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는 인구가 40만에 육박하는 일본 제2의 도시이자 열도의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잘 먹는다고 소문이 자자한,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치는 상인들이 지배하는 도시였다. 에도, 교토와 나란히 오사카는 번주가 지배하는 도시와 반대되는 의미로 쇼군이 다스리는 영역이었다. 쇼군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오사카를 차지했다. 일본의 3대 도시 가운데 에도는 쇼군의 본거지, 교토는 천황의 본거지였지만 오사카는 둘 다를 지탱하는 경제적 원동력이었다. - P220

부유한 상인들이 쌀과 돈을 매점하는 한편에서 왜 빈민들이 굶어죽어야 하는가? 왜 의로운 사람들이 뇌물이나 챙기면서 밤이고 낮이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오만한 관리들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가? 사실 쇼군의 가신들은 대부분 강도, 그러니까 거리에서 애들 군것질거리를 뺏는 흔한 범죄자나 다를 바가 없었다. - P221

영국인들은 동아시아에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원양항해 철제기선과 세계 최강의 해군을 자랑했다. 유혈 전투가 이어지면서 중국의 피해가 커지자 일본의 식자층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공포가 점점 커지면서 그들은 사실을 깨달았다. 청나라의 강력한군대가 패배할 수도 있다면, 서구의 포함들이 에도 항구에 나타나는 경우 일본이 맞서 승리할 가능성은 전무했다.
마침내 "국내의 소요"와 "해외의 위협"으로 제기되는 위험에 대한 일본 지도자들의 인식이 교육받은 농민과 도시 셋집에 사는 평민들에게까지 다다랐다. 이런 불길한 예감은 에도성에 있는 쇼군에서부터 에치고의 논에서 일하는 농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본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처음에는 에도를 집어삼켰다. - P225

과소비를 제한한다는 명분을 내건 개혁의 잔인한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개혁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체면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쓰네노가 돈이 필요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흔히 의지하는 전당포조차 몇 년 전만큼 옷을 잘 받아주지 않았다. - P2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