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사회입니다. 아니, 그야말로 심각한 ‘초고령화’ 사회라고 합니다. 노인 인구가 점점 더 늘어나고, 어르신들의 ‘실버 문화’도 확산되는 추세지만, 아직 이 나라는 노인들이 살기에 썩 마땅한 곳은 아닌 듯합니다. OECD 국가 중 노인빈곤율과 노인자살률 1위라는 악명을 언제쯤 탈피할 수 있을까요?
나이 드는 일은 절대적으로 평등합니다. 그러니 노년 계층에 대한 홀대는 우리 자신의 미래를 가볍게 여기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몸이 약해지는 일, 병에 걸리는 일, 고독에 익숙해지고, 죽음을 살갗으로 느끼며, 마침내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야 하는 일까지…. 모두 지극히 실존적이면서 지극히 공동체적인 일들입니다. 우리 누구도 그 숙명의 궤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실존과 공동체가 맞부딪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문학이 반짝이지 않을 리 없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선 ‘노년의 삶’을 다룬 문학 작품 네 편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1.『레저 시커』
(마이클 저두리언 지음 / 최세희 옮김 / 시공사)
삶의 황혼을 넘어서 이젠 정말 말년(末年)에 이른 80대 노부부가 있습니다. 중증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남편 존, 그리고 말기 암으로 고통 받는 아내 엘라.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야말로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이야기가 틀림없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두 사람에겐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미카엘 하네케가 영화 <아무르>에서 그렸던 것처럼 고통스러운 노부부의 결말을 봐야 하는 걸까요?
『레저 시커』의 저자 마이클 저두리언에 따르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해피 엔딩’은 가능합니다. 엘라와 존은 병원을 박차고 나와서 캠핑카 <레저 시커>에 올라탑니다. 그리곤 디트로이트에서 출발해 캘리포니아 디즈니랜드로 향하는 ‘최후의 여정’을 떠납니다. 자그마치 3,945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여행입니다. 그들이 머무르는 미국의 도시들이 곧 소설의 한 챕터 한 챕터입니다. 비장하고도 유쾌한 로드무비적 서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비현실적인 얘기라고 반문하시겠죠? 맞습니다. 이 소설은 비현실적입니다. 그러나 삶의 끝자락에서 고통을 참고 견디며 자신들만의 삶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노부부를 바라보노라면, 새삼 우리 삶의 본질을 새삼 되짚게 됩니다. 책을 덮은 후 여운이 짙게 남습니다.
만화적인 스토리 속에 구체성과 진정성이 배어 있는데, 아마도 그건 저자의 경험 탓일 거예요. 어린 시절 부모님과 <레저 시커>의 경로와 꼭 같은 횡단 여행을 즐기고, 5년이 넘게 알츠하이머로 지독한 고통을 겪던 아버지를 떠나보낸 저자 자신의 자전적 요소가 소설에 깊이 투영되었다고 합니다. 2017년 헬렌 미렌과 도널드 서덜랜드가 주연한 영화로도 개봉된다고 하니 꼭 한 번 읽어보시길!
2.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 장경렬 옮김 / 시공사)
2012년 어니스트 헤밍웨이 사망 50주기를 추모하며 출간되었던 <헤밍웨이 선집> 기억하시나요? 훌륭한 번역과 품격 있는 외양으로 헤밍웨이 팬들의 큰 호응을 받았던 바 있죠. 이 선집에는 초기 걸작 단편집 『우리들의 시대에』(1924)를 시작으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1926), 『무기여 잘 있어라』(1929),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그리고 『노인과 바다』(1952)까지 시기별 대표작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걸작들을 남긴 거장 어니스트 헤밍웨이. 하지만 굳이 노벨상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헤밍웨이 하면 역시 『노인과 바다』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지요. 만년의 헤밍웨이가 지독한 우울과 자괴감에 사로잡힌 채 간신히 써 내려간 소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최고의 영광을 돌려준 작품. 소설 속에서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노인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인간의 의지를 믿었던 노년의 헤밍웨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괴당할지언정 패배란 있을 수 없다”는 노인의 다짐과 함께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운명과 맞서 싸우는 데는 젊고 늙음이 따로 없습니다. 『노인과 바다』는 매 순간을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내야 하는 우리들 삶에 대한 묵직한 찬가입니다. 어른이 되어 꼭 한 번 다시 펼쳐 들어야 할 고전이기도 하고요.
3.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아마도 국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노인 소설’일 겁니다. 이 작품은 스웨덴 작은 마을의 양로원에서 살던 알란 칼손 할아버지가 자신의 백 세 생일날에 뛰쳐나와 벌이는 경쾌한 모험담입니다.
소설 속에서 노인 알란의 모험은 그의 어린 시절 성장 과정과 함께 격자식으로 펼쳐지는데, 특히 그가 전 세계를 떠돌며 20세기의 굵직굵직한 인물들 ― 아인슈타인과 스탈린, 마오쩌동, 그리고 김일성 등등 ― 과 조우하며 세계사의 대사건들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장면은 그야말로 스릴 만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흔히 노인에 대하여 갖고 있는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자신이 가진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삶을 순수하게 낙관하지 못한 채 과거를 연민하는 태도 말이죠.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노인의 이미지를 아주 유쾌하게 전복합니다. 알란은 결코 늙은 육신과 자신이 겪어내야 했던 신산한 삶을 한탄하지 않습니다. 아주 용감하고, 진취적이고, 쿨하게 미래를 개척해 나가죠.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이 전 세계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4. 『체호프 희곡 전집』
(안톤 체호프 지음 / 김규종 옮김 / 시공사)
그렇지만, 어쩌면 노년은 역시 우수(憂愁)의 시절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인생 전체가 실패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미 삶의 경로를 바꾸기엔 너무나 늦어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의 기분은 어떨까요? 이처럼 무력감과 상실감을 곱씹으면서 그저 관 속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는 노인들의 처연한 모습은 많은 문학과 예술 작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죠.
러시아 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희곡 작품들엔 쓸쓸하고 우울한 노인들의 독백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체호프 희곡 전집』에 수록된 <바냐 외삼촌>은 허덕허덕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체호프 자신의 지친 심경이 잘 엿보이는 작품입니다.
한평생 고되게 일하고 가업을 떠받들다가 늙어버린 바냐 외삼촌은, 이제는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는 모든 걸, 그 모든 걸 가질 수 있었던 그런 시간을 어리석게 놓쳐 버렸다는 생각에 괴로워합니다. 한때는 자신도 빛나는 개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되새기지만, 그렇다고 한들 지금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체호프의 여러 희곡에 노인들만 등장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희곡들에는 남녀노소와 지위를 막론하고, 결단코 삶을 새롭게 쇄신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다가 놓쳐버렸던 삶의 반짝이던 순간들을 안타까워하는 인물들로 가득합니다. 『벚나무 동산』의 지주와 귀족들도, 『갈매기』의 예술가 지망생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체호프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나이 든다는 것, 노년이란 하나의 알레고리일 뿐이라는 것을요.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인생을 늙은이처럼 살 때, 우리는 이미 다 폭삭 늙어버린 존재라는 것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