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에는 멀리 있는 파트너를 기다리며 혼자서 자녀를 키우거나 가사를 돌보는 남편이나 부인들이 많은데, 이들을 연변 말로 ‘보토리‘라 부른다. 이 보토리들의 외로운 기다림은 이혼율 상승과 비행 청소년 증가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 P156
기다리는 배우자는 상대가 혼외 관계를 맺거나 이혼하려고 한다면 송금이 갑자기 중단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불안을 느낀다. 기다림은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인 시간 실천의 한 부분이다. 조선족 이주자와 그 가족에게 기다림이란 외로움을 견디고 안정적인 가족 관계와 송금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 P157
연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돈이 가는 곳에 사랑이 있다"는 말처럼, 기다림은 송금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고 중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근거를 만드는 힘이다. 송금과 배우자의 귀환을 ‘제대로‘ 기다리는 동안, 이 기다림의 시간을 공유하고 미래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릴 가능성을 높이면서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 P160
이전에는 불법 알선업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주를 앞둔 조선족 부부는 대개 누가 가고 누가 남아 자녀를 돌보고 가족의 재산을 관리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한국의 이주 관련 법규와 특정 비자 체제에서 생겨난 제약 속에서, 어느 한 사람만 한국으로 향하는 방식으로 떨어져 사는부부가 점차 많아졌다. 연변에 남아 기다리는 당사자는 집과 송금을 관리하며 조선족 이주의 흐름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했고, 이렇게 가족의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 P163
돈을 둘러싼 갈등은 떨어져 사는 부부가 이혼하거나 다른 배우자를 찾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돈벌이에 나선 아내가 가정 내 주도권을 쥐면서 조선족의 가부장적 가족 관계의 역학을 뒤집기도 한다. - P166
조선족 이주자의 가족들은 한국에서 오는 송금이 언제라도 중단되거나 완전히 끊길 수 있다는 위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송금이 계속되기를기대한다. 송금은 국제 이주 가족 구성원들 간의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킬 뿐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미래를 공유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매개 역할도 한다.(중략) 송금은 단순한 금전적 가치를 넘어, 가족을 향한 배려와 유대를 유지하려는 애정과 책임이 담긴 돈이다. - P172
한국 돈은 부부관계의 역학을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을지녔다. 아내는 자신이 번 소득 덕분에 결혼 생활의 결정권을 쥐게 되었다. - P174
돈에 대한 아내의 집착은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그 돈은 단순한 수입이 아니라, 아내가 오랜 시간 들인 노동, 건강, 젊음, 외로움을 압축한 성취의 결과이다. 곧, 지난 20년에 걸친 노동 시간의 모음집인 것이다. 이 돈은 아내의 또 다른 다른 자아로서, 어떤 형태로든 잘 관리되고 보존되어야 하는 ‘나‘인 셈이다. 둘째, 그 돈은 부부 사이의 관계와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변혁적 힘을 갖고 있다. 아내는 과거 작은 공장에서 일하던 ‘온순한‘ 노동자에서 가족의 재정을 주도하고 통제하는 주체로 탈바꿈했다. 이와 동시에, 스스로를 가부장적 조선족 남성이라고 정의했던 김호 씨는 오히려시종일관 아내의 지시에 따라 가정을 꾸리고 ‘돌봄 노동‘을 대신하며 가족에 헌신하게 되었다. - P175
기다림은 노동이다. 연변에 남아 있는 조선족은 한국에서 직접 일해서 ‘한국 돈을 벌지는 않지만, 기다림을 지속하며관계의 끈을 유지한다. 기다림이 노동인 이유는 이 행위가 두 당사자로 하여금 이주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순환을 지속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다림이라는 노동은 그가치를 언제나 인정받는 것도 아니며, 임금 노동처럼 직접적인 금전적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기다림은 부부가 함께 추진하는 하나의 프로젝트로, 경쟁이 점차 심화되는 중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미래 만들기 전략‘이다.(중략) 두 당사자, 즉 송금인과 수취인은 경제적 가치를 교환하고 공유할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의 미래에 대한 특별한 책임 또한 나누어 갖는다. 이렇듯 부부 당사자가 기다림이라는 노동을 통해 공동의 미래를 열망할지라도, 그 연결성은 언제든 파괴될 수 있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기도 한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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