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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농장
하하키기 호세이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7년 2월
평점 :

미국 메디컬 드라마 <닥터 하우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때가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으로 2012년판 기네스북에 올랐을 정도라고 하니까요. (폭스 웹사이트에 따르면, 전 세계 66개 국가에서 8,180만 명의 시청자 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저 역시 시즌1부터 8까지 전편을 두 번이나 ‘정주행’ 했으니 <닥터 하우스>의 열혈 시청자라 할 만합니다.
메디컬 드라마에는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사회의 명망가도, 거리의 노숙자도, 일류 재즈 뮤지션도, 이웃집의 불륜남도…. 육신의 고통 앞에서는 완전하게 평등합니다. 그래서 병원에선 삶의 솔직한 감정들을 가로막고 있던 모든 허례허식들이 깡그리 벗겨지게 됩니다.
아직도 점잔을 떨거나 체면을 차리는 환자들을 보면서, 약물에 찌든 천재 진단의 그레고리 하우스는 매번 ‘그들이 하는 말을 믿지 말라’고 단언하죠. 인간은 다 거짓말을 하는 법이라고요. “Everybody lies”란 문장이 그의 대표적인 신조입니다. 그러면서도 환자들의 애환과 인생사에 늘 (남몰래) 공감하는 (츤데레) 하우스의 모습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백미입니다.
흥미진진한 메디컬 픽션, 『장기농장』
의학과 의술, 병원과 의사와 간호사 등등은 우리 삶과 아주 가까운데, 막상 <닥터 하우스>처럼 맛깔나면서도 전문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영화나 드라마는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책으로 본다면 어떨까요? 물론 여러 장르의 메디컬 문학이나 의사, 간호사들의 에세이가 없는 건 아닐 테지만, 특히 소설 분야로 한정한다면, 지적 만족과 문학적 감동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작품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하하키기 호세이의 <장기농장>을 직접 읽기 전까진 말이죠.
600여 페이지의 그리 짧지 않은 소설인데, 하룻밤을 꼬박 새며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읽고 나선 메디컬 픽션만이 줄 수 있는 매력에 푹 빠졌다가 나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메디컬 스릴러, 메디컬 추리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스물한 살, 갓 간호학교를 졸업한 노리코는 자신의 집과 그리 머지않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종합병원 세이레이의 간호사로 취직합니다. 파릇파릇한 새내기 사회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도입부에선 벚나무의 꽃잎들이 휘날리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신 뒤로는 벚꽃 구경 갈 일이 없습니다. 아직 남자친구를 한 번도 사귀어 보지 않았고요.
병원 소아과에서 무럭무럭 성장하던 그녀와 단짝친구 유코에게, 어느 순간부터 묘한 일이 찾아옵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들이 묘한 일을 찾아내고, 추적해 갑니다. 노리코가 산꼭대기 역의 레스토랑에서 어느 임산부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뇌아를 출산하겠단 말을 들은 게 시작이었습니다. 언제나 밝고 기운이 넘치는 유코가 병원의 직원들 대다수도 출입이 불가능한 산부인과 ‘특별병동’의 잠입을 주도하고, 소아외과에서 근무하는 마토바 의사도 합류합니다.
“무뇌아도 인간인가요?”
무뇌아, 말 그대로 뇌를 갖지 않고 태어난 아기입니다. 이마 위부터 뒤통수가 전혀 없이 눈썹 위로 납작한 무뇌아의 사진, 여러분도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태어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사망할 확률이 높고, 그래서 임신 중절로 지우는 일도 빈번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무뇌아의 장기는 선천적 질환을 앓는 많은 신생아들을 구하는 데 이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짐작되지 않나요? 무뇌아, 장기농장.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돈에 대한 욕망, 연구에 대한 욕망, 명성에 대한 욕망….
노리코 일행은 세이레이 병원 산부인과의 어두운 이면을 향해서 용감하게 나아갑니다. 병원에 속한 이는 아니지만, 케이블카의 차장 후지노 시게루 또한 그들을 돕습니다. 후지노 시게루는 작은 몸집에 큰 머리를 가진, 약간의 정신적 장애를 가진 인물입니다. 동시에 그는 『앵무새 죽이기』에서 이웃의 눈을 피해 은둔하는 삶을 선택한 부 래들리처럼, 독자들에게 잊히지 않는 감동을 주는 캐릭터입니다.
작가 하하키기 호세이는 도쿄대 불문과를 졸업했다가 다시 규슈대 의학부를 거쳐 정신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후생병원 진료부장으로 재직할 만큼 충실한 의료인의 삶을 살았다고 해요. 동시에 『폐쇄병동』으로 제8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수상, 『도망』으로 제10회 시바타 렌자부로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었다고 합니다.
정통 의사 출신의 소설가답게 그가 병원의 여러 풍경을 묘사하는 장면들엔 생동감이 깃들어 있습니다. 의료진과 환자, 환자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도 그렇고요. 특히 병원 곳곳에서 환자를 보살피거나, 당직을 서거나, 대기실에서 잡담을 나누는 간호사들의 일상적인 생활의 묘사들이 따뜻하다 싶을 만큼 세심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장기농장』을 읽어야 하는 이유
간호사들은 어쩌면 ‘질병 자체에 주목하는 의사’와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 병원의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스물한 살 새내기 간호사의 초심(初心), 환자와 부대끼면서 느끼는 생명에 대한 아주 단순하고 상식적인 접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상기시킵니다. 줄기세포와 낙태, 뇌와 유전자와 배아의 제공…. 생명 윤리라는 거창한 문제에 있어, 우리 모두 막 병원에 들어간 노리코의 뒤를 좇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닥터 하우스>도 결국 슈퍼히어로 드라마입니다. 하우스만 해도 천재로 이름을 날리며 중년에 다다랐고, 그와 함께하는 의사들 모두 10여 년이 넘게 그 어렵다는 의학 공부에 매진한 엘리트들이죠.
『장기농장』의 아마기시 노리코는 다릅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에 힘겨워 하고, 함께 사는 어머니와 투닥거리면서, 베테랑 간호사들 앞에서 잔뜩 긴장하는 내 동생이나 언니 같은 존재입니다. 퇴근하고 예쁜 카페에서 맛있는 디저트를 먹고, 직장에서 남성 선배에게 호감을 느끼기도 하는…, 작가 하하키기 호세이는 바로 그런 평범하고 성실한 주인공이 얼마나 선해질 수 있는지를 픽션의 형태로 가공했습니다.
우리를 구하는 건 슈퍼히어로가 아닙니다. TV 드라마에선 몰라도, 현실에선 어림없는 말입니다. 십여 년 전 그야말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어느 생명공학자 사태가 떠오릅니다. 그 사건은 많은 사람들을 홀렸던 ‘장기농장’의 꿈이었죠. 『장기농장』을 읽고, 다시금 가장 단순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게 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생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