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간다는 것은 단지 여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말하기에 대한 갈구이기도 했다. 나는 말하기 위해 멀리 갔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곽을 빠져나가 울음으로 소식을 알리는 작은 새 같았다. - P9
매번 얼마나 많은 진실을 토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짓말이나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말은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말없이 인정할 수 있는 진실을 말하진 못했을지언정 적어도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만 말했다. - P10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작가는 인간과 인간의 기억을 위해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기억과 느낌 때문에 우리는 글쓰기라는 행위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 P15
당시에는 생존과 생활이 중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었고 혁명이 유일한 국가의 대사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혁명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붉은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가 큰 소리로 ‘마오 주석 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했을 때, 우리 부모님과 마을 사람 대부분은 혁명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면서 무력하게 시련이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그리고 이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눈앞에 검은 막이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한낮에 어두운 밤이 내리는 것 같았다. - P17
오늘날의 중국은 이미 어제의 중국이 아니다. 중국은 부유하고 강대해졌다. 13억 인구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자 갑자기 강한 빛이 세계의 동쪽 끝에서 반짝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불빛 아래서 광선이 강할수록 음영도 더 짙어지고 덩달아 어둠이 생겨나 더 깊고 두터워지는 것처럼, 이 빛 속에는 따스함과 밝음,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연의 우울과 근심, 불안 때문에 빛줄기 아래의 음영과 냉기, 안개가 휘감고 있는 잿빛 어둠을 느끼는 사람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숙명적으로 어둠을 잘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오늘날의 중국이 왕성하게 성장하는 동시에 왜곡되어 가는 것을 본다. 발전하는 동시에 변질되어 부패하고 부조리해지며 어지러워지고 무질서해지는 것을 본다. 매일의 시간과 매일 일어나는 일이 전부 인지상정과 일상적인 이치를 넘어서고 있는 것을 본다. 인류가 수천 년의 시간을 들여 수립한 감정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 그리고 인간 존엄의 척도가 그 광활하고 오래된 땅 위에서 해체되고 붕괴되며 소실되고 있는 것을 본다. 법률의 준엄한 제도가 어린아이들의 고무줄놀이로 전락한 것을 본다. - P18
나는 그 광활하고 온통 혼란과 생기로 가득한 땅에서 내가 불필요하게 남아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광활하고 온통 혼란과 생기로 가득한 땅에서 나와 나의 글쓰기가 많든 적든 간에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삶과 운명, 하늘이 나를 태어나면서부터 어둠을 느낄 수 있고 느껴야만 하는 사람으로 지명했기 때문이다. 임금님이 옷을 입지 않은 것을 본 아이처럼 햇빛 아래서는 항상 큰 나무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즐거운 노래가 어우러진 연극에서는 항상 막 옆에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따스하다고 말할 때 나는 추위와 냉기를 느끼고 사람들이 빛을 말할때 나는 어둠을 본다. 사람들이 행복감에 젖어 춤추고 노래할 때, 나는 누군가 그들 발밑에서 오라에 묶이고, 걸려서 넘어지고, 구속되는 모습을 본다. 인간의 영혼 속에 감춰져 있는 불가사의한 추악함을 보고 허리를 곧게 펴고 독립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굴욕과 노력을 본다. 좀더 많은 중국인의 정신생활이 돈과 노랫소리 속에서 권리를 박탈당하고 와해되는 것을 본다. - P20
이 맹인을 통해 나는 글쓰기의 원리를 한 가지 깨달았다. 다름아니라 어두울수록 더 빛이 나고 춥고 차가울수록 더 따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쓰기가 존재하는 의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존재를 피하게 하는 것이다. 나와 나의 글쓰기는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켜던 그 맹인처럼 어둠 속을 걸으면서 그 유한한 불빛으로 어둠을 비춰 사람들로 하여금 최대한 어둠을 보고서 확실한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빛나거나 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P22
오늘날의 중국은 세계의 태양이자 빛인 동시에 세계의 거대한 걱정이자 어두운 그림자인 것 같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매 순간 알 수 없는 걱정을갖고 있고, 알 수 없는 불안, 근거 없는 두려움과 근거 없는 경솔함을 갖고 있다. 역사를 되돌아보는 데 대한 두려움과 망각이 있고 미래에 대한 동경과 근심이 있다. 현실에 대한 매일 매 순간 넋이 뒤흔들릴 정도의 놀라움과 기본적인 상식 및 이치에 위배되고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상황들이 있다. - P22
그래서 ‘시간과 장소, 사건‘을 뚫고서 나는 오늘의 현실 속의 가장 일상적인 어둠을 본다. 수천 년의 문명을 보유한 중국에서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거리에 쓰러진 노인을 보고도 어쩌면 그것이 사기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며 다가가 부축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노인이 흘린 피는 너무나 붉고 뜨거웠다. - P24
나는 중국의 노인들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집단으로 자살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가난과 질병, 노동의 피로와 도덕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내면의 걱정과 운명에 대한 불안, 현실 세계에 대한 마지막 절망 때문에 죽는 것이다. - P25
나는 자신이 하늘과 삶이 어둠을 느끼도록 지명한 특별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빛의 주변, 잿빛 어둠 속에 숨어 있다. 잿빛 어둠과 검은 어둠 속에서 세계를 느끼는 가운데 펜을 들어 글을 쓰면서, 이 잿빛 어둠과 검은 어둠으로부터 밝은 빛과 달빛, 온기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사랑과 선, 영원히 박동하는 영혼을 찾는 것이다. 아울러 글쓰기를 통해 어둠에서 나와 빛을 얻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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