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YZ의 비극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서계인 옮김 / 검은숲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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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뇌섹남이죠! 허지웅 작가가 엘러리 퀸의 오랜 팬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에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에서도 그의 거실 탁자엔 엘러리 퀸 컬렉션의 대표작 『Y의 비극』이 놓여 있었는데요. 허지웅 작가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그는 왜 엘러리 퀸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먼저, 추리소설의 고유명사인 셜록 홈즈의 말을 들어 볼까요? 

『즐거운 살인: 범죄 소설의 사회사』에서 추리/미스터리 문학의 사회적·역사적 연원을 되짚었던 사회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에 따르면, 사실상 코난 도일이야말로 『주홍색 연구』에서 범죄학을 엄밀한 과학으로 전환시키려는 고전적인 시도를 보여 주었습니다. 


"다른 학문들도 다 그렇겠지만, 연역의 과학과 분석이야말로 오랫동안 참을성 있게 연구를 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네. 아주 난해한 사건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 주목하기 전에, 보다 기본적인 문제점들을 조사해 봐야 한다는 말일세. 탐정이라면 시체를 보자마자 한눈에 그 사람의 내력이나, 그 사람이 종사하고 있는 생업이나 직업을 구별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에르네스트 만델, 『즐거운 살인: 범죄 소설의 사회사』 46페이지 중에서 재인용


연역 추리의 정수, 엘러리 퀸의 비극 시리즈 


코난 도일이 위에서 밝힌 것처럼, 범죄/추리 소설은 기본적으로 '연역의 과학'에 속합니다. 어떤 사건이나 용의자를 도덕적으로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건 추리의 세계와는 거리가 멉니다. 탐정은 오직 눈에 보이는 단서들을 통해 치밀한 '사고 실험'을 전개합니다. 범죄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을 뒤쫓으며 나름의 전제를 세우고, 그에 맞는 결론을 이끌어낼 뿐입니다. 


엘러리 퀸의 '비극 시리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연역 추리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해결에 이르기 직전까지 모든 단서가 독자에게 제공되며, 독자는 전지전능한 탐정을 보며 감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공정한 단서를 통해 탐정과 지혜를 겨룰 수 있습니다. 영국풍의 거대한 햄릿 저택에 은둔하는 노배우 드루리 레인은 독자들의 안내자이면서, 동시에 경쟁자이기도 합니다. 


1930년대 초 엘러리 퀸이 내놓은 4권의 '비극 시리즈'는 미스터리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그중에서도 허지웅 작가의 탁자 위에 놓여 있던 『Y의 비극』은 '세계 3대 추리소설'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을 만큼 8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정상을 지켜온 최고의 작품으로 칭송되고 있죠. 연이은 살인으로 얼룩진 해터 가문의 일원들의 억눌리고 비틀린 심리와 행동을 묘사하는 기법도 일품입니다. 반전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렇다면 허지웅 작가는 왜 『Y의 비극』, 나아가 엘러리 퀸의 세계를 좋아할까요? 그가 오랫동안 써 왔던 여러 글들을 읽어보면, 허지웅 작가가 얼마나 인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인간이라는 종자를 모순과 흠결 투성이라고 생각하는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고독한 개인의 힘과 성찰성 


들여다보면 인간이 참 비슷한 구석이 많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축축한 그늘이 있고, 거기엔 뱀들이 몇 마리씩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세상은 속 편하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사회성과 긍정성이라는 명목 하에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고 규정합니다. 추리 소설 안에서 펼쳐지는 '연역적 사고 실험의 세계'와는 정반대로, 타인에 대한 조종과 의존, 편견이 난무하는 사람살이의 풍경입니다. 이런 풍경에 질색하며 허지웅 작가는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나는 반사회적인 인간이다. 혹은 그런 평가를 받는다. 조직 지향적이지 못하다. 결손 가정에서 자랐다. 세상의 긍정적인 면을 먼저 보라는 말을 혐오한다. 그런 말을 뱉는 자의 주둥이를 의심한다. 집에는 연쇄살인을 다룬 도서와 DVD가 수십 개에 이른다. (…) 


세상은 얼마나 쉽게 이유를 만들고 합리를 씌워 결과를 만들어내는가. 누군가의 죄를 묻기에 얼마나 편리한 곳인가. 내가 살인 혐의를 받게 된다면, 범죄를 잉태한 그 역겨운 속내와 어두운 과거가 단 하루 만에 낱낱이 밝혀지고야 말 것이다. 수수께끼는 풀렸다!" 


허지웅, 『대한민국 표류기』 ‘용의자’ 중에서


엘러리 퀸과 허지웅 작가의 글을 공히 좋아하면서 자주 생각하게 되는 키워드는 ‘개인’입니다. 고독한 개인만이 이룩할 수 있는 성찰성과 합리성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청력을 잃은 채 셰익스피어를 줄줄 읊으면서도 묵묵히 살인의 단서를 추리하는 드루리 레인과, 자신 안의 쓰라린 아픔을 숨기지 않고 기어이 쓰다듬으며 방송과 글쓰기를 넘나드는 허지웅 작가는 어떤 면에선 꽤나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X의 비극』, 『Y의 비극』, 『Z의 비극』 등 ‘비극 시리즈’의 대표작 3권을 합본으로 묶은 《XYZ의 비극》이 곧 출간됩니다. 이 합본호에 부치는 허지웅 작가의 추천사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드루리 레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탐정 가운데 하나다. 탐정은 논리적 정합성과 사유에 근거해 사건을 해결한다. 반면 이 멋진 노인은 탁월한 연역추리로 이미 사건을 다 해결해놓고도 법과 윤리, 사회적 역할과 어른의 책무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조금씩 풍화되어가는 것이다. 드루리 레인의 모험은 ‘누가 범인인가’로부터 ‘무엇이 옳은 것인가’로의 여정이다. 나는 부디 이 연작이 ‘앨러리 퀸의 비극 시리즈’라기보다 ‘바너비 로스의 드루리 레인 4부작’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허지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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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f657 2017-09-21 2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출판사에 불만입니다. 최후의 비극은 왜 합본에서 누락했는지 궁금합니다. 드루리레인의 마지막 사건편인데 합본판에서 조차 누락시킨것은 정말 이해가 안갑니다. 책가격이 높아지더라도 최후의 비극편도 합본판에 들어가야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비극시리즈 합본판에서도 누락되는 바람에 최후의 비극편도 따로 사야 하는 판국이군요. 하여튼 이번 합본판 아주 비추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