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의 의학계는 전쟁과 관련해 그 어떤 반성도 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세균전을 전개하고 인체 실험을 한 731부대 관계자들은 패전 뒤 교토대, 교토부립의대 등의 의학부 교수가 되고, 공립병원의 원장이 되고, 정부에서 일하고, 혈액 관련 제약회사 미도리십자를 세웠다.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전통은 에이즈 바이러스가 감염된 혈액으로 수많은 사람을 감염시킨 미도리십자의 기업문화, 그리고 일본 후생성과 의학자의 유착으로 이어지고 있다. - P30

의사는 죽음을 수도 없이 겪게 된다. 의학도가 되면 바로 시체 해부 실습부터 시작해서, 병리해부, 임상 연구 등 인간을 신체로 보는 데 익숙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의학‘ ‘신체의 의학‘으로 기울지 않기 위해서는 환자가 얼마나 살려고 애쓰는지를 알게 해주는 ‘생명의 의학‘을 먼저 배워야 한다. (중략) 구체적인 한 인격의 발달과 생활사를 지그시 바라보는 ‘생명의 의학‘으로 무장하지 않는 한, 의사는 ‘죽음의 의학‘과 ‘신체의 의학‘의 도구가 될 뿐이다. - P47

나는 지금까지 전범으로 중국의 수용소에 잡혀 들어갔었던 일본군 출신들을 많이 만나왔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나는 중국인을 학살했다. 그러므로 사정이 어찌 됐건 그들도 나를 죽일지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윤리적인 죄의식이 없는 데다, 중국 쪽에 기대려는 어리광 같은 심리마저 있었다. 죄라고 자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 P50

자아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집단으로 있는 한 불안하지 않다. 집단이 혼란에 빠질 때는 자신도 혼란에 빠지지만, 그때뿐이다. 집단은 끊임없이 개개인이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모호하게 흐리고, 집단이 요구하는 모든 행위에 동의하도록 한다. - P51

오가와는 정작 전쟁에서 죽어간 당사자는 ‘영령‘으로 여겨지는 것을 거부하는데, 살아남은 자가 전사자를 영령이라 부르는 괴리를 문제 삼고 있다. 죽어가는 자에게는 살기 위한 타산이 없는데, 살아남은 자에게는 전사자의 혼조차 세속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타산이 숨어 있다. 그 타산이 다음 전사자를 잉태하는 사상으로 발전한다. - P73

국가권력이 국민정신의 총동원을 목표로 검열을 강화할 때, 천황제 국가의 악에 대해 의연하게 반대할까, 아니면 침묵할까, 그것도 아니면 검열을 비껴갈 듯 말듯한 발언을 해서 결국에는 탄압당할까, 셋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 지식인은 변증법이라는 주문에 의지해 명확한 대립을 모호하게 피하며, 자신들의 이론이 높은 차원에 서서 파악하는 것‘이라거나, ‘단번에 파악하는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우선 지식인 지도자로 남고 싶은 의지가 모든 것에 앞서 있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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