다.
2015년 커커스 문학상(Kirkus Prize)을 수상하고, 전미도서상과 맨부커상 최종후보작인 동시에, 그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등 20여 개의 언론 매체들로부터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던 화제작입니다. 현대 소설로는 드물게 요약본과 해설서가 등장하고, 영화 <캐롤>의 여배우 루니 마라가 추천하는 등 출간 직후부터 커다란 반향과 주목을 받았던 책입니다.
동시에 『리틀 라이프』는 대단히 논쟁적인 작품입니다. 주인공 주드가 어린 시절에 당한 성폭행과 그로 인한 끔찍한 트라우마, 그리고 남성 간의 동성애에 관한 묘사가 소설 전반을 폭풍처럼 뒤덮고 있습니다. 자해와 자살 시도도 끊이질 않습니다. 정말이지 극한의 고통으로 점철된 소설입니다.
호불호가 갈릴 여지는 충분합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잔인한 걸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 2권 도합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실로 절절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리틀 라이프』를 한 번 읽고, 다시 읽고, 내 벗들이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 주위에 선물했다는 독자 분들이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한 인간이 받은 상처의 심연에 관한 이야기, 극복될 수 없는 고독의 이야기입니다. 게이들의 사랑을 다루는 동성애 소설이기도 하고, 아동 성폭력 피해의 끔찍함을 다룬 심리 소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이전에, 『리틀 라이프』는 근본적으로 우정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소설입니다. 고통 받는 한 영혼을 중심으로, 과연 그와 같은 인간을 지탱하는 우정이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천착하는 작품입니다.
“우정, 교우관계는 너무나 흔히 논리를 무시하고, 너무나 흔히 적임자들을 교묘히 피해 가고, 너무나 흔히 이상하고 못되고 특이하고 망가진 사람들이게 자리를 잡는다.”
― 『리틀 라이프』 1권 137페이지 중에서
『리틀 라이프』에 깃든 우정의 덕목
앞서 말했듯, 우정은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무려 40여 년에 걸친 시간을 함께 겪어 냅니다.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먼저 죽음을 맞이합니다.
쓰레기 더미 사이에 버려진 채 태어나, 가톨릭 신부들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하며 자란 로스쿨의 주드, 신중하고 점잖은 성격의 배우 지망생 윌럼, 미술계의 스타를 꿈꾸는 열정적인 제이비, 그리고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건축 전공의 맬컴까지…. 『리틀 라이프』는 십대 후반의 네 친구가 대학에서 만난 후, 거의 평생 동안 부대끼는 이야기입니다.
넷 모두가 끈끈하게 어울리면서 젊은 시절의 활기로 가득했던 관계가, 중년 이후까지 그대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기도 했고, 그 상처는 죽는 순간까지 잊히질 않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끝내 서로를 기억하며 삶을 마무리합니다. 누구도 누구를 끝내 내치진 않습니다. 상대의 마음 속 진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정은 이처럼 ‘동년배’의 네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덕목은 아닙니다. 리처드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평생에 걸친 사랑을 쏟아 붓는 교수 해럴드와 그의 아내 줄리아, 그리고 든든한 큰형처럼 수십 년간 주드를 돌봐 주는 의사 앤디도, 나이와 환경, 지위를 떠난 우정의 가치를 독자들에게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드를 둘러싼 많은 인물들은, 독자들에게 우정의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가 ‘보살핌’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꼭 피를 나눈 가족이나, 연인, 또는 부부 관계가 아니더라도, 오래도록 서로의 ‘보잘 것 없는 삶’(little life)를 감싸주고 보살펴주는 관계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운명의 잔인한 굴레에서 구출하는 관계 말이죠.
“그들의 관계가 결국 구조 작업이 아니라, 그가 주드를 구하고 그만큼 자주 주드도 그를 구했던 우정의 연장이란 걸 깨달았다”
― 『리틀 라이프』 2권 81페이지 중에서
더불어 우정은 상대를 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친구란 무엇보다도 비판하지 않는 존재”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정을 위해선 상대방의 망가지고 뒤틀린 모습, 거듭되는 실수와 자기파괴를 꾹 참고 지켜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아주 오랫동안 섬세하게 그의 고통의 근원을 살피고, 인내하는 일이 요구됩니다.
주드를 둘러싼 친구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들은 세상에 남은 것이라곤 오로지 두려움과 증오심밖에 없던 주드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우정이란 어느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리틀 라이프』는 바로 그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니체는 “위대한 사람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시각에선, 누군가에게 ‘단 한 사람’이 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귀중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많은 친구들을 두루 사귀라고 속삭입니다. 사교적인 인간,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 그와 동시에 상대방의 마음 속 고통을 ‘전문적으로’ 듣는 심리상담가와 정신분석의도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의 아픔을 털어놓을 수 있는 ‘전문가’를 전보다 더 필요로 합니다. 심리적 스트레스로 날카로워지는 한편, ‘깊고 좁은 관계’보단 ‘넓고 얕은 관계’가 선호되는 현대 사회의 뚜렷한 추세입니다.
“누군가Someone에게 말해야 해.” 애너는 말했고, 나이가 들면서 그는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로 결심했다. ‘어떤 한 사람Some One’에게 말하는 거다. 언젠가는, 어떻게든, 어떤 한 사람에게 말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 『리틀 라이프』 2권 355페이지 중에서
그러나 『리틀 라이프』에선 그런 추세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영혼의 단발마가 이어지면서 우리의 마음을 찌릅니다. 자학을 거듭하는 주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벗들의 오랜 노력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 비현실성은, 분명히 아름답습니다.
“네 편이 되어줄게. 영원히.”
이 작품은 2016년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과 각본상을 휩쓸었던 영화 <스포트라이트>와 쌍둥이 격의 작품입니다. 영화가 아동 성폭력 가해자와 그들을 쫓는 신문사 특종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소설은 그 성폭력의 기억에 평생을 시달리는 피해자의 심리에 집중합니다.
영화에선 미국 보스턴의 가톨릭 신부들이 남자아이들을 강간하고, 폐쇄적인 종교 공동체가 그 사건을 어떻게 은폐했는지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대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이들을 기르는 데에 온 마을이 필요하다면, 아이들을 추행하는 데도 온 마을이 필요한 거요.(If 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 it takes a village to abuse one.)”
비유컨대 우정이란 바로 그 ‘온 마을’에 함께 맞서는 일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상대를 보살펴 주며, 섣부르게 비판하지 말고, 섣부르게 고치려 들지 않으며, 세심하게 인내하는 ‘한 사람’이 되어주는 일입니다. 친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끝내 친절하고 아량 있게 그를 품어주는 일입니다. “나는 영원히 네 편이 되어줄게”라고 말해주는 일입니다.
과연 쉽지 않은 일입니다. 『리틀 라이프』은 힘겨운 고통으로 꽉 찬 소설입니다. 그 고통을 견디면서 책을 독파하는 독자들에게, 소설은 굉장한 치유의 힘을 선사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 힘에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면, 역시 ‘우정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