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의 최적화는 전체의 최적화와 다르다. 부분적으로는 아무리 똑바로 쌓아올려도, 전체가 똑바르게 되지는 않는다. - P9
사람들은 성공에서는 배우지 못한다. 오히려 실패로부터, 성공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배운다. 참고로 스웨덴에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멀지 않은 헬싱보리에 규모는 작지만 민간이 지은 실패 박물관도 있다. 20세기 산업디자인의 실패작을 모아놓은 것으로 바사호 박물관과는 무관하지만, 나라에는 ‘실패에서 배운다‘는 사고방식이 시민들 사이에 널리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 P10
이데이의 경영은 매니지먼트적으로는 합리적이었지만, 소니라는 특이한 기업체의 독창성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전문성이 높은 사일로를 만드는 것에 의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회사의 효율화를 높이는 듯" 보였으나 각 사일로의 경영진은 "라이벌 기업뿐 아니라 회사 내 여타 부서로부터도 ‘몸을 지키려‘ 했다. 타부서와 참신한 아이디어를 공유하지 않게 되고, 우수한 사원의 타부서 이동도 꺼리게 됐다. 부서 간 협력이 사라졌고, 실험적인 브레인스토밍이나, 단기간에 이익을 창출할 수 없는 장기투자도 미루게 됐다. 어느 누구도 리스크를 감당하는 것에 소극적이 되어버렸다. " - P14
일본의 전기산업은 한국과 대만에 완패했다. 이 패배의 원인을 반드시 버블붕괴와 대불황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소니가 워크맨 이후 아이패드와 아이폰이 등장할 가능성을 깨닫지 못한 채 당시 가정에 인기가 있던 게임기 개발에 열중했던 것처럼, ‘가전‘ 카테고리가 붕괴한 정보사회의 미래상을 일본 기업들이 진지하게 내다보지 못한 것이 실패의 주요 원인이다. - P16
‘헤이세이‘의 30년을 일본의 단계적인 쇠퇴과정으로 본다면, 4개의 ‘쇼크‘가 이 과정에 박차를 가했다. 제1의 쇼크는 1989년에 정점을 찍은 버블경제의 붕괴이고, 제2의 쇼크는 1995년의 한신·아와지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이다. 제3의 쇼크는 2001년의 미국 동시다발테러와 이후 국제정세의 불안정화, 제4의 쇼크는 물론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다. ‘헤이세이‘는 일본사회가 이 4개의 국내외 쇼크와 이후 변화에 대한 대응을 강요받으며 스스로의 모습을 바꿔간 과정이다. - P30
이 두 번의 쇼크가 발생한 시점의 정권이, 전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후자는 간 나오토라는 비자민당 총리의 지휘 하에 있었던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두 번의 쇼크와 자민당의 총리는 조우하지 않았다. 이 자체는 역사의 우연이지만, 이후 정치의 변화에는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닐까. - P33
어떤 경우든 쇼크 몇년 뒤에는 자민당의 포퓰리즘 정권이 탄생했다. 미국처럼, 쇼크 뒤 재난자본주의가 직접 도입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 1995년 쇼크 발생 몇년 뒤 정국은 우정민영화로 향했고, 2011년 쇼크 이후 도쿄올림픽 개최로 나아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재해와 심각한 사고, 불황과 국가 이벤트 개최, 공공부문의 민영화 사이에는 분명 노골적인 연계가 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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