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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마지막 회를 보며 폭풍오열하셨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다음날이 걱정될 만큼 눈물을 철철 흘렸고요. 드라마를 보셨던 대부분의 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아요. 결국 엄마(원미경 분)는 아빠(유동근 분) 곁에서 세상을 평화롭게 떠납니다. 참 아픔 많았던 그녀의 한 생도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망연자실하겠지만, 또 어쨌든 삶은 계속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그렇듯이….


“너 다 잊어버려도, 엄마 웃음도, 얼굴도 다 잊어버려도, 네가 이 엄마 뱃속에서 나온 건 잊으면 안 돼.”


엄마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최민호 분)에게 말하는 장면입니다. 아들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죠. 엄마는 이어 딸(최지우 분)에게 "사랑해. 너는 나지, 나는 너고. 알지, 그거?"라고 말하고 함께 통곡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번 생에서 참 아픔 많고 눈물 많았던 엄마를 잃었거나, 언젠가는 잃어야 할 운명입니다. 그 아픔과 한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요?

  

우리들이 모두 누군가의 뱃속에서 나왔다는 것, ‘너는 나이고, 나는 너’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만큼 날 사랑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존재가 바로 ‘엄마’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따뜻한 안도감을 전해 줍니다. 그녀는 이 세상을 하직하더라도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있을 거예요. 너무나 당연하게 말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엄마를 그런 존재로 완성시켜 주는 아빠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되겠죠. 우리는 아빠와 엄마의 로맨스,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사랑의 약속으로 태어났습니다. 엄마는 엄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여자였기 때문에 우릴 그토록 사랑해줄 수 있던 것이고요. 

***

작가 노희경은 평생 동안 엄마를 배신하고 어마어마한 아픔을 주었던 아빠를 미워했다고 합니다. (결국, 훗날 조금은 용서했지만요.) 그런 면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속 엄마는 훨씬 더 나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평생 가족에 치이면서 묵묵히 희생을 감수했다는 것은 다르지 않더라도, 결국 자신을 아껴주는 남편의 곁에서 조용히 눈을 감게 되니까요. 남편은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이었을지언정 마지막 순간 그녀를 향한 순애보를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당신은 이 좋은 집에서 20, 30년은 더 살겠지. 집이 좋아도 신나고 재미나 진 않겠다. 나 없으면.”


특히 마지막 회에선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났죠. 아내는 자신이 죽고 나면 좋은 집에 살아도 이젠 신나지 않겠다고 남편에게 투정을 부립니다. 화제를 전환하며 남편은 그녀에게 씻으라고 하지만, 아내는 피곤하다고 씻기 싫어합니다. 남편은 웬일로 자신이 씻겨주겠다고 나섭니다. 

욕조의 비누 거품 속에 자리한 아내의 머리를 감겨주는 씬에 이어, 조용한 별장에서 둘만의 시간을 누리며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어주는 장면은 그 자체로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훌륭한 변용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책 읽어주는 남자』는 <더 리더>의 원작 소설이지요.


“해가 길어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황혼 속에서 그녀와 함께 침대에 머물고 싶어서 더 오랫동안 책을 읽었다. 그녀가 내 몸 위에서 잠이 들고, 마당의 톱질 소리도 잠들고, 지빠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그리고 부엌에 있는 물건들의 색깔 중에서 약간 밝거나 약간 어두운 잿빛 색조만이 남게 될 때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60페이지 중에서


 남편은 『책 읽어주는 남자』의 이 구절을 골라서 읽어줍니다. 말 그대로 세상과 이별을 준비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읽어주는 책입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이 책은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1995년 출간했는데요. 두 연인의 짧지만 강렬했던 사랑을 홀로코스트의 비극, 역사의 반성과 세대를 넘나드는 고통이라는 키워드들 안에서 촘촘하게 묘사한 작품입니다. 

  

위의 구절은 청년 마이클이 한나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던 때의 기억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함께 머물고 싶어서 오랫동안 책을 읽던 마이클의 심정과 드라마 속 남편의 처지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런 순간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사랑의 기쁨과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책 읽어주는 남자』에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도 그 끝에는 이별과 죽음이 있습니다. 뒤이어 읽어주는 책의 구절은, 마이클과 한나의 영원한 이별의 순간을 묘사한 장면입니다.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채 자신의 벌을 감내해야 했던 한나. 그리고 자신이 그녀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마이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도 따라 일어섰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았다. 이미 벨이 두 번이나 울린 상태였다. 다른 여자들은 벌써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은 다시 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나는 그녀를 두 팔로 안았다. 그러나 그녀의 감촉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잘 가, 꼬마야.”

“당신도 잘 있어요.”

―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249페이지 중에서


운명적인 이별을 직감하는 그 순간, 우리들은 그 또는 그녀와 처음 사랑에 빠졌던 ‘꼬마 시절’로 되돌아갑니다.  왜 좀 더 일찍 마지막 회 같은 애틋한 시간들을 더 많이 갖질 못했을까요? 왜 세월의 무게감과 먹고사는 일에 그다지도 쫓기면서, 자신의 곁에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고 살았던 걸까요?

  

왜 자식들은 엄마의 힘이 되어주진 못할망정 그렇게나 괴롭히며 자라왔던 걸까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사랑과 이별, 죽음을 그린 드라마와 영화, 책을 찾게 되는 이유입니다. 여전히 못 다한 회한이 남아서 우리를 울게 만들지만, 우리는 또 다시 이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직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고, 그/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시간이 남아있음을 감사하며….

  

“잘 가, 꼬마야.”와 “당신도 잘 있어요.”라는 말을 주고받을 시간이 언젠간 올 것을 알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희경 작가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유죄’일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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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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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시공사 출판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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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의자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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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현관>을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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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S. L. 그레이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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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해드릴 책은 도시를 배경으로 한 현실적인 공포 스릴러소설을 선보이고 있는 S. L. 그레이의 최신작 《아파트먼트》입니다. S. L. 그레이는 시나리오 소설을 쓰는 새러 로츠와 작가이자 편집자인 루이스 그린버그의 공동 필명으로, '도시 공포 스릴러' 영역에서 독보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는 두 작가의 다섯 번째 소설인 《아파트먼트》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소설이 출간되기도 전에 영화로 제작하겠다고 나서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제가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 소설을 좀 더 짜릿하게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을 소개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할게요!



1. 숙박 공유 사이트를 이용한 완벽한 여행, 그 후 우리 집이 낯설다!


많은 분들이 에어비앤비나 카우치서핑 같은 숙박 공유 플랫폼을 이용해보셨을 텐데요. (저도 여행 경비를 줄이기 위해 에어비앤비를 종종 이용하는 터라 이 책에 급 흥미를 느꼈더랬지요!) 소설의 두 주인공 마크와 스테프 부부 역시 경제적인 이유로 숙박 공유 사이트를 이용한 여행을 계획합니다. 마침 프랑스의 매력적인 아파트에 살고 있는 프티 부부가 서로 집을 맞교환하여 지내면 어떻겠냐는 연락을 해옵니다. 급작스런 임신으로 신혼여행도 떠나지 못한 부부는 조금 늦은 신혼여행에 흥분과 설렘을 감추지 못합니다. 하지만 부푼 마음을 안고 도착한 파리의 아파트는 사진과는 달리 텅 비어 있는 데다가 낡고 황량하기만 합니다. 프티 부부와는 연락도 되지 않고 마크와 스테프는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지만 어떻게든 여행을 이어 가려고 노력합니다. 거기서부터 악몽이 시작되지요.   


이 소설을 즐길 첫 번째 장치로 '여행'이라는 현실적인 소재를 통해 낯선 곳에서 겪는 두려움과 공포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장면을 뽑았습니다. 일상 속의 공포를 극대화하는 도시 스릴러를 찾으신다면 이 책을 권합니다. 혹시 외국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신가요? 게다가 에어비앤비 같은 숙박 공유 플랫폼을 이용하신다고요? 당신이 비행기 안에서 읽어야 할 단 한 권의 책이 틀림없습니다.




2. 이상한 여자 미레유, 살아 움직이는 듯한 밀랍 인형 박물관, 죽은 딸의 환영, 집 안을 돌아다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아파트먼트》를 더 생생하게 즐길 두 번째 장치는 소설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섬찟한 장면들입니다. 텅 빈 아파트에 혼자 남아 살고 있는 미레유는 이곳은 위험하다고, 떠나라는 말만 반복합니다. 파리의 아파트 침실 안에서 양동이 세 개에 가득 들어찬 머리카락이 발견되고 마크는 머리카락을 본 이후부터 이상행동을 보이며 머리카락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죽은 동물들의 털을 잘라 모으기 시작하지만 점차 마크의 행동은 과감해집니다. 잠들어 있는 어린 딸 헤이든의 머리카락을 사각사각 자르는 장면에서는 등골이 서늘해지기도 했는데요.


섬세하고 치밀한 이야기 구성,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생생한 인물들의 묘사를 통해 독자들의 공포와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364쪽 분량의 소설은 그야 말로 페이지터너의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네, 그 어려운 일을 《아파트먼트》가 해냅니다!) 공포 소설 작가 R. L. 스타인은 "어둡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긴장과 공포를 떨칠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떨고 있다"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3. 심리적인 트라우마가 현실에서 어떻게 재현되는가?


이 소설의 마지막 장치는 잠재적인 트라우마가 개인에게 끼치는 양상입니다. 마크는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통받는 남자로 등장합니다. 스테프는 그런 마크를 끌어안으려고 노력하는 여성이지요. 첫 결혼의 실패로 깊은 상처를 간직한 마크는 스테프와 재혼하여 어린 딸 헤이든과 함께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무장한 강도들의 침입을 받고 부부의 삶은 다시 한 번 위기를 맞게 되는데요. 결국 과거의 트라우마에 잠식당하고 마는 마크를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잔인함이라는 두 가지 본능이 어떻게 체현되는지 흡입력 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안전하지 못하고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마크와 스테프가 드러내는 반응 역시 흥미롭습니다. 두 인물이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 얼마나 대조적인 양상을 띠는지, 그로 인해 어떤 결말을 맺게 되는지 함께 따라가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지만 여의치 못한 분들은 《아파트먼트》와 함께 파리로 잠깐 떠나보는 게 어떨까요? 책을 덮고나면 집 안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릴지도 모릅니다. 특히 침대 밑을 조심하세요!


_《아파트먼트》 편집자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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밈 : 언어가 사라진 세상
앨리너 그래이든 지음, 황근하 옮김 / 검은숲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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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가 있었다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김예진 옮김 / 검은숲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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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파가 있었다> 편집자 J입니다.

살벌한 추위에 다들 고생 많으십니다ㅠㅠ 이런 날씨엔 역시 이불 속에 들어가 귤 까먹으며 책 한 권 읽는 맛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야기할 책은 절찬리(이고 싶은!)에 예.약.판.매 중인 엘러리 퀸 컬렉션 : 《노파가 있었다》입니다.


엘러리 퀸 컬렉션을 모으고 계신 분들이라면 반가운 소식이지요? 특히나 이번 작품은 한동안 리얼리즘을 표방했던 엘러리 퀸 형제가 초기 소설 스타일의 비현실적인 퍼즐 미스터리 포맷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데요. 엘러리 퀸을 처음 접하신 분들도 좋습니다. 마더 구스 동요를 소재로 마치 한 편의 환상적인 동화를 연상시키는 이 이야기가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으리라 감히 단언해봅니다!


다른 어떤 말보다 《노파가 있었다》의 역자 후기로 이 책을 설명할까 합니다. 사실 후기에 스포일러가 들어 있어 고민했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꼭 소개하고 싶었그든요!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 이 후기는 《노파가 있었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에도 불구하고 나는 엘러리 퀸 전문가의 글이 읽고 싶다’는 분들은 아래 김예진 번역가 님의 후기를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럼 소개합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러리 퀸, 맨해튼의 토끼 굴에 뛰어들다


작가가 평생을 들여 한 주인공을 묘사하다 보면 주인공의 인물상 또한 작가를 따라 나이를 먹게 마련이다. 처음 등장할 때는 치기에 가득하고 자신만만했던 젊은이도 시간이 흐르면 조금 더 성숙한 사고방식을 갖게 되고,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도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기보다도 더욱 쓰는 이의 심정이 솔직하게 반영된다는 소설이라는 매체 속에서, 기나긴 세월 작가의 페르소나로서 함께한 주인공이 그 영향을 받는 현상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엘러리 퀸 또한 1929년 로마 극장 관객석의 느닷없는 시체와 함께 탄생한 이래 꾸준히 나이가 들었고, 오로지 ‘누가’,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는가에만 관심을 두었던 이 날카로운 젊은이도 점점 인간들 사이의 드라마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 사이 두 창조주들 역시 라디오 드라마,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독자에의 도전’뿐만 아니라 ‘청취자에의 도전’, ‘시청자에의 도전’을 던지며 퀸 부자가 활약하는 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리고 영상 매체에 활발하게 도전하던 할리우드 시기를 거쳐 이른바 ‘3기’라 불리는 라이츠빌로 돌아온 엘러리는 더욱 진중하고 차분해진 성격으로 1942년 《재앙의 거리》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 사이의 사연에 고뇌하고 슬퍼할 줄 아는, 인간미 가득하며 어른스러운 면모를 갖추게 된 인물로. 라이츠빌에 처음 도착하여 ‘콜럼버스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엘러리의 눈에 이 시골 마을은 그야말로 미국이라는 사회의 축소판으로 비쳤다. 그 눈은 단순한 사물을 관찰하는 차갑고 이성적인 눈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깃든 따스한 시선을 던지는 눈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인 1943년, 프레더릭 다네이와 만프레드 리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내놓았다. 현실 사회와의 관련도, 등장인물의 현실성도, 인물들 간의 얽히고설킨 복잡한 드라마도 없이 오로지 ‘옛 방식’대로 승부를 건 《노파가 있었다》였다. 냉혹하고 비정한 페이퍼백 하드보일드 작품들이 한창 횡행하던 시절 이는 꽤 흥미로운 시도였다. ‘마더 구스’ 등의 동요를 이용한 동화 같은 미스터리는 1928년 밴 다인이 내놓은 《비숍 살인 사건》 즈음의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40년대 들어서는 그리 흔하게 사용되는 소재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노파가 있었다》의 배경은 심지어 라이츠빌도 아니므로 라이츠빌 시리즈에 포함시킬 수도 없다. ‘노파’의 웅장한 저택은 허드슨강을 바라보는 뉴욕 한복판에 떡 버티고 있다. 엘러리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 집이나 아버지가 있는 경찰청에 얼마든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다.


책만 읽는 언니 옆에서 졸음을 참으며 연신 하품을 하다 시계를 보고 바삐 뛰어가는 흰토끼를 보고 저도 모르게 뒤따르게 된 앨리스처럼 엘러리 역시 법원에 앉아서 오지 않는 판사를 기다리느라 아버지와 벨리 경사 사이에 낀 채 꼼짝 못 하고 하품만 하다가, 흰토끼처럼 돌연 나타난 찰리 팩스턴이라는 변호사에게 이끌려 저도 모르게 기상천외한 토끼 굴 같은 포츠 저택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저택 한구석에는 수수께끼 같은 물질을 끝없이 끓여대는 과학자의 기괴한 탑이 있고, 고개를 돌리면 피터 팬의 환상적인 동화 속 오두막이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결투로 해결하자고 우겨대는 시대착오적인 남자가 있고, 또 한쪽에서는 왕년에 전장에서 활약 좀 했다는 중년 남자 둘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체커 게임을 하고 있으며, 이 모든 저택의 정점에는 신발 사업으로 ‘왕조’를 꾸린 하트 여왕 같은 노파가 앉아 있다가 신문기자들을 향해 총을 쏘아댄다. 시체 옆에는 영문 모를 닭고기 수프 그릇이 나뒹굴고 흉기는 플라타너스 나무 위 찌르레기 둥지 속에서 튀어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신문 카툰에서 ‘신발 속의 노파’라며 조롱조로 그려진 집안이라서인지 엘러리는 들어가 식탁에 앉자마자 포츠 집안 사람들의 모습을 마더 구스 동요와 바로 결부시켜 연상한다. 네온사인 글자가 번쩍이는 커다란 신발 동상 앞에 일단 발을 들인 순간, 애써 얻었던 진중함과 어른스러움은 안타깝게도 우선 잃어버리고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꾸며진 연극 무대 같은 집 안에서 우왕좌왕 일어나는 소동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현실감을 잊게 된다. 두 작가가 라디오 드라마를 한창 쓰던 와중이어서 그런지 가끔 나타나는 라디오 드라마 대본 같은 대화도 비현실성을 더해준다. 사실상 한 집안을 다스리는 폭군 같은 노파란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나 《Y의 비극》에서도 이미 등장한 소재였지만 《노파가 있었다》의 농담 같은 세계 속에서 결국 노파는 한없이 권위적이거나 한없이 음울할 수만은 없게 되고 말았다. 뭐,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되지 않고 자연사를 맞이할 수 있었던 건 그런 노파가 가졌던 일종의 유머 감각 덕분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여타 매체에서 먼저 태어나 이 책에서 생명력을 얻은 니키 포터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겠다. ‘빨간 머리의 깜찍하고 전형적인 미국 아가씨’로 묘사되는 니키는 당시 라디오 청취자들이 원하던 엘러리의 파트너상에 까무잡잡한 소년 주나보다 더 잘 부합했던 모양이다. 니키는 속기사라는 명목으로 취직했지만 결국은 엘러리의 ‘비서’로 자주 등장한다. 엘러리도 본업은 소설가지만 작품 속에서 소설 쓰는 모습이 자주 나오지는 않으니 비슷한 맥락의 직업인 셈이겠다.


아무것도 모른 채 범인과 결혼할 뻔했다가 광기의 토끼 굴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니키가 《범죄 캘린더》에 실린 단편 〈약손가락의 모험〉에서 신성한 결혼식의 수호자처럼 분개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어쨌든 니키는 이토록 사연 많은 집안에서 탈출한 생존자치고는 명랑하고 사랑스러우며 오지랖 넓은 조수가 되었다. 그러나 엘러리와 니키는 연인이 될 듯 말 듯 애매한 거리에 있으나 결코 연인이 되거나 결혼할 일은 없다. 왜냐하면 《탐정 탐구 생활》에서 두 사촌 형제가 그러지 않겠노라고 딱 잘라 말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이미 세상에 차고 넘치는 부부 탐정 위로 또 한 쌍의 부부 탐정 팀을 굳이 추가할 생각이 없고, 엘러리는 영원한 독신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 잠깐 등장했던 엘러리 퀸 부인은 영영 등장할 일이 없을지어다. 아멘!


일견 광기와 무논리로 가득해 보이는 뒤죽박죽 토끼 굴 세계 같은 무대에서 아주 사소한 단서로 이성적인 범죄자의 두뇌를 발견하고 사건을 극적으로 해결해낸 엘러리 퀸의 활약상은, 초기 국명 시리즈의 또박또박한 연역추리를 선호하던 독자들에게는 오랜만에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이 천천히 시간을 들여 성숙해졌다가도 가끔은 젊은 시절의 경쾌함을 떠올리곤 하는 것처럼, 농익은 인간 관찰을 한참 읽다 보면 때로는 가볍고 산뜻한 퍼즐 미스터리가 그리워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김예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학부 영어통번역학 전공. 양질의 미스터리 작품을 널리 소개하는 데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미국 총 미스터리》, 《스페인 곶 미스터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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