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만 가지 죽는 방법 밀리언셀러 클럽 13
로렌스 블록 지음, 김미옥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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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제목에 눈길이 가서 호기심에 읽어 보기로 결심했던 책. 이 책이 나온 것을 알게 된 건 학기가 끝나기도 한참 전, 중국에 있을 때였다. 어느 사이트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신간 안내 메일에 이 책이 나와 있길래 흥미를 가지고 있다가 집에 와서 결국은 사서 보게 되었다.

사실, 초반은 상당히 지루했다. 괜히 샀다고 정말 심각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냥 무턱대고 주문하지 말고 서점에서 좀 넘겨보고 사든지 말든지 결정을 할 걸 하고 얼마나 후회를 했던지. 그 생각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던 것은 중반부로 접어들면서였다. 살인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주인공인 탐정이 언뜻 보기에는 전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정보들을 하나하나 수집해 나가는 부분쯤부터 소설은 조금씩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초반에 그렇게 지루했던 건, 내가 이 소설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을 그저 그런 평범한 추리소설로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이 책은 여타의 추리소설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끔찍하고 처참하고 지능적이며 자극적인 사건들이 중심이 되어 급박하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추리소설들과는 달리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꽤나 차분하고 우울한 분위기였다. 이 소설의 중심은 사건 그 자체라기보다는 주인공의 생활과 행동이라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경찰에 몸담고 있었으나 어떤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범인을 향해 쏜 총이 실수로 어린 소녀에게 맞아 그 소녀를 죽게 만든 후 경찰 일을 그만두고, 제대로 사무소를 낸 것도 아닌 상태에서 알음알음으로 들어오는 일거리를 받아서 근근이 살고 있는 알콜 중독자 탐정. 소설 속에서 중점적으로 서술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공의 일상이었다. 내가 초반부를 지루하게 읽었던 것도 아마 서술이 너무 일상적이어서였을 것이다. 이 소설은 내가 지금까지 읽어왔던, 사건의 해결만을 중시하는 추리소설과는 많이 달랐으니까.

소설의 주인공인 매튜 스커더 형사 역시 보통의 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귀스트 뒤팽이며 셜록 홈즈며, 아르센 뤼팽(탐정은 아니지만;)이며 에르큘 포와로, 미스 마플, 드루리 레인 등의 탐정들처럼 인간같지 않은 통찰력을 뽐내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그는 매우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아니,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더 인생이 힘든 사람이다. 그는 알콜 중독으로 몇 차례 병원 신세를 졌으며, 금주를 하려고 독하게 마음을 먹지만 결국 또 술을 입에 대고 병원으로 실려가 '다음에 또 마시면 그땐 죽습니다'라는 말까지 듣고, 의뢰인에게 받은 돈은 떨어져서 생활하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내 주느라 언제나 생활이 힘들다. 술에 대한 유혹을 참느라 커피를 마셔 대고, 바 앞을 지날 때마다 괴로워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그가 매우 인간적인 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작은 실마리라도 얻기 위해 힘들게 다리품을 팔고, 때로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기도 한다. 사무실에 편히 앉아 머릿속으로 수많은 가능성을 추리해서 사건을 해결하거나, 탐문수사를 한다 해도 이미 두뇌 속에는 사건의 대략적인 전모가 그려져 있어서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변장 기술까지 천재적인 다른 탐정들(..말하다 보니 무슨 제갈공명 같다)과 다른 인간적인 면을 매튜는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보여주는 그의 인간적인 면에 나는 묘한 매력을 느꼈고, 특히 맨 마지막에 표현된 모습에 감동했다. 이 소설은 그저 사건만을 다루지 않고 탐정을 한 인간으로서 묘사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고, 또 드물게 감동을 주는 추리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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