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전쟁 기간에 중국인은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도록 갖은 노력을 다해 갑골과 기타 유물을 보호했다. 그들은 수 톤의 역사 유산을 포장하여 기차, 트럭 혹은 배에 실어 일본인보다 한 걸음 앞서 안전한 곳으로 운반했다. 그 전쟁이 끝난 뒤 국공 내전이 일어났다. 이때 상징적인 의미에서 유물은 더욱 높은 가치를 지녔다. 국민당은 정통의 계승자를 자임했다. 이 정당은 쑨원이 창립했다. 따라서 정당의 역량이 약해질수록 중국의 과거를 보호하는 일은 더 중요해졌다. 1948년에서 1949년사이에 국민당이 최종적으로 타이완으로 물러날 때 역사 문물을 함께 운반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때의 고고학자에겐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타이완 해협을 건너 최고의 유물을 따라가든가, 아니면 좋은 유적지가 있는 대륙에 남는 길이었다. - P573
타이완의 대륙 투자는 끊임없이 성장하여 양안 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개혁 개방 이래 경제적 연계는 공산당이 타이완을 끌어들이는 책략 가운데 하나였다(경제특구의 명확한 목표는 ‘타이완의 조국 회귀‘다). 20년 뒤 이는 대륙의 타이완 책략 중 유일하게 성공한 항목으로 드러났다. 협박과 위협은 여태까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력은 갈수록 타이완으로 하여금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 P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