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도시는 24시간 내내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마사지를 받으며 돈을 쓰는 환경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연길에서는 최근 성행 중인 새로운 소비 산업에 종사하고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혜택을 누리기 위해, 연변의 농촌은 물론 중국 각지로부터 한족과 조선족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다. 현지인들 사이에는 ‘한국 돈이 없었다면 이처럼 왕성한 소비와 도시화는 불가능했으리라‘는 믿음이 강하게 존재한다. - P187

조선족 이주자들은 농촌과 도시, 소도시와 대도시, 나아가 중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복잡한 이주 서사를 펼치면서, 송금주도형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 P189

점심을 먹으며 왕 사장은 연변 지역의 ‘3대 산업‘에 대해 통찰 섞인 농담을 던졌다. 즉, 연변에서의 ‘중공업‘은 연기가 나는 불고기 식당이고, ‘경공업‘은 서비스 및 여가 산업인 노래방이며, ‘수공업‘은 수작업을 요하는 마사지 업소라는 것이었다. 농담을 들은 이들 모두 웃으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물론 이는 연길에서 핵심 산업이 된 쾌락 위주의 소비 산업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를 담고 있었다. 왕 사장이 언급한 주요 업종인 불고기 식당, 노래방, 마사지 업소는 도시의 네온사인을 밤낮으로 밝히며 도시 경제를 견인하는 주요 엔진이다. - P191

그와 동시에 이 농담은, 변방 지역인 연길에는 전도 유망한 산업이나 벌이가 좋은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은근한 무시를 담고 있었다. 연변, 특히 그 수도인 연길이 생산 활동을 위한 노동의 공간이 아니라 즉각적인 만족을 위해 돈을 흥청망청 쓰기만 하는 공간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족이 ‘한국 돈‘에 의존하게 된 상황에 대한 우려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 한국 돈은 두 가지 함의를 지닌다. 우선 한국 돈을 벌기 위해 조선족은 한국으로 떠나기를 꿈꾸면서 중국에서는 열심히 일하지 않고 게으르게 지내며 돈을 낭비한다는 비판을 포함한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 돈은 연변에 거주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이 변경 지역의 더 높은 경제 수준과 소득을 보장하기 때문에 연변 경제의 ‘심장‘으로도 이해된다. - P192

조선족은 대부분 연변과 한국을 오가며 국제 이주의 양상을 보이는 데 반해, 한족은 연변 외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오거나, 연변 내 여러 지역을 오가는 국내 이주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즉, 한족 역시 이동하고 있으나 조선족과는 다른 이동성을 보인다. - P193

 ‘조선족 고객‘과 한족 노동자‘라는 식의 구분이 존재하더라도 두 집단 모두 한국바람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민족적 특성과 광범위한 경제적·문화적 힘이 함께 어우러져 특수한 두민족이 상호 의존하는 송금 경관을 구성한다. - P194

 이렇듯 한족은 한국으로의 이주 기회를 상대적으로 덜 갖고 있음에도, 그들 또한 한국바람이 불러일으킨 극적인 사회 변화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 P194

정식 호구제 등록 없이 이촌향도를 감행한 농민들은 도시민으로부터 차별을 받고 국가 보호와 시장 활동으로부터도 배제된다. 그러면서도 미디어와 사회담론은 이들을 ‘국가의 구제가 절실한‘ 극빈층으로 규정하면서, 도시의 일부가될 권리를 인정해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배제적 포용" 또는 "포용적 배제" 체제 아래에서 이주자들은 교양과 질서의식을 갖춘, 생산적이며 책임 있는 새로운 도시 주체로 거듭날것을 요구받는다. 이 체제는 빈부 격차나 도농 격차를 개인의 ‘수준‘에 달려 있다고 보면서, 자기 변혁을통해 이상적인 중산층 소비자이자 시민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도시 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농민 출신 이주자들은 그렇게 도시의 ‘타자‘로 형성되어 갔다. - P197

가난한 농민이든 비교적 잘사는 도시민이든, 연변에서는 그 누구도 한국바람을 피하기 어려웠다. - P202

란 사장을 포함해 농촌에서 연길로 이주한 조선족 노동자들은, 한국으로 가는 것만이 농민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을 극복하고 안락한 도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경로라고 여기곤 했다.
이러한 도시로의 이주는 연변 농촌의 민족 구성을 급격하게 바꾸었다. 대다수 조선족 농촌 지역은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조선족이 경작하던 토지를 남겨둔 채 한국이나 다른 중국의 대도시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해당토지는 농민 개인 소유가 아니지만 국가로부터 30년간 임대받은 것이어서, 본래의 임차권자가 떠나면 누군가가 재임차해 경작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행 기회가 훨씬 적은 한족 농민들이 조선족 지역으로 이주해 조선족이 ‘버린‘ 토지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 P205

한국에 가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보내주는 한국 돈에 의존하는 삶은 이제 조선족 가정에서 매우 흔한 일이 되었다. - P211

‘한국물을 먹는다‘는 표현에 담긴 조롱은 조선족 귀국자들의 사소한 행동이나 태도를 지적하는 데 사용된다. 예컨대 ‘한국물을 먹은 이들은 한국 사람처럼 차려입고 화장을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처럼 보이지 않는다거나, 연변과 서울 말투를 섞어 쓰며 한국 사람처럼 말하려고 해보지만 제대로 해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한국 스타일을 모방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면, 연변에서는 야유를 받거나 놀림거리가 된다. 또한 모방은 ‘결핍‘의 증명으로도 여겨진다. ‘한국물을 먹은‘ 이들은 실제 경제적 지위와는 관계없이 그저 거들먹거리기 위해 돈을 써댄다고 여겨진다. 중국에서는 그만큼 큰 돈벌이가 없기에 돈이 떨어지면 다시 한국으로 갈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분명히 ‘한국물을 먹다‘라는 표현에는 한국 문화, 스타일, 그리고 돈에 중독된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 대한 과장 섞인 경멸이 담겨 있다. 한국에서 돌아온 조선족들이 과소비를 한다는 이미지는 그들의 자녀에게까지 투영된다. - P212

젊은이들은 외식을 하고 돈을 ‘물처럼‘ 써댔는데, 이는 부모가 한국에서 보내오는 ‘비상금‘ 덕분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저녁에는 마치 그들이 한턱을 내야 한다는 기대가 존재했다. ‘한국 돈‘ 탓에 조선족 젊은이들이 업무를 게을리하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다는 불만도 제기되었고, 이런 소비 행태는 연변의 고용주들에게 골칫거리로 여겨지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조선족이 한국에서 버는 만큼 벌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일하려 들지 않는다는 인식도 퍼져 있었다. - P214

연변에서 만난 한국인 고용주들은 ‘게으른 조선족‘과 ‘부지런한 한족‘으로 고정된 민족 이미지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개인의 경험들이 쌓이며 그러한 고정 관념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었다. 예컨대 조선족은 급여가 높은 일자리를 찾아 계속 이직할 생각만 하고, 회삿돈 관리에 정직하지 않으며, 시간이나 돈 관리에 있어서도 책임감이 없다고 한국인 고용주들은 이야기했다. 그에 반해 한족은 성실하고 믿음직하게 여겼다. 연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조선족이 부모나 다른 가족으로부터 ‘쉽게 받는 돈‘ 때문이라고 해석하며, 그 갑작스러운 물질적 풍요가 조선족의 직업 윤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 P217

조선족의 국제 이주는 연변을 유동적 상황으로 몰아넣으면서 문화적·경제적 특성을 재정의하도록 요구했다. 한족은
‘유동하는 인구‘, ‘민족적 타자‘, ‘소수 민족‘으로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연변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이들 한족 노동자들은 연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나의 집주인과 같은 조선족에게 민족 차이에 따른 언어적·문화적 불편함을 안기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성장하는 산업인 서비스업에서 조선족 고객들을 상대로 일하며 연변 경제를 이끌고 있기도 했다. - P218

비록 한국 돈이 만들어낸 송금 경제는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었지만, 나는 연변이 이제 ‘한국바람‘에서 ‘중국 바람‘으로 넘어가는 전환 국면에 들어섰음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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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에는 멀리 있는 파트너를 기다리며 혼자서 자녀를 키우거나 가사를 돌보는 남편이나 부인들이 많은데, 이들을 연변 말로 ‘보토리‘라 부른다. 이 보토리들의 외로운 기다림은 이혼율 상승과 비행 청소년 증가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 P156

기다리는 배우자는 상대가 혼외 관계를 맺거나 이혼하려고 한다면 송금이 갑자기 중단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불안을 느낀다. 기다림은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인 시간 실천의 한 부분이다. 조선족 이주자와 그 가족에게 기다림이란 외로움을 견디고 안정적인 가족 관계와 송금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 P157

연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돈이 가는 곳에 사랑이 있다"는 말처럼, 기다림은 송금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고 중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근거를 만드는 힘이다. 송금과 배우자의 귀환을 ‘제대로‘ 기다리는 동안, 이 기다림의 시간을 공유하고 미래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릴 가능성을 높이면서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 P160

이전에는 불법 알선업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주를 앞둔 조선족 부부는 대개 누가 가고 누가 남아 자녀를 돌보고 가족의 재산을 관리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한국의 이주 관련 법규와 특정 비자 체제에서 생겨난 제약 속에서, 어느 한 사람만 한국으로 향하는 방식으로 떨어져 사는부부가 점차 많아졌다. 연변에 남아 기다리는 당사자는 집과 송금을 관리하며 조선족 이주의 흐름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했고, 이렇게 가족의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 P163

돈을 둘러싼 갈등은 떨어져 사는 부부가 이혼하거나 다른 배우자를 찾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돈벌이에 나선 아내가 가정 내 주도권을 쥐면서 조선족의 가부장적 가족 관계의 역학을 뒤집기도 한다. - P166

조선족 이주자의 가족들은 한국에서 오는 송금이 언제라도 중단되거나 완전히 끊길 수 있다는 위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송금이 계속되기를기대한다. 송금은 국제 이주 가족 구성원들 간의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킬 뿐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미래를 공유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매개 역할도 한다.(중략) 송금은 단순한 금전적 가치를 넘어, 가족을 향한 배려와 유대를 유지하려는 애정과 책임이 담긴 돈이다. - P172

한국 돈은 부부관계의 역학을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을지녔다. 아내는 자신이 번 소득 덕분에 결혼 생활의 결정권을 쥐게 되었다. - P174

돈에 대한 아내의 집착은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그 돈은 단순한 수입이 아니라, 아내가 오랜 시간 들인 노동, 건강, 젊음, 외로움을 압축한 성취의 결과이다. 곧, 지난 20년에 걸친 노동 시간의 모음집인 것이다. 이 돈은 아내의 또 다른 다른 자아로서, 어떤 형태로든 잘 관리되고 보존되어야 하는 ‘나‘인 셈이다. 둘째, 그 돈은 부부 사이의 관계와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변혁적 힘을 갖고 있다. 아내는 과거 작은 공장에서 일하던 ‘온순한‘ 노동자에서 가족의 재정을 주도하고 통제하는 주체로 탈바꿈했다. 이와 동시에, 스스로를 가부장적 조선족 남성이라고 정의했던 김호 씨는 오히려시종일관 아내의 지시에 따라 가정을 꾸리고 ‘돌봄 노동‘을 대신하며 가족에 헌신하게 되었다. - P175

기다림은 노동이다. 연변에 남아 있는 조선족은 한국에서 직접 일해서 ‘한국 돈을 벌지는 않지만, 기다림을 지속하며관계의 끈을 유지한다. 기다림이 노동인 이유는 이 행위가 두 당사자로 하여금 이주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순환을 지속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다림이라는 노동은 그가치를 언제나 인정받는 것도 아니며, 임금 노동처럼 직접적인 금전적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기다림은 부부가 함께 추진하는 하나의 프로젝트로, 경쟁이 점차 심화되는 중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미래 만들기 전략‘이다.(중략) 두 당사자, 즉 송금인과 수취인은 경제적 가치를 교환하고 공유할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의 미래에 대한 특별한 책임 또한 나누어 갖는다. 이렇듯 부부 당사자가 기다림이라는 노동을 통해 공동의 미래를 열망할지라도, 그 연결성은 언제든 파괴될 수 있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기도 한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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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는 특정 서비스업과 ‘저숙련 노동에 한해 일할 자격이 주어진다. 이로써 새로운 비자 제도는 조선족의 노동을 특정 직종에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들은 사면을 받고 새로운 비자를 발급받으면서 "배제를 통한 포용"을 경험하게 되었다. - P123

이처럼 사면을 계기로 조선족 이주자들은 미등록 노동자에서 ‘자유로운 이동 주체‘로 전환되었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연변은 여러모로 낯설었다. 급격한 도시화, 과도한 소비문화, 치솟는 생활비, 그리고 무엇보다 한족 인구의 급증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이었다.(중략) "연변은 여러모로 예전 같지가 않아요. 중국어를 못 하면 살기 힘들어졌거든요. 은행원, 판매원, 노동자, 식당 종업원 할 것 없이 어디를 가나 한족이네요. 저는 그게 싫어요." 내가 한국에서 만난 조선족은 대체로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 모든 소통이 한국어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한국이 ‘고향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고향, 연변에 돌아온 이들은 이곳을 낯선 고향으로 여기고 있었다. - P126

한국을 경험한 조선족들은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을 공통적으로 언급했다. 첫째, 한국이 단기간에 발전하고 성장한 것은강도 높은 노동 덕분이며 따라서 조선족도 한국 사람들의 노동윤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음식, 시간, 환대가 풍부하고 여유로운 중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시간 압박에 따른 스트레스로 사람들이 ‘일밖에 모르는‘ 비인간적 삶‘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연변에서의 ‘자유 시간‘은 중국이 좀더 살기 좋고 편한 나라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 P129

옥순 씨의 발언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순환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과도한 자유 시간‘이 ‘과도한 일상‘으로 이어지고, 이는 또다시 ‘과도한 비용‘으로 이어져 결국 비생산적이고 재정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돌아온 다른 조선족들로부터 연변에서 놓여 있던 소득과 지출이 불균등한 상황에 대해 자주 들었다. 연변에서는 ‘과도한 자유 시간‘에서 비롯된 소비, 즉 ‘과도한 일상‘이 존재했다. 돈은 한국에서 벌지만 소비는 연변에서 이루어지면서, 생산과 소비 사이에 뚜렷한 지리적 분리가 생겨났다. - P133

한국에서 돌아온 조선족들은 ‘일만 하며‘ 고독한 삶을 살던 당시에는 연변의 정겨운 분위기를 그리워했지만, 연변에서의 ‘과도한 일상‘에 드는 비용은 경제적·정서적 부담이 되었다. 옥순 씨의 친구들과 친척들은 그가 한국에서 많은 돈을 벌었다고 여기며 식사나 잔치에 자주 초대했고, 후하게 돈을 쓰기를 기대했다. 옥순 씨에게는 이러한 기대가 또 다른 부담으로 다가왔다. - P134

한국 사회 곳곳에 조선족 이주자들이 존재하지만, 대중매체와 공적 담론은 이들을 가리켜 ‘기회주의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질이 낮은‘ 데다가 ‘노동 윤리가 부족한‘ 집단이라는 낙인을 찍곤 한다. - P140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린 나이에 한국으로 이주해 연변 말투를 쓰지 않는 다음 세대 조선족이 한국 내 조선족 사회에서 점차 증가하고 있다. - P141

조선족 노동자들의 일자리 이동이 잦은 이유는일당제로 일하는 이들이 많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일자리는 쉽게 그만둘 수 있으며, 고용주 또한 노동자를 손쉽게 해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44

어느 조선족 공산당원이 말한 "이제 한국 돈은 맥이 없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족 이주자들은 한국과 중국 사이의 소득 격차가 줄어들고 한국 환율이 약세를 보이면서 코리안 드림은 쇠퇴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이동의 자유를 누리는 조선족은 여전히 많지만, 한국돈이 예전과 같은 힘을 상실하면서 코리안 드림은 위기에 처해 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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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은 개혁개방 이후 다양한 형태의 ‘바람‘을 겪었지만 그중에서도 한국바람은 연변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노동시장과 이주 정책, 관련 법규를 재편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 이후 식당, 건설, 돌봄 제공 부문 등 한국 사회 곳곳에서 조선족 이주노동자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한국 정부는 이들을 수용할 제도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조선족 이주자는 미등록 노동자가 되었고, 2000년대 중반까지 추방의 불안 속에서 시달려야 했다. - P91

1990년대 초 친척 방문으로 시작된 한국행이 몇 년 사이에 이주노동의 형태로 급속히 진화하자, 조선족과 한국 친척들은 친척방문비자가 지닌 상호 이익적 측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당 비자는 이주 시장에서 ‘상품화‘ 되기 시작했다. 나는 조선족이 한국 친척들과 ‘비자 거래‘를 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을 수 있었다. - P93

 이렇듯 ‘사업 같은‘ 비자 거래를 마치고 나면 양측이 등을 돌리는 일이 다반사였고, 아예 절연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연변에서는 다른 중국동북 지역에 비해 친척방문비자에 의존해 한국에 입국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드물었기 때문에, 한국 쪽 친족 관계는 그 존재만으로도 귀중한 가치가 있었다. 한국에 친척을 가진 연변 조선족은 이를 최대한 이용했으며, 그렇게 성사된 한국 방문은 급속한 경제적 성과로 이어졌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부유해진 조선족들은 연변에서 코리안 드림을 부추기고 가속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P95

가족 중 누군가가 한국인과 결혼하면 가족 구성원들은 초청받을 권리를 갖게되고, 이는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이전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이 직접 사용할 수 없는 경우, 비자는 ‘시장‘으로 나와 한국행을 희망하는 ‘고객‘에게 판매될 수 있다. 이렇듯 이주 시장에서 상품으로 획득한 권리의 결과로 생긴 친족 관계는 ‘서류 친족‘이 되고, 국경을 넘는 이주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경제적 가치로 작동한다. 냉전 시기 신변의 위협으로 여겨졌던남한 친척과의 관계가 ‘한국바람‘이 불면서 귀중한 잠재가치로 변화한 것이다. 반면 실제 혈연관계에 있던 북한 친척과의 유대는 흐려져갔다. - P97

이렇듯 ‘재외동포법‘은 임의적 포섭과 선택적 배제로 인해 "위계적 국적"을 전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국과 일본의 ‘부자 사촌‘은 포섭하면서 중국과 구소련의 ‘가난한 사촌‘은 배제한다는 것이다. 이 법은 특히 조선족의 법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상당수 조선족이 식민지 시기(1909~1945) 또는 그 이전에 중국(당시 만주)으로 이주하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 시민권을 부여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 P102

1992년 한중 수교 정상화 이전까지 한국에서 조선족의 존재나 그 역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중공‘이라 불렸던 공산주의 중국은 소위 ‘빨갱이 콤플렉스‘로 대표되는 한국의 반공주의 문화와 정치 환경에서 금기시된 주제였기 때문이다. - P103

교회에서 만난 조선족 여성 대부분은 ‘불법 체류자‘로서 추방될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조선족의 타자성은 ‘미등록‘이라는 체류 조건 때문에 사회 서비스를 충분히 누릴 수 없다는 점에서 드러났다. 미등록 조선족은의료보험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프면 교회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나 아는 사람을 통해 약을 구했다. - P109

조선족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한국인과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추방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정책을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특히 한국 정부가 미등록 이주자를 체포하거나 추방하는 모습을 보며,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는 굴욕감을 느꼈다. 조선족은 ‘같은 한민족‘을 대하는 한국 정부의 방식에 대해 자주 불만을 제기했고 친구들이 전해주는 소문이나 미등록 이주자들의 추방을 다룬 언론 보도를 접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 P113

이주자 신분, 노동자 계급의 정체성, 그리고 조선족이라는 민족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인 H-2 비자는 조선족을 한국 노동시장에 공식적으로 편입시켰다. 이들을 이주노동자로 공식 범주화하는 것은 노동시장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서 조선족에 대한 차별을 가시화하는 결과를낳았다. 조선족이라는 용어는 점차 ‘중국‘, ‘사회주의‘와 결합된 의미를 내포하며 그들을 한국 사회 내에서 타자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게 되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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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들이 연변의 경제적 성공과 중국의 경제적 성공을 구별 짓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연변은 분명 중국 영토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완전히 중국 땅은 아닌 것처럼, 다른 중국 지역과는 별개의 구역인 것처럼 언급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한족을 ‘중국 사람‘이라 부르고, 자신들은 ‘조선족‘이라칭하며, 조선족과 ‘진짜‘ 중국인을 구분하는 언어 습관을 보였다. 한국계 중국인이 스스로를 가리켜 칭하는 ‘조선족‘이라는 명칭에는, 자신들이 한족과 동일한 시민권을 누리지만 민족적으로는 확실히 다르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이러한 구별 짓기를 통해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정착민의 후예임을 일상적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 P59

나는 국경과 변경지역이라는 개념이 분단된 조국에 인접하며 거주하는 중국 내 소수민족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원리로 작동하는 순간을 자주 목도했다. 이런 의미에서 연변의 지리는 그 지역 사람들이 처한 정서 조건, 즉 ‘변경지역에 사는 정착 이주민‘이라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근간이 되기도 한다. - P60

연변은 예측 불가능한 한국, 중국 등의 나라와 북한을 잇는 통로이자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처럼 변경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입지는 연변에서 냉전의 긴장감을 지속시키는 요소로 작용했고, 그 결과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남북한 모두로부터 정치적 영향을 받았다. - P61

변경지역은 두 세계를 연결하는 모호한 공간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변방인의 시야와 주변화된 느낌과 함께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라는 경계에 선 감각을 심어 놓는다. 또한 변경지역은 사람들이 "양면적" 세계를 한눈에 담으면서 지배적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과 복합적 정체성까지 표출할 수 있는 중첩적, 중층적 공간이기도 하다. - P62

조선족은 연변에 소속감을 가지면서도 불편함 또한 느끼는데, 이는 연변이 편안한 민족 구역인 동시에 더 큰 세계와의 교류를 제한하는 국지적 변경지역이기 때문이다. 연변은 조선족의 민족적 중심지이자 집거지이다. 나는 조선족이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소외된 변경지역을 떠나려 애쓰면서도, 민족적 집거지로서 연변에 깊은 안착감을 느끼는 순간을 자주 목격했다. 한국과 중국의 경제 개혁으로 재편된 소수민족 변경지역 연변에는 바바가 말한 "낯섦" (떠나고자 하면서 머물고자 하는 이중적 감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으며, 연변 주민들은 ‘이주의 바람‘에 강한 친화성을 보이면서 외부 세계와의 적극적인 접촉을 시도해왔다. - P63

1945년 일본이 만주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중국인, 한인, 일본인 간의 민족적 긴장이 만주국 체제 아래 억눌려 있었다. 내가 만났던 조선족들은 자신이 일본과 국민당을 상대로 한 해방 전쟁에 기여했고, 사회주의 혁명에도 깊이 관여했다는 점을 강조했다.(중략)
그러나 중국 국적의 소수민족으로 인정받고 난 뒤로도, 조선족은 국가적 정체성보다 민족적 정체성을 우선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만났던 80세 전후의 조선족 공산당원들은 1950년대 당시 한반도에 대해 느꼈던 감정적·민족적 애착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 P67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들어 상황은 급변했다. 1958년에 시작된 ‘중국 정체성 교육‘은조선족이 중국 공민이며, 중국만이 유일한 조국이라고 가르쳤다.
문화대혁명은 조선족에게 특히 가혹했다. 조선족을 숙청과 박해의 대상으로 삼은 상황에서, 남북한과의 민족적 유사성이 문제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민족성‘을 드러내는 문화와 담론이 중국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며 엄격히 금지되었다. - P68

해럴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을 문명화 프로젝트로 규정하면서, 중국 중앙정부가 한족 중심의 시각에서 소수민족을 바라보며 후진적이고 미개하고 불결하고 우매하다는 "민족적 낙인"을 찍음으로써 그들의 주변성을 야기했다고 분석한다. 중국이 1950년대 실시한 민족 분류 프로젝트로서 고안해낸 임의적이고 단순화된 민족 범주는 여러 민족국가-집단이 복잡하게 얽힌 역사, 문화, 정치를 외면한 채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치적 언설 아래 다양한 소수민족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 P72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의 민족 관련 담론은 ‘민족 개념의 활성화‘ 과정뿐만 아니라, ‘한국바람‘에 의해서도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소수민족의 사례와 차이점을 지닌다. (중략) 조선족은 국제 이주를 통해 국경을 넘는 ‘월경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각시켜왔다. 이는 국제 노동시장에서 조선족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자 자산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해,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국경 넘기를 통해 조선족은 자신의 민족성을 여러 차례에 걸쳐 재정의해온 것이다. - P74

지난 30년 동안 연변에서는 한족 인구가 급증하여 전체 인구의 70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족이 더 나은 삶을 찾아 연변을 떠나고, 한족 또한 더 나은 삶을 찾아 연변으로 이주한 결과이다. 이처럼 ‘들어오기와 나가기‘, ‘머물기와 떠나기‘와 같은 다양한 이주의 흐름 속에서 소수민족 지역의 경관이 점차 재편되었다. 내가 조선족들과 나눈 일상 대화에서는 급격한 한족 인구 변화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자주 드러났다. - P80

한족과 조선족 사이의 긴장은 ‘민족적 안정감‘과 공존한다. 이 편안함은 민족성에 따른 공간 분리를 토대로 한다. 우선 학교가 분리되어 있다. 조선족과 한족은 서로 다른 학교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교육을 받는다. 그 결과 사회적 연결망 또한 민족적으로 구분되는 경향이 있다. - P81

연변 조선족은 그 민족적 편안함 속에서 자신들이 국지적이고 고립된 소수민족 지구에 살고 있다는 현실을 깨닫기도 한다. 다시 말해 ‘연변이야말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인식은 연변이 작고 후진적이며 변방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동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 P82

대다수 조선족은 서울을 방문하기 전까지 연변을 벗어나 다른 중국 도시를 가본 경험이 없었다. 한국으로 이주한조선족 대부분에게 서울은 그들이 처음 마주한 가장 큰 도시였다. 중국 도시들에 대해서는 때때로 애매한 불편함과 두려움을 느끼는 조선족이 많지만, 서울은 그들에게 안락하고 친숙한 정서를 주었다. 이처럼 편안한 느낌을 형성하는 데에는언어적 유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한국어로 적혀 있고 누구나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이다. - P83

조선족이 대규모로, 때로는 무모하리만치 끈질기게 한국으로의 이주노동을 감행해온 이유는 단지 한국과 중국 간의 엄청난 소득 격차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에 대해 느끼는 민족적 친밀감 때문이기도 했다. - P84

권헌익이 지적했듯, ‘1989년 이후‘나 ‘공산주의 붕괴 이후‘ 같은 명확한 시대 구분은 냉전을 유럽 중심으로 이해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지역적으로 다양한 사상과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냉전의 ‘종식‘이라는 획일적인 시대 구분에 기대고 있다. 마찬가지로, 널리 통용되는 ‘포스트 사회주의‘ 역시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난 급진적 다양성을 간과한 용어이다. - P85

나는 ‘한국바람‘이 급격한 경제 발전과 근대적 삶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조선족이 과거와 미래, 정치와 경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느끼는 양가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상징적 매개라고생각한다. 광범위한 국제 이주와 급변하는 경제 환경에 직면한 조선족은 포스트 사회주의와 포스트 냉전 시대의 교차점에서 생겨난 한국바람에 영향을 받으면서 ‘연변식 사회주의‘ 속에 놓인 자신들의 민족적 위치를 재조정하고 있다. - P86

연변은 주민들이 편안하게 정착하여 민족구역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는 곳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변방의 소외된 소수민족 지역이기도 하다. 연변은 머물고 싶으면서도 떠나고 싶은 복합적 욕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층적 공간이다. 연변은 이 지역에 불었던 여러 종류의 바람에 취약성을 보일지도 모른다. 특히 ‘한국바람‘은 조선족이 한국 노동시장과의 민족적·문화적 친밀감을 바탕으로 경험하게 된 개혁개방 경제의 독특한 결과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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