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은 개혁개방 이후 다양한 형태의 ‘바람‘을 겪었지만 그중에서도 한국바람은 연변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노동시장과 이주 정책, 관련 법규를 재편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 이후 식당, 건설, 돌봄 제공 부문 등 한국 사회 곳곳에서 조선족 이주노동자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한국 정부는 이들을 수용할 제도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조선족 이주자는 미등록 노동자가 되었고, 2000년대 중반까지 추방의 불안 속에서 시달려야 했다. - P91

1990년대 초 친척 방문으로 시작된 한국행이 몇 년 사이에 이주노동의 형태로 급속히 진화하자, 조선족과 한국 친척들은 친척방문비자가 지닌 상호 이익적 측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당 비자는 이주 시장에서 ‘상품화‘ 되기 시작했다. 나는 조선족이 한국 친척들과 ‘비자 거래‘를 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을 수 있었다. - P93

 이렇듯 ‘사업 같은‘ 비자 거래를 마치고 나면 양측이 등을 돌리는 일이 다반사였고, 아예 절연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연변에서는 다른 중국동북 지역에 비해 친척방문비자에 의존해 한국에 입국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드물었기 때문에, 한국 쪽 친족 관계는 그 존재만으로도 귀중한 가치가 있었다. 한국에 친척을 가진 연변 조선족은 이를 최대한 이용했으며, 그렇게 성사된 한국 방문은 급속한 경제적 성과로 이어졌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부유해진 조선족들은 연변에서 코리안 드림을 부추기고 가속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P95

가족 중 누군가가 한국인과 결혼하면 가족 구성원들은 초청받을 권리를 갖게되고, 이는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이전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이 직접 사용할 수 없는 경우, 비자는 ‘시장‘으로 나와 한국행을 희망하는 ‘고객‘에게 판매될 수 있다. 이렇듯 이주 시장에서 상품으로 획득한 권리의 결과로 생긴 친족 관계는 ‘서류 친족‘이 되고, 국경을 넘는 이주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경제적 가치로 작동한다. 냉전 시기 신변의 위협으로 여겨졌던남한 친척과의 관계가 ‘한국바람‘이 불면서 귀중한 잠재가치로 변화한 것이다. 반면 실제 혈연관계에 있던 북한 친척과의 유대는 흐려져갔다. - P97

이렇듯 ‘재외동포법‘은 임의적 포섭과 선택적 배제로 인해 "위계적 국적"을 전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국과 일본의 ‘부자 사촌‘은 포섭하면서 중국과 구소련의 ‘가난한 사촌‘은 배제한다는 것이다. 이 법은 특히 조선족의 법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상당수 조선족이 식민지 시기(1909~1945) 또는 그 이전에 중국(당시 만주)으로 이주하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 시민권을 부여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 P102

1992년 한중 수교 정상화 이전까지 한국에서 조선족의 존재나 그 역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중공‘이라 불렸던 공산주의 중국은 소위 ‘빨갱이 콤플렉스‘로 대표되는 한국의 반공주의 문화와 정치 환경에서 금기시된 주제였기 때문이다. - P103

교회에서 만난 조선족 여성 대부분은 ‘불법 체류자‘로서 추방될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조선족의 타자성은 ‘미등록‘이라는 체류 조건 때문에 사회 서비스를 충분히 누릴 수 없다는 점에서 드러났다. 미등록 조선족은의료보험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프면 교회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나 아는 사람을 통해 약을 구했다. - P109

조선족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한국인과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추방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정책을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특히 한국 정부가 미등록 이주자를 체포하거나 추방하는 모습을 보며,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는 굴욕감을 느꼈다. 조선족은 ‘같은 한민족‘을 대하는 한국 정부의 방식에 대해 자주 불만을 제기했고 친구들이 전해주는 소문이나 미등록 이주자들의 추방을 다룬 언론 보도를 접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 P113

이주자 신분, 노동자 계급의 정체성, 그리고 조선족이라는 민족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인 H-2 비자는 조선족을 한국 노동시장에 공식적으로 편입시켰다. 이들을 이주노동자로 공식 범주화하는 것은 노동시장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서 조선족에 대한 차별을 가시화하는 결과를낳았다. 조선족이라는 용어는 점차 ‘중국‘, ‘사회주의‘와 결합된 의미를 내포하며 그들을 한국 사회 내에서 타자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게 되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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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들이 연변의 경제적 성공과 중국의 경제적 성공을 구별 짓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연변은 분명 중국 영토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완전히 중국 땅은 아닌 것처럼, 다른 중국 지역과는 별개의 구역인 것처럼 언급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한족을 ‘중국 사람‘이라 부르고, 자신들은 ‘조선족‘이라칭하며, 조선족과 ‘진짜‘ 중국인을 구분하는 언어 습관을 보였다. 한국계 중국인이 스스로를 가리켜 칭하는 ‘조선족‘이라는 명칭에는, 자신들이 한족과 동일한 시민권을 누리지만 민족적으로는 확실히 다르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이러한 구별 짓기를 통해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정착민의 후예임을 일상적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 P59

나는 국경과 변경지역이라는 개념이 분단된 조국에 인접하며 거주하는 중국 내 소수민족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원리로 작동하는 순간을 자주 목도했다. 이런 의미에서 연변의 지리는 그 지역 사람들이 처한 정서 조건, 즉 ‘변경지역에 사는 정착 이주민‘이라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근간이 되기도 한다. - P60

연변은 예측 불가능한 한국, 중국 등의 나라와 북한을 잇는 통로이자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처럼 변경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입지는 연변에서 냉전의 긴장감을 지속시키는 요소로 작용했고, 그 결과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남북한 모두로부터 정치적 영향을 받았다. - P61

변경지역은 두 세계를 연결하는 모호한 공간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변방인의 시야와 주변화된 느낌과 함께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라는 경계에 선 감각을 심어 놓는다. 또한 변경지역은 사람들이 "양면적" 세계를 한눈에 담으면서 지배적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과 복합적 정체성까지 표출할 수 있는 중첩적, 중층적 공간이기도 하다. - P62

조선족은 연변에 소속감을 가지면서도 불편함 또한 느끼는데, 이는 연변이 편안한 민족 구역인 동시에 더 큰 세계와의 교류를 제한하는 국지적 변경지역이기 때문이다. 연변은 조선족의 민족적 중심지이자 집거지이다. 나는 조선족이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소외된 변경지역을 떠나려 애쓰면서도, 민족적 집거지로서 연변에 깊은 안착감을 느끼는 순간을 자주 목격했다. 한국과 중국의 경제 개혁으로 재편된 소수민족 변경지역 연변에는 바바가 말한 "낯섦" (떠나고자 하면서 머물고자 하는 이중적 감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으며, 연변 주민들은 ‘이주의 바람‘에 강한 친화성을 보이면서 외부 세계와의 적극적인 접촉을 시도해왔다. - P63

1945년 일본이 만주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중국인, 한인, 일본인 간의 민족적 긴장이 만주국 체제 아래 억눌려 있었다. 내가 만났던 조선족들은 자신이 일본과 국민당을 상대로 한 해방 전쟁에 기여했고, 사회주의 혁명에도 깊이 관여했다는 점을 강조했다.(중략)
그러나 중국 국적의 소수민족으로 인정받고 난 뒤로도, 조선족은 국가적 정체성보다 민족적 정체성을 우선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만났던 80세 전후의 조선족 공산당원들은 1950년대 당시 한반도에 대해 느꼈던 감정적·민족적 애착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 P67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들어 상황은 급변했다. 1958년에 시작된 ‘중국 정체성 교육‘은조선족이 중국 공민이며, 중국만이 유일한 조국이라고 가르쳤다.
문화대혁명은 조선족에게 특히 가혹했다. 조선족을 숙청과 박해의 대상으로 삼은 상황에서, 남북한과의 민족적 유사성이 문제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민족성‘을 드러내는 문화와 담론이 중국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며 엄격히 금지되었다. - P68

해럴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을 문명화 프로젝트로 규정하면서, 중국 중앙정부가 한족 중심의 시각에서 소수민족을 바라보며 후진적이고 미개하고 불결하고 우매하다는 "민족적 낙인"을 찍음으로써 그들의 주변성을 야기했다고 분석한다. 중국이 1950년대 실시한 민족 분류 프로젝트로서 고안해낸 임의적이고 단순화된 민족 범주는 여러 민족국가-집단이 복잡하게 얽힌 역사, 문화, 정치를 외면한 채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치적 언설 아래 다양한 소수민족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 P72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의 민족 관련 담론은 ‘민족 개념의 활성화‘ 과정뿐만 아니라, ‘한국바람‘에 의해서도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소수민족의 사례와 차이점을 지닌다. (중략) 조선족은 국제 이주를 통해 국경을 넘는 ‘월경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각시켜왔다. 이는 국제 노동시장에서 조선족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자 자산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해,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국경 넘기를 통해 조선족은 자신의 민족성을 여러 차례에 걸쳐 재정의해온 것이다. - P74

지난 30년 동안 연변에서는 한족 인구가 급증하여 전체 인구의 70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족이 더 나은 삶을 찾아 연변을 떠나고, 한족 또한 더 나은 삶을 찾아 연변으로 이주한 결과이다. 이처럼 ‘들어오기와 나가기‘, ‘머물기와 떠나기‘와 같은 다양한 이주의 흐름 속에서 소수민족 지역의 경관이 점차 재편되었다. 내가 조선족들과 나눈 일상 대화에서는 급격한 한족 인구 변화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자주 드러났다. - P80

한족과 조선족 사이의 긴장은 ‘민족적 안정감‘과 공존한다. 이 편안함은 민족성에 따른 공간 분리를 토대로 한다. 우선 학교가 분리되어 있다. 조선족과 한족은 서로 다른 학교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교육을 받는다. 그 결과 사회적 연결망 또한 민족적으로 구분되는 경향이 있다. - P81

연변 조선족은 그 민족적 편안함 속에서 자신들이 국지적이고 고립된 소수민족 지구에 살고 있다는 현실을 깨닫기도 한다. 다시 말해 ‘연변이야말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인식은 연변이 작고 후진적이며 변방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동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 P82

대다수 조선족은 서울을 방문하기 전까지 연변을 벗어나 다른 중국 도시를 가본 경험이 없었다. 한국으로 이주한조선족 대부분에게 서울은 그들이 처음 마주한 가장 큰 도시였다. 중국 도시들에 대해서는 때때로 애매한 불편함과 두려움을 느끼는 조선족이 많지만, 서울은 그들에게 안락하고 친숙한 정서를 주었다. 이처럼 편안한 느낌을 형성하는 데에는언어적 유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한국어로 적혀 있고 누구나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이다. - P83

조선족이 대규모로, 때로는 무모하리만치 끈질기게 한국으로의 이주노동을 감행해온 이유는 단지 한국과 중국 간의 엄청난 소득 격차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에 대해 느끼는 민족적 친밀감 때문이기도 했다. - P84

권헌익이 지적했듯, ‘1989년 이후‘나 ‘공산주의 붕괴 이후‘ 같은 명확한 시대 구분은 냉전을 유럽 중심으로 이해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지역적으로 다양한 사상과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냉전의 ‘종식‘이라는 획일적인 시대 구분에 기대고 있다. 마찬가지로, 널리 통용되는 ‘포스트 사회주의‘ 역시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난 급진적 다양성을 간과한 용어이다. - P85

나는 ‘한국바람‘이 급격한 경제 발전과 근대적 삶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조선족이 과거와 미래, 정치와 경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느끼는 양가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상징적 매개라고생각한다. 광범위한 국제 이주와 급변하는 경제 환경에 직면한 조선족은 포스트 사회주의와 포스트 냉전 시대의 교차점에서 생겨난 한국바람에 영향을 받으면서 ‘연변식 사회주의‘ 속에 놓인 자신들의 민족적 위치를 재조정하고 있다. - P86

연변은 주민들이 편안하게 정착하여 민족구역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는 곳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변방의 소외된 소수민족 지역이기도 하다. 연변은 머물고 싶으면서도 떠나고 싶은 복합적 욕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층적 공간이다. 연변은 이 지역에 불었던 여러 종류의 바람에 취약성을 보일지도 모른다. 특히 ‘한국바람‘은 조선족이 한국 노동시장과의 민족적·문화적 친밀감을 바탕으로 경험하게 된 개혁개방 경제의 독특한 결과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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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다 한국에 갔다"거나 "두 명만 모이면 한국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처럼, 지난 30년간 한국바람은 연변 어디에나 불었다. - P21

조선족 사회에서는 중국의 급격한 사유화 속에서 농민과 노동자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수단은 바로 ‘한국으로의 이주노동‘이라는 믿음이 오랫동안 자리해왔다. 1990년대 초 연변을 중심으로 회자되었던 코리안 드림은 이른바 ‘만원호‘라는 용어로 구체화되었는데, 이는 한국에서 단기간에 벌어들인 1만 위안(당시 중국에서 ‘큰돈‘을 상징하던 금액)으로 연변에 번듯한 새집을 장만한 가구를 일컫는다. - P21

지난 30년간 한국바람은 조선족의 삶을 크게 바꾸었을 뿐아니라, 연변에 남은 자들과 연변이라는 공간에도 깊은 변화의 흔적을 남겼다. 연변에는 누군가의 귀환을 기다리는 사람들, 한국에서 보내온 돈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 이주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이주자가 남긴 빈집과 땅과 일자리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 P22

‘떠나기‘는 단순히 종적을 감추거나 다른 나라로의 물리적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반복적 이동을 경험한 수많은 조선족에게 ‘떠나기‘는 생활 속 깊이 자리한 물질적·정서적 기반이자, 익숙해진 삶의 조건을 뜻한다. - P26

지난 30년간 한국바람은 조선족에게 희망찬 미래를 꿈꾸게 한 조건이자, 오래된 관계와 공동체를 무너뜨릴 만큼 파괴적인 위협으로 작동해왔다. 따라서 한국바람은 물질적 성공의 원천일 뿐 아니라, 조선족이 과거와 미래, 정치와 경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와 맺는 관계를 결합하는 상징적 수단이기도 하다. - P27

시장경제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장거리 여행은 조선족에게 새로운 자기 발견의 기회를 안겨주었다. 소수민족 지역에서 성장한 조선족은 이 먼 여행을 통해 더 넓은 중국과 마주했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어 구사력 부족과 ‘진짜‘ 중국 문화에 대한 거리감을 실감하며 소수민족으로서 자신들의 지위를 깨닫기도 했다. - P32

조선족의 이주는 경제적 필요와 정치적 혼란에 놓인 다양한 이주의 흐름들과 함께 살펴봐야 한다. 단순히 "이동성"의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이주의 한 형태", 즉 국민국가로부터 상당한 규제를 받게 된 대규모 인구 이동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 P45

연변으로 유입된 송금액은 연변의 경관 및 민족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조화했다. 한국행을 택한 조선족 개인의 노동 윤리나 뚜렷한 목적 의식과는 별개로, 송금 의존형 경제는 환율과 국제 경제 요인에 취약성을 보인다.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조선족 노동시장을 강타했던 당시 상황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잘 드러난다. - P48

최근 들어 오랜 기간 한국에 체류했던 조선족 이주자들은 중국의 변화를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는 데다가 한국으로 가지 않은 이들에 비해 자신들이 뒤처졌다는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한국바람‘에 휩쓸려 반복적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주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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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로 이주했지만,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과는 차별되는 법적, 문화적 위상을 갖고 자리 잡아가고 있다. - P14

한국어가 모국어인 내가 영어로 쓴 책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이 책은 ‘중층적인 번역의 과정‘과 ‘시차의 글쓰기‘ 그 자체다. 번역은 단지 언어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시간의 문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배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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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인민의 초상 - 개혁개방에서 시진핑 시대까지 중국의 두 세대가 건너온 강 걸작 논픽션 29
피터 헤슬러 지음, 박경환.윤영수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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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저자의 전작 <갑골문자>에 비해 번역이 최소한 백만 배쯤 좋다. 잘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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