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 좌파가 식민주의 청산 투쟁을 놓아버린 것은 천황제와의 정면 대결을 포기한 데 따른 논리적 귀결이다. 일본공산당은 전전 시기 천황제 폐지 투쟁을 벌이다가 대다수가 천황제를 긍정하는 쪽으로 전향한 바 있다. 패전 초기 ‘해방군‘으로 인식되던 미군정마저 천황을 용인하자 천황제 폐지 슬로건을 던져 버렸다. 천황제를 옹호하면서 전쟁 및 식민 지배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좌파와 리버럴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 P99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 과정에서 보수 측이 오키나와를 안보조약의 적용 범위인 ‘일본‘에 포함시키려 하자 사회당이 반대해 오키나와가 안보조약의 적용 범위에서 제외됐다. 이는 ‘오키나와가 공격당해도 본토만 공격당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것이어서 사회당의 반전 평화주의가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드러냈다. 사회당 등 반전 평화세력에게 오키나와는 방파제나 사석에 불과했던 것이다. - P100

무라야마 총리는 종전 50년 담화 직후 기자회견에서 천황의 전쟁 책임을 묻는 질문에 "그것은 없다"고 답했다.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의 최종 책임자인 천황을 부인하지 못한 좌파의 비겁함이 경박한 ‘무장해제‘로 이어진 것이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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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중화 질서를 깨트리고 패권을 추구하면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동아 공영권을 표방했다. 서구 열강의 공세에 동아시아가 협력해 대응해야 한다는 취지이지만,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위한 수사에 불과했다. 일본은 조선 병합,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을 자행함으로써 그 허구성을 증명했다. 이런 역사는 전후 80년을 맞는 오늘날에도 동아시아에서 일본에 대한 불신의 근거로 작용한다. - P52

오키나와는 ‘평화헌법 보유국‘이자 ‘세계 최강의 군사국가인 미국의 강력한 조력자‘라는 전후 일본의 모순이 집약된 곳이며, 그 모순을 본토의 일본인이 직시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장소로 기능해 온 것이다. - P62

27년간의 미군 통치를 받았을 때나 일본으로 귀속된 뒤에도 미군기지라는 오키나와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 전체 면적의 0.6퍼센트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일본 전체 미군기지의 75퍼센트가 집중돼 있고, 오키나와 본섬의 20퍼센트가 미군기지의 공여지로 제공되고 있다. ‘작은 바구니(오키나와)에 달걀(미군기지)이 너무 많이 담긴‘ 것이다. 오키나와는 미군 주둔으로 인한 각종 사건·사고, 환경오염, 소음 공해 등 다방면에 걸쳐 고통받고 있다. - P63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하토야마 총리의 사임을 "헤이세이 정치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면서 하토야마가 충돌한 상대는 ‘대미 종속 체제‘였다고 논평했다. 하토야마의 기지 이전 시도에 일본 정치권은 물론 관료, 재계, 학계, 언론등 기성 권력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집중 포화를 퍼부었고,
하토야마는 "저놈은 우주인"이라며 인격모독까지 당했다. ‘국체‘나 다름없는 대미 종속 체제의 가공할 만한 힘을 보여 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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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사고와 일본 정부의 사고 대응의 난맥상, 도쿄전력의 은폐 체질은 ‘일본은 안전대국‘이라는 선입견을 산산조각 냈다. 기자 초년병 시절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 재난 현장 취재를 할 때마다 늘 따라 배워야 할 안전선진국으로 여겨졌던 일본의 민낯은 초라했다. - P10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19세기 개항과 근대화, 침략 전쟁과 식민주의, 패전 후의 경제 성장이 서로 뒤얽히면서 중층화된 일본 사회의 적폐가 극적으로 표출된 사건이다. - P11

일본 전자업체 소니가 1989년 9월 할리우드 대표 영화사인 컬럼비아픽처스를 사들였고, 10월에는 미쓰비시가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뉴욕 록펠러센터를 20억 달러에 인수했다. 미국인들은 이를 진주만 공습과 다름없는 ‘경제 공습‘으로 받아들였다. 《뉴욕타임스》와 CBS 방송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8퍼센트가 ‘소련의 군사력보다 일본의 경제력이 미국 안보에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응답할 정도였다. - P22

식민지와 침략정책의 과거사에 대한 청산 없이 미국 주도의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안주해 버린 일본은 45년 만에 주변국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민낯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주변국들이 제시하는 일본의 ‘과오 목록‘은 근현대사에서 전혀 배우지 못했거나 피상적으로만 알던 것들이었다.(중략) 일본은 지나간 잘못에 대해 진지하게 대면하고 성찰하기보다는 내셔널리즘의 프레임을 동원해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 P36

냉전체제의 붕괴는 동아시아에서 식민주의의 봉인된 기억이 해방되는 계기였다. 반공동맹이라는 전선이 사라지자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한데 묶였던 일본 식민주의와 아시아의 구식민지가 기억의 분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소련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 식민주의 종주국과의 협력과 친선을 강요받았던 동아시아의 옛 식민지들은 이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 P39

고노 담화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국가 책임과 배상을 인정하는 정공법 대신 총리와 관방장관의 ‘사과‘ 방식으로 매듭지으려는 한계를 드러낸 점은 분명히 지적돼야 한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설치된 민간 주도의 ‘아시아여성기금‘은 전후에 구축된 국가 간 질서를 흔들지 않는 범위 내에 식민지 피해를 가두어 버리는 ‘봉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당시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애매한 태도를 보였기때문이기도 하다.(중략) 사태 초기에는 법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다가 민간단체의 소송 제기가 잇따르자 추후에 입장을 바꾼 것이다. 당시 한·일 정부 간의 정치적 타협이 일본 정부 특유의 ‘사과하되 배상하지 않는‘ 외교 태도에 힘을 실어준 것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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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라는 시대에는 우선 어쩔 수 없는 서구화를 향한 충동이 있었고, 방어적민족주의와 국민국가의 형성이 분주히 행해졌다. 그런 농밀한 분위기 속에서 구시대적 도덕과 신시대적 사상의 부정합을 고민한 청년들이 살았고, 세계와 연동된 경제와 그것이 가져온 소비생활로 크게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러일전쟁을 정점으로 서로 겹쳐졌다가 마침내 멀리 분리되어간 국가적 자아와 국민적 자아의 균열에 함몰된 불운한 사람들도 있었다. 따라서 혹은 당연하게도 사람들의 일상은 각자 바꾸기 힘든 기쁨과 슬픔을 태운 채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가는 것이다. - P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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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의 운명은 영겁으로 전개되는 긴 우주 역사에서 보면 한순간을 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덧없다고 말하기보다 정말 우연호 주어진 목숨이라 평하는 편이 옳으리라. - P5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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