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일본 정부의 재해 대처는 악명을 떨칠 정도였다. 매뉴얼에만 의존하는 경직된 관료주의 탓에 다급한 상황에도 늑장 대처하기 일쑤였다. 사고수습과 물자 지원이 한시가 급한데도 고속도로 통행허가증을 받으려면 해당 경찰서에 직접 가서 등록해야 하는 평상시의 시스템이 1주일 넘도록바뀌지 않았다. 재해 지역 실종자 수색을 위해 구조견 5마리를 파견하려다 일본 당국이 ‘광견병 청정 지역‘이라며 난색을 표해 1마리만 보낸 나라도 있다. 긴급 상황에서도 절차를 따지느라 ‘골든 타임‘을 허비하는 당국에 분노가 폭발했다. - P205

일본인들에게 동일본 대지진은 2차 세계대전 패전에 맞먹는 대충격이었다.(중략) 문화비평가 우노 쓰네히로는 원전사고 이후 일본인들이 느낀 감각에 대해 "인간이 만들어 냈지만,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우리의 생활 세계를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존재가 "비일상적인 긴장감을 내포한 일상"을 살아가도록 만들고 있다고 표현했다. - P209

재일지식인 서경식 등 마이너리티들은 3·11 이후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원전사고는 명백히 ‘인재‘이자 전 세계의 환경과 인류에 해를 입히는 ‘가해‘인데도 일본은 자신들이 겪는 고난과 재난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중략)
"한 묶음의 레토릭으로 국민적 단결을 고무하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는 것이겠지만, 그 단결을 위해서는 ‘국민의 적‘이 필요한 게 당연한 이치다. 앞으로 어려움이 장기화되고 지배층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쌓여 가면 틀림없이 적을 만들어 내려 할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국민은 ‘비국민‘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중략) 그럴 때 ‘적‘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은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다." - P210

냉전 해체와 함께 자민-사회당의 보-혁 동거체제가 무너진 뒤 소선거구제 도입으로 보수 양당제 체제로 이행한 일본 정치는 자민당의 대체 세력으로 기대되던 민주당이 철저히 몰락하면서 당초 기대했던 시스템의 균형이 상실되고 말았다. 역사수정주의를 장착한 네오콘 그룹의 거침없는 독주가 2010년대 내내 펼쳐지게 됐다. - P211

고엔지 시위는 한동안 일본 사회를 달궜던 반핵 시위의 예고편이었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청년들이 사고를 계기로 시위에 참가할 뿐 아니라 직접 조직하는 ‘데모 데뷔‘가 사회 현상이 되었다. 1970년대 극렬했던 학생운동 탓에 시위가 터부시됐던 일본 사회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P214

"일본이 작은 나라가 되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인가요?" 도쿄 특유의 무더위에 햇살마저 쨍쨍 내리쬐던 이날 연단에 나선 81세 여성 작가 사와치 히사에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귓전에 생생하다. 그의 질문은 직접적으로는 일본사회가 ‘원전을 안고 갈 것인가‘라는 논쟁을 향한 것이지만 보다 넓게는 ‘포스트 후쿠시마‘의 일본의 방향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원전사고 이후 일본에서는 ‘하산 논쟁‘이 불거졌다. 하산론은 일본이 이미 세계 2위 경제대국이라는 산 정상에 올랐으니 안전하게 하산로를밟아 내려가자는 ‘탈성장론‘을 가리킨다.(중략) 20년에 걸친 장기 불황에 저출산·고령화로 경제 활력이 줄어들면서 일본은 2010년 국내총생산(GDP)이 중국에 추월당했다. 일본이 ‘하산의 시대‘에 접어들었는데도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성장에 집착하는 바람에 해마다 3만 명이 넘는 이들이 자살할 정도로 국민이 불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하산론의 주장이다. - P217

센카쿠 문제는 대지진과 원전사고로 일본 사회에 형성된 ‘피해자 의식‘을 한껏 자극한 이슈였다. 지진이 빈발하는 일본이 수십 개의 원전을 국책사업으로 지었던 것이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화근인 셈이고, 그렇다면 일본은 재난의 피해자이면서 전 세계 환경과 인류에 해를 입힌 ‘가해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만 몰두하면서 "미증유의 재해 극복을 위해 단결하자"는 ‘재해 내셔널리즘‘에 휩싸였다. 영토 문제는 그 단결을 촉진시키는 데 안성맞춤의 소재였다. - P220

일본의 우익들은 부부가 다른 성을 갖는 것을 허용하는 부부별성제를 반대한다. 정치는 남성에게 맡기고 여성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고남편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을 ‘아름다운 나라‘의 미풍양속으로 여긴다.(중략)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여성 인권과 성평등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인식이 한국에 비해 낮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저녁을 겸한 토론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주문한 도시락이 오자 좌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여성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시락을 참석자들에게 분배하고, 그보다 젊은 남성들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어 괜히 필자가 안절부절 못한 적이 있었다. 일상에서 이런 경우를 접할 때마다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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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전공투 투쟁에서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정치의 계절‘이 종언을 고한 이후의 일본은 ‘공동의 시대‘ 혹은 ‘아버지 부재‘(중심이념의 부재) 시대가 펼쳐졌다. ‘사회혁명‘ 같은 거대 서사(커다란 한 방)가 사라진 일본에서 서브컬처, 특히 만화가 제공하는 핵전쟁과 세계종말의 상상력에 맡긴 채 소비사회의 일상을 살아가던 이들은 냉전이 맥없이 붕괴된 상황에 허탈감을 안게 된다. 이 공허함을 파고든 것이 1990년대 전반 번성했던 옴진리교 등 신흥 종교가 제공하는 ‘가짜 서사였다. 서브컬처 영향이 강한 세대에게 옴진리교의 세계관은 친숙했다.(중략) 옴진리교가 설파하는 ‘세계 최종전쟁‘의 서사는 1980년대 서브컬처의 서사를 베껴 온 것이었다.
옴진리교의 종말 서사는 기성세대와 기존 질서에 적의를 느끼면서 세상을 리셋reset할 커다란 한 방을 기대하던 포스트 단카이 세대들을 유혹했다. 지루한 소비사회의 일상이 박탈해 버린 ‘삶의 의미를 되찾아 준다고 그들은 여겼다. - P137

‘물질은 넘쳐나지만 의미는 빈곤한 세상‘을 바꾸려는 옴진리교의 테러가 실패하자 청년들은 결국 국가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른 인종이나 국가에 증오감을 쏟아내는 우익단체들의 ‘큰 이야기‘에 탐닉하게 된 것이다. - P138

고바야시는 ‘아버지의 부재‘ 시대에 익숙해진 청년들 앞에 터무니없이 미화된 조부들을 불러내 대면케 한다. 그러나 조부들이 벌인 일은 난징대학살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범죄들이었다. 그들이 살았던 전시는 국가 전체에 심각한 부조리와 허위, 위선이 판치던 시절이었다. - P140

신화처럼 추앙되는 가미카제(자살특공대)도 과장과 기만 투성이였다. 특공대 전과는 과장되기 일쑤여서 필리핀 전선의 어떤 작전에서는 24기의 특공기가 군함 37척을 격침했다는 보고가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특공대원이 생환하면 큰일이었다. 전투기 고장으로 생환한 대원을 죽이기 위해 특공대를 투입한 적도 있었다. - P141

특공대로 가짜 전과를 만들어 냈다. 게다가 일단 특공에 나갔던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엄청나게 곤란한 일이다. 기껏 만들어 낸 가짜 전과가 없어지고, 특진을 신청한 것도 거짓말이 된다. 이러면 누가 뭐라 해도 장본인이 죽어 주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를 않는다. - P142

한류가 일본에 본격적으로 상륙하던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는 ‘혐한‘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류는 처음부터 혐한을 동반했던 것이다.
넷우익의 세력화를 2002년 전후로 보는 견해가 많다. 2002년이라는 시점이 중요한데, 한·일 공동월드컵 개최와 북한의 ‘일본인 납치 시인‘이라는 두 가지 이슈가 남북한에 대한 반감을 키웠기 때문이다. - P155

탈냉전 이후 한국, 중국의 국력이 급성장하고, 일본이 봉인해 온 과거사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동아시아와 관계를 맺어 좋을 것 없다‘는 ‘탈아脫亞심리‘가 확산된 것이다. 탈아 심리는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폐기하고 ‘인도-태평양‘ 담론을 주창한 아베의 대외 구상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작용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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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최고지도자‘가 직접 사죄까지 하며 납치 문제 해결을 시도했으나 일본이 수용하지 않자 해법 도출이 불가능해졌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전원 귀환‘이라는 넘을 수 없는 허들을 설정해 납치 문제를 ‘영구미제‘로만든 것은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 지위에 서게 된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처지의 뒤바뀜에서 일본인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다"는 저널리스트 후나바시 요이치의 말은 일본인들의 심리를 정확히 대변했다. - P110

미국의 원폭 사용을 규탄하고 침략전쟁에 대한 자기비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피폭의 비극을 인류의 평화에 대한 보편적인 염원으로 ‘탈역사화‘함으로써 일본의 ‘원폭 피해자 정체성‘은 공허함을 면치 못했다. 이 정체성에 기반한 전후 평화주의가 일본 사회에 공고하게 뿌리내리기 어려웠던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그러다 2002년 ‘가해자가 있는 피해자의 처지에 설 결정적인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이 1970~1980년대 일본인 납치 사실을 공식 인정한 것은 일본이 전후 처음으로 가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피해자 정체성을 획득하도록 했다. - P111

납치 문제는 탈냉전 이후 일본의 보통국가 전략에 적극적으로 동원됐다.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이 2010년대 일본의 안보화를 추동하기에 앞서 납치 문제는 2000년대 일본의 보통국가 전략을 이끌었다. ‘커튼 뒤‘에 가려진 중국을 직접 겨냥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북한의 납치 문제는 일본의 안보화를 추동하기 위한 국민적 지지의 기반이자 동력으로 활용됐다. - P113

중국과 대만이 1970년대 들어 영유권을 제기하게 된 것은 1968년 유엔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ECAFE가 동중국해 일대 해양 조사를 실시한 결과 센카쿠 열도 주변 해역에 다량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 P117

중국·한국과의 영토 갈등은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의 고삐가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장기 불황에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덮쳤고, 그 위에 중국·한국과의 영토 갈등이 점화되면서 ‘강한 일본‘을 희구하는열망이 확산됐다. 그러나 이를 합리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리더십은 없었던 것이 일본의 한계였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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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 좌파가 식민주의 청산 투쟁을 놓아버린 것은 천황제와의 정면 대결을 포기한 데 따른 논리적 귀결이다. 일본공산당은 전전 시기 천황제 폐지 투쟁을 벌이다가 대다수가 천황제를 긍정하는 쪽으로 전향한 바 있다. 패전 초기 ‘해방군‘으로 인식되던 미군정마저 천황을 용인하자 천황제 폐지 슬로건을 던져 버렸다. 천황제를 옹호하면서 전쟁 및 식민 지배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좌파와 리버럴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 P99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 과정에서 보수 측이 오키나와를 안보조약의 적용 범위인 ‘일본‘에 포함시키려 하자 사회당이 반대해 오키나와가 안보조약의 적용 범위에서 제외됐다. 이는 ‘오키나와가 공격당해도 본토만 공격당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것이어서 사회당의 반전 평화주의가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드러냈다. 사회당 등 반전 평화세력에게 오키나와는 방파제나 사석에 불과했던 것이다. - P100

무라야마 총리는 종전 50년 담화 직후 기자회견에서 천황의 전쟁 책임을 묻는 질문에 "그것은 없다"고 답했다.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의 최종 책임자인 천황을 부인하지 못한 좌파의 비겁함이 경박한 ‘무장해제‘로 이어진 것이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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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중화 질서를 깨트리고 패권을 추구하면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동아 공영권을 표방했다. 서구 열강의 공세에 동아시아가 협력해 대응해야 한다는 취지이지만,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위한 수사에 불과했다. 일본은 조선 병합,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을 자행함으로써 그 허구성을 증명했다. 이런 역사는 전후 80년을 맞는 오늘날에도 동아시아에서 일본에 대한 불신의 근거로 작용한다. - P52

오키나와는 ‘평화헌법 보유국‘이자 ‘세계 최강의 군사국가인 미국의 강력한 조력자‘라는 전후 일본의 모순이 집약된 곳이며, 그 모순을 본토의 일본인이 직시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장소로 기능해 온 것이다. - P62

27년간의 미군 통치를 받았을 때나 일본으로 귀속된 뒤에도 미군기지라는 오키나와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 전체 면적의 0.6퍼센트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일본 전체 미군기지의 75퍼센트가 집중돼 있고, 오키나와 본섬의 20퍼센트가 미군기지의 공여지로 제공되고 있다. ‘작은 바구니(오키나와)에 달걀(미군기지)이 너무 많이 담긴‘ 것이다. 오키나와는 미군 주둔으로 인한 각종 사건·사고, 환경오염, 소음 공해 등 다방면에 걸쳐 고통받고 있다. - P63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하토야마 총리의 사임을 "헤이세이 정치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면서 하토야마가 충돌한 상대는 ‘대미 종속 체제‘였다고 논평했다. 하토야마의 기지 이전 시도에 일본 정치권은 물론 관료, 재계, 학계, 언론등 기성 권력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집중 포화를 퍼부었고,
하토야마는 "저놈은 우주인"이라며 인격모독까지 당했다. ‘국체‘나 다름없는 대미 종속 체제의 가공할 만한 힘을 보여 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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